2017년 3월 13일부터 3월 19일까지의 일주일.
세 달이나 지나서야 올리다니. 밀린 걸 쓸 때 가장 귀찮은 건 그때그때 메모해 둔답시고 여기저기의 sns에 써둔 것을 찾느라 타임라인을 거슬러 올라가는 일이다. sns 중독자라 벌려 놓은 게 많다. 문제는 이번엔 기록을 뒤졌는데도 기록 자체를 안 했다는 거.. 그리고 내 머리가 기억을 못 한다는 거..ㅠㅜ
메인 역 근처에서 근무를 마치고 일단 배가 고파 어디론가 밥을 먹으러 가야겠다 싶었다. 늘 그렇듯 불현듯 떠오르는 곳이 없을 땐 일단 구글 지도를 열어본다. 메인 역 근처의 역인 베이먼 역 쪽에 우육면 가게들이 몰려있는 것이 떠올라. 그곳으로 가보기로 했다.
여러 사람들이 넓은 가게 안에 띄엄띄엄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남자분이 대접 같은 큰 그릇에 먹는 거을 보고 저것이 대짜겠구나~싶어 맑은 국물의 중짜 우육면을 주문했다. 하지만 웬걸, 남자분이 먹고 있던 그 대접 같은 큰 그릇이 중짜였던 것이다. 면이 두 개는 들어간 것 같았다. 일반 사이즈가 아니야. 안 그래도 양이 적은데 이걸 무슨 수로 다 먹나. 게다가 패기 좋게 오이 반찬까지 꺼내 올려놓은 상태다.
다 먹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반을 겨우 먹고 가게를 나왔다. 역으로 향하는 길에 길가의 다른 우육면 집들을 보니 그들도 사이즈는 비슷비슷했다.
베이먼의 우육면 집에 가는 분들은 사이즈에 조심할 것. 기왕이면 물어보고, 남자분들 대짜는 세숫대야에 나올 가능성이 있다. 참고로 우육면의 경우 대 짜의 가격은 NTD 110, 소 짜는 NTD 90이다.
쯔주찬. 아직 가지 볶음이 있던 시절이다. 가지는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어쩌면 불호에 가까웠지만 일본에서 지내면서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종종 내가 사서 무침 요리를 만들어 먹었던 적도 있고. 일본 이자카야 술집의 가지 절임은 가장 좋아하는 메뉴 중에 하나가 되었다.
어느 순간 갑자기 먹을 수 없었던, 먹기 싫었던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될 때마다 왠지 모르게 '어른'이 되어가는 기분이 든다. 만 스물한 살 때 단기 아르바이트를 했던 사무실에서 횟집으로 회식하러 갔을 때 처음으로 고추냉이가 들어간 초밥을 먹을 수 있게 되었을 때, 만 스물두 살 때 술을 마시는 즐거움을 알았을 때, 만 스물여섯일곱 즈음에 아메리카노를 마실 수 있게 되었을 때, 만 서른에 굴과 치즈를 먹을 수 있게 되었을 때가 그렇다. 최근엔 대만에 와서 '생강'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많이는 못 먹지만 나 자신이 좀 어른스럽게 느껴진다. 그때마다 인생에서 레벨업을 한 기분이 든다. 나만 그런가? 히힛.
대표적인 대만 여행 관련 커뮤니티인 네이버의 '즐거운 대* 여행' 카페에 라오허지에 야시장의 소롱포 추천글이 올라와 다녀왔다. 양 옆의 건물에 붙은 가게가 아닌 길 가운데의 노점이라는 단서로 소롱포 집을 찾기 시작했다. 다행히 길 가운데에서 소롱포를 판매하고 있던 집은 한 곳뿐이었다. 송산역 쪽이 아닌 반대쪽 입구에서 가까운 곳에 있었다. 이곳이 맞다고 확신한 것은 카운터에 한국 여성분 두 분이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소롱포는 그저 그랬다. 가격은 8개입에 100원이었지만 그 크기는 무척 작았다. 맛도 무슨 맛인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평범했던 것 같다. 이후에 여러 소롱포 집들을 돌아다녀보니 그래도 이 집은 중타는 치는 곳이었던 것 같다.
돌아오는 길에 시장의 또우화 집에서 또우화豆花를 먹었다. 가게 아줌마도 아줌마의 어린 딸들과도 전혀 대화가 통하지 않았지만 어찌 되었든 주문해서 먹었다. 아쉽게도 아무런 기억이 없다. 다음에 라오허지에 야시장에 가면 다시 들러봐야지.
