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네 번째 좌표는 '아카이빙 분야'로 가보았습니다. 많은 개인과 문화예술 조직에서 아카이빙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습니다. 어떻게 개인의 데이터를 모아볼 것인가, 우리 공동체 데이터를 어떻게 아카이빙 할 것인가, 조직의 데이터 중에서 무엇을 어떻게 지속 가능한 방법으로 기록할 것인가? 이런 질문에 대해 오랜 시간 동안 그 방법을 탐구하고, 컨설팅하면서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과 공동체의 이야기를 아카이빙'하고 계신 분을 만났습니다. 아카이빙에 대한 질문을 가지고 계시다면 좋은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으실 겁니다.
"일상과 공동체 아카이빙 분야의 개척자"
1. 이름은? 사회에서 연차는 어떻게 되시나요?
손동유 입니다. 한자는 동녘 東 넉넉할 裕를 씁니다. 1999년부터 아카이빙 분야에서 일하기 시작했으니까 24년 차입니다.
2. 어떤 일을 해 오셨나요. 일터(작업의 공간)에서 당신의 역할을 소개해주세요 & 역할 속에서 자신의 직업정체성을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학부 때는 공대를 다녔습니다. 학과는 별 의미가 없어서 소개 안 하겠습니다. 다녔다기보다는 적을 두었던 것이죠. 제가 대학에 다니던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은 지금과 비교해서 사회가 많이 불안정했습니다. 저도 그 시대를 상징하는 ‘민주화’라는 격동 속에서 살았습니다. 강의실보다는 시위 현장에서, 선후배들과 토론에서 더 배울게 많고, 할 일이 많았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던 것 같습니다. 학사관리도 지금에 비해 허술할 때라 비록 꼴등에 가깝지만 학점은 채워 졸업은 할 수 있었습니다.
학교를 나가려고 하니 고민이 꽤 심하게 되었습니다. 사회에 나가서는 젊은 시절에 가졌던 고민과 행동을 어른답게 옮겨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려고 보니 뭔가 하려고 해도 정작 알고 있는 게 너무 적었습니다. 한국사를 공부하기로 마음먹고 대학원에 진학했습니다. 박사과정 중에 학회 선배의 권유로 막 태동하던 ‘기록학’에 입문하게 되었습니다. 기록학은 우리나라에서 새롭게 등장한 학문이면서, 산업분야이기도 합니다. 이렇다 할 만한 교재도 없을 시절이었습니다. 공부를 하면서 운이 좋아서 새롭게 시작되는 대학기록관, 아카이빙 관련 연구소 등에서 일했고, 그 이후 대학에 비정규직 교수로 일하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인천대 문화대학원 초빙교수와 (협)아카이빙네트워크연구원 원장을 병행하고 있습니다.
국가기록원 민간 기록 분야 강의(2022)
공부도 하고 대학과 대학원에서 학생들도 가르치고 프로젝트(컨설팅, 주민교육, 구술채록 등)를 합니다. 저의 주된 관심은 구술 아카이빙과 일상 및 공동체 아카이빙이라서 자연스레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일합니다. 그러서인지 동료 연구자들 중에는 저를 ‘활동가’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남들 앞에서 저를 소개할 때는 “아카이빙 분야에서 종사하고 있습니다.”라고 합니다.
