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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들 Aug 30. 2024

선배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

선배;

1. 명사 같은 분야에서, 지위나 나이·학예(學藝) 따위가 자기보다 많거나 앞선 사람.

2. 명사 자신의 출신 학교를 먼저 입학한 사람.     


 대학교를 졸업한 이후 나는 ‘마을만들기 정책사업’이라는 ‘사회운동의 어느 주변부’에서 경력을 쌓아왔다. 그러면서 나는 종종 남에게 나를 설명하는데 어려움을 느껴왔다. 같은 분야의 많은 이들은 자신을 활동가라고 칭했지만, 나에게 그 단어는 ‘투신’, ‘희생’ 따위를 내포하고 있는 것 같아 무척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한 때 나는 나의 일이 직업으로 여겨지길 바랐다. 아마 나는 직업이라는 단어에서 최소한의 ‘노동권은 보장되리라는 기대를 가지려 했던 것 같았고, 나는 나를 ‘활동가’보다는 ‘실무자’로 소개하곤 했다.      


 나는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부터 실천(praxis)이라는 개념에 경도되어 있었다. 이론과 행동의 변증법적 순환을 지향했지만, 사실 마음은 후자에 더 쏠려있었다. 젊은 날의 난 아무래도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것보다 현장에서 발로 뛰는 걸 동경했던 것 같다. 이론보다는 행동이 더 어렵고 더 가치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실천하는 ‘지식인’을 추구했지만, 내심 공부하는 ‘현장가’로 여겨지길 바랐다.


사근동 공원 주민수요조사, 현장 역량을 키우는 게 나만의 경쟁력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전문가’라는 단어는 꺼림칙하지만 반은 어쩔 수 없이 주장해 보는 정체성이다. 이 분야의 실무자들은 일하는 도중 근린사회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활동들을 접하게 된다. 그 범위는 적당히 넓고, 그 깊이는 적당히 얕다. 이들은 인프라정비과정은 물론 주택개발과정에 휩쓸리기도 하고, 상권활성화, 시장활성화, 생활문화, 청년창업 분야에 기웃거리기도 한다. 만나는 사람들도 다양하다. 행정과 주민은 당연한 말이고, 학교, 복지관, 시민단체 등과 같은 기관들과 소상공인, 문화기획가, 예술가 등, 동네에 살고 있는 이들을 모두 망라한다. 때때론 정비사업과 관련된 공정회의에 참여하여 건설업자, 시공업자들과도 말을 섞는다.     


 그러다 보니 사실 이 분야에서 나는 ‘스페셜리스트’라기보다는 ‘제너럴리스트’에 가깝다. 각 영역에서 전문가들이 달리면, 나는 러닝메이트로 이들을 서포트한다. 행정회계도 어느 정도, 홍보디자인도 어영부영, 현장조사나 관계자조직도 뭐 적당히 한다. 이러한 역할이 사업에 썩 중요해 보이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한데 모인다고 그 사업이 저절로, 잘 굴러가는 건 아닌 법이다. 행정이라도 끼게 되면 복지부동의 관료제적 리스크도 관리해야 한다. 이때 필요한 게 그들과 대등한 위치에서 사업을 끌고 가겠다는 ‘자임’과 ‘책임’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이때 ‘전문가’라는 호칭이 필요해진다.


(위) 영천시장 상인회 협의, (아래) 한양대 캠퍼스타운 협의, 전문가들이 치고 나가면 나는 서포트한다.


 이러한 정체성들의 충돌은 제도를 바꾸기 위해 제도 밖에 자리 잡는 사회운동의 특징 때문에 생긴다. 사회구조 속에서 안정적으로 재생산되는 제도와는 달리, 사회운동은 어떻게 보면 사라짐을 전제로 한 조직들에 의해 재생산된다. 그러다 보니 사회운동은 최고조에 올라 있다가도 불현듯 사라지고, 전혀 낌새가 없다가도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생겨난다. 필연적으로 이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사회운동의 양태가 변화함에 따라 이합집산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일을 하다 종종 이런 의아함을 가지곤 했다.     


 ‘딱히 같이 일한 적도 없고, 내가 스스로 후배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저 사람은 왜 자신을 나의 선배라고 생각할까.’     