이날 라오허지에 야시장을 돌아다니는데 앞에 지나가던 일본인 관광객 커플이 "이런 길거리 음식 먹으면 백퍼 배탈 날 걸. 먹지 말라고 쓰여 있었어."라고 이야기하는 게 들렸다. 하나하나 지적하며 부정적인 이야기를 한다. 이런 거 정말 듣기 싫다. 깨끗하고 본인 기준으로 상식적인 일본에서 영원히 나오지 말지 여행 왜 왔나 싶다. 우연히 그 뒤를 걷고 있던 나마저 재미가 뚝 떨어질 정도인데, 비슷한 성향이 아닌 사람이라면 함께 여행하는 사람이 하나하나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은 상당히 스트레스를 받을 일이다.
관광지에서 큰 목소리로 들려오는 한국인 관광객들의 짜증내는 소리, 조근조근 내 귀를 파고드는 일본인 관광객들의 꼬장한 대화. 가끔은 하나도 못 알아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마이너스의 기운이 내게 전해지는 게 싫다. 이럴 땐 이어폰을 꽂으면 좋은데 꼭 이럴 때에만 아이팟 배터리가 없거나 아이팟을 아예 안 가져왔거나. 요즘(이 포스팅을 작성 중인 6월 중순 기준)은 가족 여행도 '별로' 혹은 '마음에 안 들어' 등의 부정적인 말을 뱉는 사람들에게 벌금을 부과하거나 그때의 식비를 계산하게 하면 모두가 즐거운 여행을 다닐 수 있다고 한다. 선거 기간에 가족끼리 정치적으로 의견이 맞지 않을 때에도 '지지 발언을 한 후보가 떨어지면 가족 여행 전액 부담하기' 등의 조건을 내걸었더니 가족 모임에 평화가 찾아왔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누군지 몰라도 다들 천재다.
휴일이라 도자기 마을로 유명한 잉거에 가기로 했다. 전부터 계속 가려고 했지만 쉬는 날엔 꼬박 비가 오곤 해 휴일인데 비가 오지 않는 날을 기다렸다. 기차가 자주 있는 것이 아니니 매장 안에 앉아서 먹고 갈 시간은 없어서 개찰구 밖의 의자에 앉아 급하게 먹었다. 시계를 보며 급하게 씹는 데에만 열중해서 무슨 맛으로 먹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레몬을 뿌려서인지 레몬향이 그득했던 것은 기억난다.
도대체 잉거를 몇 바퀴를 돌았는지 모르겠다 싶을 때 즈음에 일단 고픈 배를 달래야겠더라. 쓰러질 것만 같았다. 일본인들의 잉거 포스팅에서 본 또우화 집에 들어가 또우화를 시켜 먹었다. 阿嬤ㄟ豆花라는 이름인데 세 번째의 한자는 사실 入자를 위에 쓰고 下자를 아래에 쓰는 존재하지 않는 한자였다. 그래서 阿嬤(入下)豆花라고 표기하는 경우도 있다. 맛이 강한 또우화였다. 잉거도 도자기 마을 쪽으로는 먹을 곳이 거의 없었다.
돌아오는 길은 갈 때와 반대쪽 길로 가보기로 했다. 잉거역에서 잉거 도자기 마을로 가는 길과는 전혀 다른 동네가 나왔다. 그저 도자기 판매로 연명하는 작은 동네인 줄 알았는데 의외의 꽤 큰 상권이 형성된 큰 동네였다. 교복을 입고 귀가하는 학생들도 많았고 대형 실내 시장도 있었다.
일단 타이베이로 돌아가기 전에 밥은 먹어야 할 것 같아 구글맵에 의존해 맛집을 찾았다. 초밥집이었는데 우동도 팔길래 우동만 주문해보았따다. 분위기가 식사가 메인인 음식점 분위기가 아닌데- 했더니 초밥이 주 메뉴인 이자카야였고, 우동은 사이드 메뉴였다. 일단 안 된다고 하진 않았기 때문에 우동만 먹고 갔다. 술집에서 마무리로 나오는 우동인 만큼 정통 우동다운 맛은 아니었다.
이날은 매니저님들과 새로 이사한 곳의 마무리 작업을 했다. 숙소 근처의 음식점을 소개하여주셨는데, 지금은 나의 단골집 중 하나다. 이날 내가 먹은 것은 루로우판. 얻어먹은 음식의 가격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 이후로도 열 번은 더 갔을 집인데 메뉴를 본 기억이 없네.
이곳은 구글로 검색하기엔 이름이 많다. 台南擔仔麵으로도 되어있고, 丸味凉麵으로 나오기도 한다. 주소는 台北市大安區安東街45號之7이다. 둥근 건물의 1층에 빼곡하게 들어서있는 가게들 중 하나이니 잘 찾아야 한다.