3. 한번 떠올려 주시겠어요. 당신이 하는(해 왔던) 일을 선택했던 내적인 욕구, 초심, 계기, 우연 등은 무엇이었나요
문경 동네기록단 특강(2022)
아카이빙을 시작할 때는 대학원에 진학할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생각이었습니다. 내용이 부족하니 우선 배울 수 있는 것은 많이 배우자는 것이었죠. 기록학이 역사학과는 불가분의 관계이고 좋아하는 선배들이 권유하니 그러잖아도 공부가 짧았던 저로서는 자연스럽게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래저래 기회를 얻게 돼서 관련된 곳에서 일도 하게 되었고, 그러면서 서서히 제 생각을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일상을 담고 있는 기록물을 아카이빙하고, 보통사람들의 생활과 그들이 관계 맺고 살아가는 모습을 스스로 기록하는 것은 곧 우리 모두가 삶의 주인으로 역사의 주인으로 한걸음 나서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그런 생각을 구체적으로 하게 된 것은 구술사 연구를 접했던 2008년 경이었던 것 같습니다.그 뒤로는 구술, 일상 기록이라는 키워드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4. 당신이 생각하시는 고객에게, 당신은 어떤 역할 기대와 요구를 받는다고 생각하나요.
전고필 선생 초청 담양 이목구심서 공부모임(2021)
‘고객’이라 단어가 조금 생소하지만, 그저 ‘제가 하는 일의 대상’이라고 바꿔서 보면, 기업, 기관, 단체, 개인, 공동체 등에서 스스로의 기억과 경험을 축적해 가고자(아카이빙) 할 때 저의 역할을 필요로 하곤 합니다. 저는 그분들에게 문화자원이자, 지식정보라고 할 수 있는 것들(기록물)을 어떻게 자원화할 것인지, 지속 가능한 활용체계를 만들 것인지를 함께 고민해서 방안을 내놓거나, 그 기록물들을 활용성 높게 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구술 프로젝트, 아카이빙 컨설팅, 아카이빙 교육 등이 주로 하는 일입니다. 학교에서 수업할 때는 학생들이 고객이라면 고객입니다. 그런데 학생들은 큰 요구가 있지는 않습니다. 간혹 아카이빙 분야 진로나 특정 사안에 대한 아카이빙 방법을 구체적으로 질문해 오는 경우는 있습니다.
5. 당신이 하는(해왔던) 일의 시퀀스( '기-승-전-결')는 보통 어떤 흐름으로 이루어지나요?
김포문화재단과 함께 한 일상기록 전시 안내문(2017)_직접 작성
대체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으로 시작합니다. 예를 들면 어떤 기관에서 ‘아카이빙’을 하려는데 무엇을 아카이브(기록물 또는 사료)라고 간주해야 하는지부터 고민을 시작합니다. 가치 기준을 어떻게 정해야 할지, 어떻게 모으고 관리해야 할지, 모은 기록물을 어떻게 공유하는 게 좋을지 등을 가늠합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일의 경중과 완급을 가늠해 보고 우선 해야 할 일 또는 하고자 하는 일을 구체화합니다. 사업으로 만드는 거죠. 일의 규모에 맞게 예산도 확보하고요.(때로는 주어진 예산에 맞춰 일의 규모를 결정하기도 하지만요.) 그런 후에는 일을 추진하고 그 결과물을 평가하면서 이후 계획을 세우는 식이죠. 모든 일이 대체로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6. 일의 과정에서 '당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 혹은 '요구받는 가치'는 무엇이 있나요?
디지털 생활사 아카이빙 성과공유회(2021)
아카이빙의 특성상 저는 ‘지속가능성’을 가장 크게 생각합니다.지속되지 않는 아카이브, 일회적인 사업으로는 아카이브를 만들거나 운영해 갈 수 없습니다. 아카이브를 만들고 운영하기 위해서는 체계(제도, 규정 등), 사람(조직, 전담인력 등), 공간 및 환경(디지털환경 포함)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러 지역의 지자체, 문화기관 등과 주민을 대상으로 한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할 때는 그런 요건들을 강조하고 특히 주민들의 기록 활동 모임이 지속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안을 제시하곤 합니다.
