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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유리 Jun 01. 2023

탈지면 같은 것

  나는 어릴 때부터 촉감에 예민했고 특별히 좋아하는 느낌들이 있었다. 실크의 매끈함은 싫어했고, 면의 약간은 거친 듯 보들보들한 느낌을 좋아했다. 특히나 잠을 잘 때면 발을 면 이불에 비비는 습관이 있어 면 이불이 아니면 잠이 들지 못했다. 그 특이한 습관은 지금까지도 쭉 그렇다. 또 나는 탈지면의 촉감을 좋아했다. 어제 문득 어릴 때 기억이 나 오늘은 탈지면에 얽힌 이야기로 글을 써보려 한다. 


  자주 넘어지는 나와 코피가 자주 나는 동생 때문에 우리 집에는 항상 탈지면이 준비되어 있었다. 나는 탈지면의 촉감이 너무 좋은 나머지 다치지 않았는데도 여러 가지 상비약이 들어있던 맨 아래 서랍을 열겠다고 책상 밑으로 기어 들어가서 탈지면을 꺼내 만지고 놀았다. 코피도 안 나는데 코에 집어넣고, 조금씩 얇게 뜯어지는 모양이 신기해 이리저리 다 찢어서 몸 곳곳에 붙였다. 


  어느 날 엄마가 말했다. 다치지 않았는데 탈지면을 코에 집어넣으면 코피가 날 거라고. 나는 갑자기 탈지면이 무서워졌다. 말도 안되는 말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지금까지 코피가 나지 않은 것에 감사하며 그날 이후로 맨 아래 칸 서랍을 열지 않았다. 보드랍게 찢어지는 탈지면이 결대로 칼날로 변해 내 몸을 할퀴는 모습이 자꾸만 머릿속에 떠올라 한참을, 거의 중학생 때까지 탈지면을 만지지 못했다. 꽤나 머리가 굵어지고 나서야 나는 그 말이 과학적으로 아무 근거가 없다는 것을 인지했고, 어린 날의 나를 우스워하며 아무렇지 않게 탈지면을 만질 수 있게 되었다. 


  인생을 살다 보면 탈지면 같은 것을 종종 마주한다. 어릴 때의 작은 기억으로 인해, 스스로 세운 벽에 의해, 말도 안되는 잘못된 신념에 의해, 아무것도 아닌 것에 지레 두려움을 느끼는 일들 말이다. 막상 해보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은 실제로 탈지면같이 보드랍고, 아주 연약한 것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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