사이드 메뉴로 청경채 무침과 돼지 수육을 주문했다. 아, 이 돼지고기 생강 편육嘴邊肉 은 정말 사랑이다. 한국어론 취변육이라고 읽고 중국어론 Zuǐ biān ròu라고 읽는다는데 솔직히 도무지 입에 붙질 않아 나 혼자선 주문을 못 시키는 메뉴다. 이거 ㄴㅇㅂ에서 검색해도 잘 안 나오는 음식이라 잘 안 알려진 것 같은데 혹시라도 관심 있으시다면 먹어보는 걸 추천한다.
일이 모두 끝나고... 일 리가, 정리하던 도중에 '이 김(?)은 어떻게 할까요'에서 시작되어 점점 판이 커지더니 결국 손 놓고 술판으로. 이야기 나누다 보니 시간이 늦어져 퇴근(?)했다. 이곳은 바로 위의 루로우판을 먹은 탄짜면 가게의 옆 집이다.
퇴근할 때에도 아직 뭔가 좀 부족하다는 기분을 버릴 수가 없었는데 결국 집 근처에서 또우화를 사 먹었다. 먹으면 일단 배는 100%까지 채워야 직성이 풀리는 이상한 버릇은 고치기 힘들다. 따뜻한 또우화가 겨울 한정 메뉴라 즐길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흐흑.
전날 미룬(....) 마무리를 하러 다시 출근. 매니저님께서 전날 낮에 먹었던 집의 간판 메뉴인 탄짜몐을 포장으로 사다 주셨다. 처음 영접한 탄짜몐. 이 이후로 이곳에서 근무하고 밥 먹을 일이 있을 때엔 매번 이곳에서 탄짜몐을 먹는다. 싸고 가볍게 먹기에도 좋지만 일단 맛이 좋아서 좋다. 이후에 나의 소울 푸드님으로 등극.
고통스러운 자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매니저님과 정리가 끝나갈 때 즈음 총괄 매니저님께서 마케팅 팀과 회식할 건데 올 거냐고 물어보셨다. 매니저님은 안 가신다고 했고, 나는 가기로 했고, 다른 매니저님과 합류해 둘이서 택시를 타고 모임 장소로 향했다. 이미 어느 정도 진행이 된 상황이었다. 회식에는 늘 불참하시던 마케팅 팀의 대만인 매니저님도 계셔서 반가웠다. 그러나 나는 먼저 귀가하신 매니저님을 따라갈 걸 하며 후회했다. 앉아 있는 것이 고통스러운 회식 자리는 2013년 4월의 일하던 실용음악학원의 회식 자리 이후로 처음이다. 그게 벌써 4년 전이라니. 아무튼. 그때 처음 한국의 회식 자리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인지 알았다. 사장 혹은 윗사람이 돈 내고 먹여주고 다 같이 건승을 다짐하는 척하면서 먹여준 값으로 계속 쪼아대는 것. 일본에선 아르바이트, 파트 타이머들의 모임이었고, 단순한 식사 모임, 술 모임, 친목 이외의 의미는 갖지 않았기 때문에 먹은 만큼 일로 맽어내라 식의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의 식사는 인생 첫 경험이었다. '이래서 윗사람과의 회식을 싫어하는구나.'라고 한국 사회에 대해 하나 배웠다. 단순한 식사 모임인 줄 알고 불참하겠다는 선생님들을 하나하나 설득해 참석시킨 것이 미안하기 그지없었다.
이 날은 그런 자리는 아니었지만 지금까지 겪어본 적 없는, 그래서 4년 전의 그 회식이 떠오르는 자리였다. 그 자리에 있던 멤버들이 한국에서 회사생활을 했던 한국인들이라 그런 분위기가 형성이 된 것일 수도 있다. 밥 얻어먹으러 왔다가 다소 격양된 분위기에 졸아 대만인 매니저님과 둘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매니저님은 "어떻게 지금까지 일본인들이랑 일을 해왔냐, 대단하다."는 질문을 했다. 일을 잘 했고, 일에도 일본어에도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짱이야' 마인드로 해왔다고 답했다.
이후에 대만인 매니저님은 퇴사하여 만나지 못하고 있지만 보고 싶어요 매니저님, 흐흑.
일 끝나고 여기저기 정처 없이 돌아다니다가 근처의 유명 라면 집이 떠올라 가보았다. 다행히 대기가 길지 않아 10분 정도 기다린 후에 들어갔다.