그런데 ‘요구받는 가치’는 사뭇 다릅니다. 몇 지역에서는 저희와 의견을 같이하고 실제로 그렇게 한 곳도 있지만, 대부분은 눈에 보이는 가시적 성과만을 중요하게 생각하곤 합니다. 주민들의 아카이빙 활동 후 전시, 책자 발간, 성과공유회 등으로 마무리하고자 하는 거죠. 물론 이런 활동도 중요하지만 그 밑바탕이 되는 기록물들을 긴 안목에서 차분히 쌓아가고 사용하기 편리하게 정리해 두면 장차 훨씬 다양한 방법으로 공유하면서 훨씬 의미 있는 콘텐츠를 꾸준히 만들어 갈 수 있을 텐데 많이 아쉽습니다.
7. (최근 3년 동안) 당신이 특히 해결해보고 싶었던 문제(과제)는 무엇이었나요, (문제) 과제를 만났을 때, 진입장벽 혹은 페인 포인트(그동안 해소하지 못한 불편함, 어려움 등)는 무엇이었고, 어떻게 풀어보려고 접근하셨나요
앞선 답변에서 이어지게 되는군요. 요즘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카이브’, ‘아카이빙’이라는 단어를 낯설지 않게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배경에는 법과 제도(공공기록물관리법, 정보공개법 등), 디지털 환경, 의식 변화 등이 있다고 장황하게 설명할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기록이라는 것이 뭔가 있는 사람들만의 것이 아니라,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만들 수 있고, 공유할 수도 있고, 그 가치를 선별할 수도 있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카이빙, 아카이브이라는 단어의 뜻에 대해 이해하는 내용이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말 ‘기록(記錄)’은 사전에서 “주로 후일에 남길 목적으로 어떤 사실을 적음. 또는 그런 글”로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카이빙이 글로 적거나, 묘사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경향이 큰 것 같습니다. ‘아카이브(archives)’는 사료(史料) 및 사료를 관리하는 곳이라는 의미로 해석되는 게 적당합니다. 아무것이나 또는 모든 것을 남기는 게 아니라 ‘가치 있는 것’을 남기자는 것입니다.
그 가치는 아카이브의 주인이 정하면 됩니다. 역사적, 법적, 행정적 가치 등을 중시하는 공공기관의 기록 선별에 비해 공동체의 경우 집단의 기억과 경험을 담고 있는 공간, 사건, 사람 등에 가치를 두는 게 충분히 가능하고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가치 있는 사료를 관리하는 곳이 또한 아카이브이기도 하고요. 이런 생각의 차이를 좁히자니 프로젝트나 사업으로 만나서는 쉽지 않습니다. 되도록 많이 대화하고자 하는데, 자칫 잘난 척한다거나, 가르치려 드는 것으로 받아들일까 걱정돼서 잘 못하게 됩니다. 법정 문화도시를 추진하는 곳이나 도시재생 지역과 만났을 때도 이 같은 상황을 겪으면서 어려웠던 기억을 갖고 있습니다. 지금으로선 많은 대화가 필요하고 시간이 약이라고 생각합니다.
8. (최근 3년 동안) 당신이 기억나는 '보람의 순간'이 있었다면
작년(2021년)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디지털 생활사 아카이빙”이라는 이름의 사업을 처음 시작했는데, 우리 연구소가 보조사업자로 선정되어 일했습니다. 전국의 5개 지역(부산, 대전, 광주, 군포, 철원)에서 약 150여 명의 생활사 기록가를 모집, 양성해서 700명이 넘는 보통사람의 지역살이와 코로나로 인해 영향받은 일상을 주제로 구술채록을 했습니다. 약 1,240시간의 영상과 25,000쪽이 넘는 녹취록 그리고 동의서 등 구술 기록을 남겼습니다. 결과물의 양도 놀랍지만 함께 했던 관리자, 생활사 기록가, 구술자 등 약 1,000명과의 교감은 지금도 뜨겁게 남아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보통사람들의 일상을 공적인 기록으로 남겼다는 보람, 연구자가 엘리트나 보통사람을 인터뷰한 적은 있어도 보통사람이 자신의 이웃을 인터뷰해서 기록으로 만들었다는 자부심, 참여한 분들이 스스로 변해 가는 자신의 모습을 동료들과 나누었던 감동 등이 가슴 설레는 경험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오랫동안 기대했던 일이 실현되었던 몇 번 안 되는 삶의 경험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또 아쉬운 점을 말하게 돼서 속상하지만, 이런 식으로 몇 년만 지속된다면 우리나라에 매우 의미 있는 일상 기록이 축적되겠다는 기대를 했는데, 문체부에서는 역시나 ‘가시적 성과’를 우선시하는 것 같습니다. 2022년에도 같은 이름의 사업이 추진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자세한 내용은 찾아보기 어렵더라고요. 문체부에서 작년 결과물을 올해에는 서비스한다고는 했으니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그 외에 우리나라 여러 곳에서 기록 활동 중인 분들의 연대를 위해 모임을 만들어 가고 있는 일, 2019년에 기록관리 분야 대통령 표창을 받은 일 들이 보람의 순간입니다.