 고흥에 내려온 지 어연 일 년이 지났다. 예상보다 빠르게 나의 마음상태는 불안해졌다. 소멸위기지역에서 일하는 건 여러모로 마음이 왔다 갔다 하는 일이었다. 어느 때는 명확한 위기 앞에서 필요한 역할을 해야 된다는 의욕이 앞서다가, 또 어느 때는 다소 기력 없이 살아가는 어르신들과 여러 환경적 한계에 봉착해 있는 조직을 보며 울적해진다. 서울에 있는 연인과 친구들을 만날 수도 없어 외롭기도 하다.     


 돌이켜보건대 나는 오랫동안 고독을 고민했다. 시작은 학부시절이다.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신학교에 왔는데 학문적인 측면에서도, 직업적인 측면에서도 현실은 예상과 많이 달랐다. 신 앞에 홀로 해결해야 할 문제였고, 끙끙 거리며 고민했었고, 졸업 후 후회 없이 진로를 바꿨다. 이때까진 성공적이었다. 나는 젊었다. 하지만 삼십 대에 봉착한 고독은 심대했다. 업으로 삼은 마을만들기 정책사업이 여러 사건들로 인해 정말 총체적으로 무너져 내렸기 때문이었다. 말 그대로 ‘아노미(anomie)’였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사회를 변화시키고 싶다는 나의 생각은 한낱 이상이었고, 그렇다면 지금까지 해온 바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건지 등등, 나를 쌓고 있었던 거의 모든 것이 바닥을 잃었다.      


 같은 분야에 있던 누구는 유사업종으로 직종을 바꾸고, 누구는 과감하게 정치판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은 종적을 감췄다. 그들은 생존 앞에서 이상을 현실과 타협해야 했고, 나라고 크게 달랐겠는가. 한 번, 두 번, 이상과 현실을 타협해 나갈 때마다 나는 지금까지의 인생이 그리 큰 의미가 없었음을 매번 곱씹어야 했다. ‘꿈을 좇는다는 건 제일 양보할 수 없는 소중한 걸로 매분 매초, 누군가에게 계속 지는 것’이라는 어떤 소년만화 주인공의 말처럼, 나는 열패감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그러다, 그렇게, 적적한 고흥까지 내려오게 된 것이다. 고흥, 충분히 아래 지역임에 반박은 없을 것이나, 이곳은 과연 나의 바닥일까? 아닐 테다. 경험 상 바닥은 원래 끝이 없는 법이다. 그저 충분히 단단해질 때까지 가라앉다 다시 딛고 올라가야만 하는 그러한 성질의 것일 뿐이다. 사실 로컬살이에 대한 이 글 뭉텅이는 다시 올라가고자 하는 작은 실천이자,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던 도시의 근린사회와 공동체를 다시 부여잡고자 하는 고군분투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오취마을의 바다색은 갯벌 색과 섞여있다. 이곳이 나의 바닥이 되었으면 한다.

 

 요즘 고흥에서 과거 마을만들기 정책사업에 몸담았던 사람들을 다시 만나게 된다. 그들 중 꽤 많은 사람들은 정책의 책임자로, 조직의 결정권자로, 당시 실무자였던 나는 이름 정도만 들어보고, 어쩌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한두 번, 그것도 먼발치에서만 볼 수 있었던 이들이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여러모로 다르다. 그들의 상황, 위치, 그리고 나와의 관계까지도. 나이도 나보다 훨씬 많은 그들이 이 머나먼 고흥까지 내려온 이유는 무엇일까. 생계, 가족, 조직 따위가 떠오르다 이내 그들이 한평생 담아 온 이상은 지금 어떤 처지에 놓여 있고, 어떤 돌파구를 모색하고 있을까라는 질문에 생각이 닿는다.      


 그렇게 선배에 대한 생각이 차근차근 바뀌어 간다. 이전의 나에게 선배는 사업의 길을 제시하고, 조직을 키워내 제도의 안정성을 확보해 나가는 유경험자의 후광 어린 앞모습이었다면, 지금의 선배는 어려운 환경에도 살아나가기 위해, 마음을 죽이고, 고난을 참아내며, 묵묵히 앞서 걸어가는 나이 든 자들의 무거운 뒷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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