일본의 짜고 느끼한 음식에는 익숙해져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 익숙함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 걸까, 20대까지만 해도 맛은 둘 째치고 먹는 행위가 가능하냐 아니냐 자체가 문제였기 때문에 아무 거나 신경 쓰지 않고 먹었는데 만 서른 하나, 작년부터 몸을 사리게 되더라. 직화에 구운듯한 챠슈는 다소 기름이 많아 느끼했다.
내가 일방적으로 이웃으로 추가해 염탐하고 있는 네이버 블로그 이웃분 중 이 동네는 아니지만 근처에 거주하는 분이 추천하신 음식점에 다녀왔다. 거리가 꽤 될 줄 알았는데 막상 걸어가 보니 가까웠다.(내 기준) 내가 본 포스팅을 소개하려고 해도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 뭐지?;ㅂ; 이 집 역시 간판과 다른 이름이 존재한다. 五分埔一台南意麵 혹은 松山台南意麵이라고.
돼지고기 생강 편육은 이름을 몰라 사진을 보여주며 주문했다. 역시 어디에서 먹든 맛있다.
간장 생강 소스와 생강이 만들어내는 단짠매움의 조화가 젓가락을 계속 유혹한다. 가격이 기억이 안 난다. 블로그에서 본 가격과 다른 가게에서 시켜 먹었던 가격보다 싸서 잉? 하고 돌아왔던 기억이 있다.
1)
3월에 새 학기가 시작되면서 내가 일하는 민박 업체도 비수기에 들어갔다. 쉬는 날이 많아졌고, 쉬는 만큼 움직이지 않아 살이 찌기 시작했다. 2월의 28일 동안 7일의 쉬는 날을 받았고, 3월의 15일 동안 7일의 쉬는 날을 받았다. 살이 찌는 건 그렇다 쳐도 시급으로 벌어먹고사는 입장에서 일하지 않는다는 얘기는 다음 달이 힘들어진다는 얘기다. 10년을 시급으로 살아가는 내가 제일 싫어하는 거다, 근무 시간 줄어드는 거.
2)
잉거를 여러 바퀴를 돌고선 찻잔 하나, 손잡이가 달린 컵 하나, 다반 하나 이렇게 구입했다. 이상과 현실이 맞지 않아 중간 지점에서 타협했더니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모양이 되어버렸다. 그릇을 보면 사고 싶은 욕망이 생긴다. 일본에선 혼자 살았건만 10명이 집에 놀러와도 젓가락, 그릇 모자라는 일 없을 정도로 많은 식기를 갖고 있었다. 하나하나 공들여 모았던 식기들이었지만 귀국 정리할 때 다 갖다 버렸다. 개인 음식점에서도 사용하는 것과 같은 식기들도 꽤 있어 팔아도 꽤 돈이 나왔을 텐데 내게 귀찮음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잉거에서 예쁜 그릇들을 보고 있자니 여기서 그릇이랑 찻잔 사다가 멜버른에서 카페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찻주전자는 원하는 모양, 사이즈, 색, 질감, 가격 등의 모든 조건에 부합하는 물건이 없어 찻잔만 구입하고 그냥 돌아왔다.
후에 일본의 생활용품 전문점 nitori에서 투명 주전자를 구입했다. 이 아이템들이 대만 생활을 조금은 더 행복하고 즐겁게 해줄 것이라 믿는다.
3)
대만 생활 두 달 하고 1주일이 지나서야 취두부 냄새가 '일반 음식 냄새'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역하거나 고약하다보단 '냄새가 좀 나네' 정도.
4)
중국어 공부를 하기 위해 사장님에게 많은 어학원들에서 교재로 사용하는 책을 빌렸다.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지만 해보는 데까지 해봐야지.
5)
목은 침을 삼키기가 힘들고 이물감이 느껴지고, 전엔 느껴지지 않던 땡김이 느껴진다. 왼쪽 가슴은 누가 가슴 밑을 세게 누르는 것처럼 통증이 있고, 이 통증은 등까지 이어졌다. 대만에 온 이후로 몸이 안 아픈 곳이 없다. 멀쩡한 부위는 오른발의 발가락 다섯 개 정도? 그동안 쌓이고 쌓였던 것들이 지금 여기서 터지는 것 같았다. 특히 독일에서 귀국 준비할 때 즈음부터 면역력이 형편 없어져, 면역력이 떨어졌을 때 생기는 질병들이 나를 괴롭힌다. 대만에 오기 전에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면서 "선생님, 도대체 이런 건 왜 생기는 건가요?"라고 물으면 대부분이 "면역력이 떨어져서 그래요." 몸이 멀쩡한 곳이 없다 보니 이대로 여기에서 지내는 게 맞는 건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요즘도 꿈에서 이가 흔들거리다가 빠지거나 아예 치아가 모두 바스러지는 꿈을 꾼다. 거의 10년 동안 꾸준한 꿈의 테마다. 이 꿈이 싫은 건 꿈을 꾸는 순간에도 잠에서 깼을 때에도 기분이 불쾌하기 때문이다. 금방 사라질 줄 알았던 목의 통증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분명히 내 포스팅을 보면서 '저렇게 먹으니까 몸이 아프지'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다.