9. 당신이 가진 내적인 힘들 가운데, 어떤 힘이 강하신 것 같나요(장점, 나다운 것 등)?
사랑하는 후배의 작별의 인사말(2022)
다재다능한 사람을 보면 부럽습니다. 저는 이래저래 별 재주가 없는 편입니다. 여가는 운동이나 여행으로 보내면 제일 좋긴 한데 그게 그리 쉽지 않습니다. 사람을 꽤 좋아합니다. 최근 1년 사이에 아주 가까웠던 친구와 후배가 먼저 하늘나라로 가서 많이 힘듭니다. 아침에 눈 뜨면 그들 먼저 떠오르는 날이 이젠 좀 가끔 왔으면 할 때도 있습니다. 별 재주 없고 사람 좋아하다 보니 이거다 생각하면 그냥 쭉 가는 거 같습니다. 물론 20대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본다면, ‘당신도 많이 변했다. 많이 타협하고 살고 있구나’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10. 당신의 생각과 행동에 영감/영향력을 주었던 책, 음악, 공연, 영화, 전시 혹은 저자, 작가 등을 소개해주신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사람에게 많이 영향받았습니다. 이 지면에서 이름을 거론하기는 마땅치 않습니다만, 소신을 지키고 평생을 살아간 분들을 존경하고 흉내라도 내고 싶습니다.
최근 인권영화 “너에게 가는 길”(2021)을 보았습니다. 스스로 보통사람의 일상을 아카이빙 하는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정작 우리 주변의 보통사람의 삶을 잘 보지 못했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카이빙 분야가 앞으로 우리 사회에 어떤 기능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일깨워 준 고마운 작품입니다. 책 “엄마 이야기”도 소개하고 싶습니다. 2011년으로 기억하는데 당시에는 ‘고마워요 엄마’라는 제목으로 나온 책을 우연한 기회에 서점에서 만났습니다. 미국의 StoryCorps라고 하는 구술 프로젝트 그룹이 제작한 책입니다. 저에게는 새로운 세상을 보게 해 주었고, 아카이빙, 일상, 콘텐츠 등에 대해 저만의 색깔로 미래를 그려보게 해 준 의미 있는 책입니다. 가끔 용돈 여유 있을 때 여러 권 사서 사람들에게 선물하기도 합니다.
11. 앞으로 어떤 일(작업, 역할)을 하고 싶나요? 그것을 위해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준비하고 있(싶) 나요?
제가 종사하는 아카이빙 분야는 아직 신생 분야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여러 부침도 그래서 생기는 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카이빙 분야가 우리 사회 여러 방면의 사람들과 만나고 대화하고 협업할 수 있다면 좋다고 생각합니다. 여러 분야에서 쓰임새가 있다면 좋겠다고 희망합니다. 마침 2022년 올해를 저나 저희 연구소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꽤 진지하게 생각하는 해로 삼았습니다. 큰 틀의 윤곽은 잡았는데 아직 말하기는 설익은 단계라 말하기는 부끄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