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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유리 Feb 06. 2022

나는 매운 치약을 좋아해

취향에 대하여

초등학교 땐가, 잘은 기억이 안나지만 1박 2일짜리 캠프에 갔다. 한 아이가 치약을 가져오지 않았다며 내게 치약을 빌려달라고 했다. 나는 흔쾌히 치약을 빌려주었다. 내 치약을 입에 넣더니 그 아이가 말했다.

'너도 매운 치약 좋아하는구나? 나도 매운 치약 좋아하는데!'

그 순간 나는 그 친구가 정말 근사해보였다. 무려 초등학교 때의 일이니 20년은 전일텐데, 친구의 얼굴은 기억이 나지 않아도 그 순간만큼은 아직도 기억이 나는 것을 보면 정말 강렬하긴 강렬했나보다.


  나는 그 때 까지 내가 쓰는 치약이 매운지에 대해 신경써 본 적이 없었다. 그냥 집에 있는 것을 썼을 뿐이다. 그래서 그랬을까, 어떤 치약을 좋아하는지 뚜렷한 취향을 가지고 있는 그 아이가 너무나 특별해 보였다. 한 번도 생각 해 본 적 없는, 사소하디 사소해보이는 치약에 자기만의 취향이 담길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 나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좋아하는 색깔, 옷, 음식 같은 것이 아니라 치약이라니!


  내가 어떤 것을 좋아하는 가에 대해 최대한 자세하게 아는 것은 정말 멋진 일이다. 초등학생인 나도 은연중에 그것을 알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 친구가 그렇게 근사해 보였던거야.


  대학교 때 내가 쓰던 음악관 앞 뒤로는 커다란 은행나무가 줄줄이 있었다. 대학 동기 중에 은행나무를 좋아하는 친구가 있었다. 그냥 가을이 좋은 것이 아니라 은행나무가 노랗게 익어 바닥이 온통 노란 잎으로 뒤덮였을 때, 그 위를 걷는 것을 좋아했다.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여 은행 나뭇잎이 조금씩 노랗게 변하는 그 순간부터, 가을 비에 잎은 다 떨어지고 앙상한 나뭇가지만 남을 때 까지 모든 순간을 구체적으로 좋아했다. 여름이 시작 될 때 부터 친구는 은행나무를 기다리며 설레했고, 가을이 되면 수업을 왔다갔다 하는 길에 연신 은행나무를 찍어댔다. 여전히 가을이면 그 아이의 sns 프로필 사진은 꼭 노란색 투성이가 된다.


  그 아이의 가을은 다른 누구의 가을보다 더 행복하다. 어떤 것을 구체적으로, 자세하게 좋아할 수록 그것은 나에게만 더 특별하다. 그저 비가 오면 오는대로,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계절이 바뀌면 바뀌는대로 아무 생각이 없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나는 비에 젖은 낙엽을 밟는 일이 특별하고, 도랑에 물 흘러가는 소리가 황홀하고, 어쩌다 맡은 나무 타는 냄새가 낭만적인 그런 사람이 되고싶다는 생각을 한다.


    친구 중에는 노을을 좋아하는 친구가 있다.  친구의 핸드폰 앨범에 들어가면 온통 노을 사진이다. 노량진에서 직강을 듣고 내려오는 길에 버스 안에서 노을을 맞을 때가 있었다. 하루종일 강의를 듣고,  뼘의 여유 공간도 없는 좁은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하고  터라 다들 기운이 없었는데  친구는  밖으로 지는 노을을 정말 행복하게 보고 있었다. 마치 노을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황홀한 표정이었다. 해는 매일 떴다가 진다. 그러니까  친구의 인생의 남은 나날에서 하루에   무조건 황홀할 것이다.


  나는 덜 익은 바나나를 좋아한다. 꼭지 부분에 약간 초록빛이 돌고 씹으면 아삭한 식감이 살아있는 그런 바나나를 좋아한다. 그런 바나나라면 한번에 3개씩 먹는다. 하루가 지나 전체가 노란빛을 띠거나 혹은 검은 반점이 생겨버린 바나나는 먹지 않는다. 어쩌다 우유와 꿀을 넣고 갈아서 먹을 뿐이다. 이 때도 너무 많이 갈면 안되고 적당히 갈아서 식감이 살아있는 상태를 좋아한다.

  나는 한 여름에도 핸드크림을 바른다. 더프트 앤 도프트 분홍색 핸드크림을 5년째 쓰고 있다. 어쩌다 다른 것을 쓸 때도 있지만 결국은 다시 그 향을 쓴다. 나를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들이 어디에선가 그 향을 맡았을 때 순간적으로 나를 떠올리길 바란다. 달콤한 그 향과 함께 내 얼굴이 떠올랐으면, 하고 바란다.

  나는 기타에서 나는 나무 냄새를 좋아한다. 기타는 나무로 되어 있기 때문에 4계절 내내 습도 조절을 해야한다. 겨울이 되면 기타 울림통에 있는 동그란원에 딱 맞는 습도조절제를 끼워놓는다. 습도제에는 물에 적신 스펀지가 내장되어있다. 기타를 칠 때면 제일 먼저 습도조절제를 빼고 울림통에 코를 박고 시작한다. 촉촉한 물기가 서려있는 나무 냄새가 어지러울만큼 향기롭다.


  나라는 사람과 함께한지 27년째다. 내가 어떤 순간에 행복한지, 어떤 것을 하면 기분이 나아지는지, 너무 피곤한 날에는 무엇을 하는지, 기분이 나쁠 때에는 어떻게 대처하는지, 사랑하는 친구에게는 어떻게 표현하는지, 나에 대해 알아가면서 최대한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나만의 취향을 만들어 가고 있다. 나는 보다 능숙하게 나 자신을 다루게 되고 나의 세상은 점점 알록달록해진다.


  어저께 오랜만에 친구 집에 놀러를 갔다. 치약이 제법 매웠다. 나는 말 했다.

'너도 매운 치약 좋아해? 나도 매운 치약 좋아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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