6)
임산부 배려석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 http://www.womennews.co.kr/news/112350
내 생각을 추가한 공유 글에 아이를 둘을 낳은 친구는 이 꼴 저 꼴 보기 싫어 앉지 않았다고 답변을 썼고, 한 친구는 현재 임산부석을 과하게 만든 경향이 있으니 강제성을 두어 임산부만 앉을 수 있게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이다-라는 댓글을 달았다. 일본에서 살 시절, 한 번은 만삭이었던 임산부가 내 앞에 서 있어 자리를 양보했더니 고개를 여러 번 숙이며 감사하다는 말을 수 없이 반복했다. 앞에 누가 서 있든 말든 아예 신경 쓰지 않는 게, 자리 양보라는 게 없는 게 일본이긴 하다. 두 아이가 있는 일본인 친구 역시 배가 부른 상태에서 자리 양보를 받아본 적 없다고 했다. 대만에선 의자 색이 다른 자리는 거의 무조건 비워둔다. 내가 전철을 타는 시간대가 러시아워와는 거리가 있는 시간대라서 그런 걸 수도 있지만, 빈자리가 없어 많은 사람들이 서서 가더라도 임산부와 노인, 장애인 등 그 자리의 대상자들이 서서 가는 건 본 적이 없다. 이 '특별한 자리'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6월 초의 일기에서 다시 하기로 한다.
7)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아이 낳아 키우고 싶은 마음이 코딱지만큼도 없다. 두 나라에서 아이를 낳아 키운다고 생각하면 각각 다른 헬이 예상된다. 한국은 무한 경쟁 속에서 키워야 하고(한국 사회에서 이것 만큼은 변하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일본은 내가 견디기 힘들 것 같다.
아이를 키우는 환경을 떠나서, 아이를 갖고 낳고 키우는 사람들을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만 든다. 진심으로 존경한다. 친구들의 임신과 육아 이야기를 들으면 세상엔 각자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임신도 출산도 육아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다고 결론을 내리게 된다. 나는 내가 아닌 다른 존재를 위해 나 자신을 희생할 수 있을 만큼의 아량도 희생정신도 참을성도 없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 자신의 단 하나도 잃고 싶지 않다. 이기적인 걸까? 나만 그런 건 아닐 것 같은데. 30대에 성별 상관없이 비혼 인구가 늘어나고 있다. '못'하는 사람들보다 '안'하는 사람들이 늘어간다고 생각한다. 아이는 낳고 싶은 사람들이, 낳을 수 있는 사람들이 낳으면 된다. 낳고 싶지 않은 사람들에게, 낳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 출산을 강요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얼마 전에 논란이 된 '전국 가임 여성 인구 지도'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살면 저런 걸 만들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상상도 못 해본 역대급 정신 나간 짓거리였다.
그리고 나는 한반도의 인구가 지나치게 많기 때문에 1000만 명 대, 2000만 명 미만으로 줄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자꾸 내수 시장의 발전을 위해 한국도 1억 인구를 달성해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주장들을 볼 때마다 내 머리가 다 아프다. 이 코딱지만 한 나라에 억 대의 인구가 웬 말인가. 북한과 통일을 해서 국토가 확보된다고 해도 그 동네는 고산지대가 많아 거주지로 사용할 수 있는 땅이 별로 없다. 난 서울에 인구의 1/4가, 경기도에 인구의 1/4가, 수도권 지역, 전국 면적의 12%에 인구의 1/2가 몰려있다는 것도 소름이 끼친다. 서울은 사람이 너무 많아. 인구만 몰려있나. '서울민국'이라는 말이 괜히 생긴 게 아니다. 어후.
8)
가끔은 독일이 그리워진다. 독일이 그리워지는 게 아니라 독일에 두고 온 사람들이 그리워지는 것 같다. 멜버른은 당시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이 더 이상 멜버른에 없기 때문에 사람보다는 도시가 더 그리운 경우지만, 독일은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점점 심해져간다. 돌아갔을 때 내게 '어서 와. 잘 돌아왔어.'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더더욱 그리워지나 봐.
9)
3월 14일, 부재자 투표를 신청을 마쳤고 19일 등록이 완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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