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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들 Sep 03. 2024

5호선 지하철은 광화문역에서 멈추지 않았다.

 5호선 지하철은 광화문역에서 멈추지 않았다. 광화문광장으로 가려던 이들은 종로3가역에서 고민에 빠졌다. 시청, 종각에서 광화문광장으로 이어진 길목은 몰려든 인파에 막혔고, 교통버스는 애진작 운행을 멈췄다. 그렇다고 서대문역에서 경희궁 앞 오르막길로 걸어가기엔 다소 먼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결국 그들은 종로3가역에서 3호선으로 갈아타 경복궁역으로 향했다. 경복궁역에서 광화문광장으로, 청와대를 등지고 내려오는 길을 택한 것이다. ‘역방향’이었다. 일반적이지 않았다.     


 그날 광화문광장 일대는 번잡했다. 광장에는 이순신장군동상을 둘러보고 텐트들이 설치되어 있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돗자리를 깔고 앉았다. 서울시가지를 가로지르는 수많은 행렬들이 찌라시를 던져대며 광화문광장에 접근하고 있었고, 경찰들은 그들을 도로 곳곳에서 막아섰다. 차량통행은 통제됐고, 사람들은 그 넓은 도로를 점유했다. 구호소리, 고함소리, 호루라기소리, 확성기소리가 짜르르 울려댔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수많은 전보들이 종로 1번가 상공에서 전화기로, SNS로, 무전기로 오고 갔다.           


그날 광화문광장은 노란 리본으로 채워져 있었다. 당시 나는 보라색 깃발 아래 소속됐다.


 나는 경복궁역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이 3호선을 타자마자, 경찰은 어디서 들은 건지 역사 입구를 신속히 틀어막았다. 대열은 역 안에서 고립됐고, 한 차례 해산 후 광장에서 다시 모이기로 했다. 보통 이런 경우 대열은 뿔뿔이 흩어져 동력을 잃게 되지만, 역방향을 택한 그들은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이들이었다.     


 나와 일행은 통행이 통제되기 전 역을 빠져나와 광화문광장으로 향했다. 하지만 곳곳에 배치된 경찰들의 유도를 따르다 보니, 어떻게 된 게 정동길로 우회해 인파가 몰려 있는 시청 앞 광장에 다다르게 됐다. 하늘은 어둑어둑해졌고, 분무된 물방울들을 비추며 핀조명이 흩어져 어지러웠다. 노끈에 묶인 경찰버스 두 대가 대열에서 이탈했고, 버스 위에 올라간 경찰의 채증 카메라는 핀조명을 빠르게 쫒고 있었다.     


 광화문광장의 출입을 두고 대낮부터 시작된 시민과 국가의 줄다리기가 슬슬 결착으로 치닫고 있었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경찰이 끝내려 했다. 군중을 가로막은 버스장벽 양옆에서 방패벽이 캅사이신총을 쏘며 치고 나왔다. 나는 부지불식간에 갑자기 밀고 들어오는 경찰벽을 몸으로 막아서고자 했다. 팔로 방패를 밀면서 한 발을 뒤로 빼고 상체를 앞으로 숙여 무게중심을 낮췄다. 자연스레 고개도 바닥을 향해 숙였다.      


 어라? 생각보다 안 밀린다? 경찰들도 체력이 빠진 건가?라는 생각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퍽’, 얼굴로 주먹이 날아왔다. ‘억’, 어리바리한 의경이 방패조로 있어서 그랬던 거군! 안 보일 거 알고 치다니, 노련한 봉조 선임 같으니라고. 글러브 장갑을 낀 주먹이라 아프진 않았으나 입 안에서 쇠 맛이 돌았다. 젠틀하게 집회에 참여한다는 기조를 지닌 나였으나, 한 대 맞으니 이성을 잃고 육두문자를 쏟아냈다. 사태가 과열되는 걸 감지한 일행들은 집회에서 빠져나가기로 결정했고, 매너(?)를 잃은 나는 함께 있던 누나의 손에 이끌려 어린애 꼴로 인도됐다.      


오전부터 시작한 집회는 밤이 깊어졌지만 끝날 기미가 없었다. 집회는 점차 격렬해졌다.


 딱 내가 사회에 진출했을 때 스펙(spec)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제원’, ‘사양’을 뜻하는 스펙시피케이션(specification)이라는 흔히 기계에나 통용되는 단어가 청년구직자들에게 적용되고 있었다. 취직을 하기 위해선 학점, 자격증, 대외활동과 같은 여러 사양들을 ‘덧셈의 방식’으로 갖추어 가야 했다. 자기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쌓아가는 건 너무나 당연한 세상에, 남을 위해 포기하는 역량은 쌓아가는 성질의 것이 전혀 아니었다.


 분명 남을 위해 살아가는 누군가들이 있었기에 세상은 더 좋아졌고, 사회는 방향을 잃지 않고 나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어린 나는 남을 위해 희생하다가 내가 망가지지 않을까 두려웠다. 그 두려움 때문에 너무 무리하지 말고, 감내할 수 있을 만큼 포기하는 역량을 조금씩 쌓아가자 생각했다. 대신 쌓아온 걸 최대한 흘려보내진 말자. 남을 위해 포기하는 역량도 ‘덧셈의 방식’으로 갖춰보려 한 것이다. 비를 맞아야 한다면 굳이 장대비를 맞을 필욘 없지 않을까. 보슬비도 시나브로 젖어 가면 마찬가지 아닐까.      


 과거 대학운동권 사이에 ‘하방운동’이란 단어가 있었다고 한다. 대학생이 ‘인텔리겐치아’라는 지식계급의 특권을 버리고, 농민계급, 노동계급에 합류해 그들의 입장에서 사회를 바꿔나가겠다는 운동 전략이다. 용어부터가 ‘어마무시’한 시대였다. 어린 나는 그건 옛날에야 통하던 문제의식이지, 오늘날 사회와는 여러모로 맞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현실의 풍파를 겪을 나이가 된 나는 다소 공격적이고, 전혀 나이브하지 않게 되었다. 결국 모든 걸 감내하게 하는 신념과 최대한 부끄럽지 않을 타협만을 길잡이 밧줄 삼아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갈 뿐이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비단 서방세계가 아닌 지구세계를 파괴함이 명백해졌고, 계급이라는 개념은 여러모로 형해화(形骸化) 됐다. 기후위기, 지역소멸위기는 ‘오래된 미래’였고, 이젠 거스를 수 없이 심화되고 있다. 서울의 광장 언저리에서 운동했던 나는 지금 고흥에 내려와 있다. 계급이 없는 오늘날의 하방운동은 어떤 모습일까, ‘외산’이라는 마을로 외길 따라 덜컥 덜컥 올라가는 읍내버스 안에서 창가 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다.


외산으로 올라가는 길목에서 생각에 잠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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