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을 메워 땅으로 만든다. 인류가 자연을 지배한다는 사실을 이보다 극적이고도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행위가 있을까. 물을 메울 때, 생태계는 본질적으로 중요하지 않다. 관철되는 것은 오직 인간의 의지뿐이다. 놀이터 모래사장에서 물길을 만들며 놀던 어린아이도 그만 놀고 집에 가자는 어머니의 부름만 떨어지면 물을 단숨에 메워버리지 않던가. 파괴적인 변화를 거뜬히 감내하는 것, 그것이 매립의 ‘고유성’이다.
이런 의지의 표출은 역사에서 ‘간척’, ‘매립’, ‘복개’ 등 여러 명칭으로 불려 왔다. 본격적으로 일어난 것은 1960년대 이후, 대한민국이 근대화되던 시점이다. 비행장이었던 여의도는 수차례 간척을 거쳐 오늘날의 모습을 갖췄고, 최초의 대단지아파트인 잠실아파트는 한강을 매립하여 세워졌다. 잘 아시다시피 청계천은 콘크리트 도로로 덮여 있었다. 이런 대표적인 사례를 제외하더라도, 수많은 도로, 수많은 건물들이 실개천을 덮은, 그 위에 세워졌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소개됐던 ‘서소문아파트’처럼.
미근동 서소문아파트, 토지가 국가소유의 하천이라 민간재개발을 할 수 없다(출처 : 한국경제)
바다 간척은 좀 더 유서 깊다. 규모가 규모였던 만큼 국토가 확장되는 과정으로 여겨졌다. 그렇다고 간척이 처음 시도된 초창기 상황을 좋은 형편이라 볼 순 없겠다. 여몽전쟁 기간 동안 고려의 수도는 ‘강화도’였는데, 이 섬을 요새화하면서 간척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도 강화도를 중심으로 간척이 간헐적으로 일어나다, 일제강점기엔 전라북도를 중심으로 벌어졌다. 당연히 조선을 위한 건 아니었고, 일본인들의 농업 이민을 위함이었다.
다른 간척사업과 마찬가지로 바다 간척사업 또한 1960년대를 기점으로 줄줄이 이어진다. 서해안만 봐도, 1963년 착공한 동진강간척사업부터, 1991년에 시작해 여전히 진행하고 있는 새만금간척사업까지 총 열여덟 개의 사업이 내리 벌어졌다. 시공업체는 동아건설, 극동건설, 롯데건설, 현대건설, 대산건설, 대우건설 등으로, 당시 대한민국 내로라하는 토건기업은 모두 한자리씩 차지하고 있다. ‘민관합동재개발’이라는 대목이 자연스레 떠오르는 지점이다.
고흥의 해창만도 이즈음 메워졌다. 오늘날 해창만 간척지는 여러모로 편의를 제공한다. 자가용이 있는 동료들은 해창만 간척지를 가로지르는 우회도로로 출퇴근한다. 간척이 되기 전, 해안선을 따라 형성된 마을을 순회하는 버스노선보다 20분 이상 짧은 길이다. 출퇴근시간 40분 감축. 이것만으로도 엄청난 메리트라 할 수 있겠지만, 출퇴근길에 펼쳐지는 풍경 앞에선 소소할 따름이다. 탁 트인 논 사이로 쭉 뻗은 길은 고흥 중심을 가로지르는 길이기도 하다. 팔영산, 운암산, 천등산, 마복산과 같은 고흥의 명산들에 둘러싸여 읍에서 바다까지 내리달리게 되는 것이다.
계절도 해창만 간척지를 풍성하게 만든다. 여름 내내 작열하는 태양 아래에서 모가 연둣빛으로 빛나다, 가을엔 황금빛 물결이 굽이치는 한 폭의 거대한 옷감이 된다. 패치를 내며 자투리 조각나듯이 벼가 베어지고 나면 볏짚곤포들이 우두커니 노을을 배경으로 긴 그림자를 드리운다. 겨우내, 그림자는 길어지고 다양한 철새들이 오가다보면 어느 샌가 새뜻한 바람이 불어온다. 봄이 오고, 다시금 한 마지기, 두 마지기씩 논에 물이 차올라 거울처럼 빛나다가 파란 하늘 아래 모가 심긴다.
해창만 간척지, 여름에서 가을로 가는 어디 즈음이다(출처 : 고흥군청).
천해(淺海)에 위치한 섬마을 사람들은 항상 육지를 바라봤다.
전근대의 섬은 척박했다. 어업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수산물 채취량은 적었고, 벼농사를 지을만한 논이 부족해 밭에서 기른 보리를 쑤어 칠게를 반찬삼아 근근이 살아가는 곳이었다. 사내들은 부산이니, 통영이니, 여수니 뱃일하러 나가면 일이주 동안 집을 비웠다. 자연스레 집안일은 여성의 몫. 게다가 자녀수가 곧 노동력인 시절이라 입도 많았다. 자녀들 한두 명씩 친가로, 외가로, 머슴살이, 더부살이 보냈다.
일을 가릴 형편은 아니었다. 갯벌에서 어패류를 캐거나, 생선이라도 건지면 장날 팔아야 했다. 그러다 섬의 형편이 조금은 좋아져, 마을 남성들이 작당하여 이런 저런 수산업을 확대해나가면 여성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내조했다. 여기서 내조라 함은 봄부터 겨울까지 이루어지는 일련의 수산업, 새벽부터 저녁까지 이루어지는 박신 작업을 포함한다. 말할 것도 없이 중노동이다. 그럼에도 섬에 있는 조막만한 땅 하나 놀릴 수 없다.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면.
오취마을 굴막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굴 박신작업
그러다보니 섬마을사람들은 간척한다. 농경지를 확보하기 위해 메울 수 있는 습지가 있으면 능히 메우고, 연륙하기 위해 제방을 쌓을 수 있는 여울이라도 있으면 기어코 쌓는다. 연륙된 후 대중교통이라도 들어오게 되면, 도로를 확장해야 한다. 살고 있는 집을 허물 순 없으니 이때도 역시 해수면을 메운다. 간척 개발을 위해 국가가 보조도 해줬다. 노역의 대가로 주민들은 돈 대신 귀하디귀한 미국원조 쌀을 받아갔다. 그렇게 근면·자조·협동의 새마을정신으로 거대한 해창만이 메워졌다.
해창만을 메웠지만, 노인들의 시선은 여전히 드넓은 논 너머 육지로 향해있다. 한평생 기대를 담았던 엄지손가락도, 아직까지도 아픈 새끼손가락도 그렇게 키워 모두 섬에서 내보냈다. 이젠 자녀들도 나이가 만만찮게 많아 섬에 잘 찾아오지 못한다. 마음 한 켠, 복잡한 심정과 함께 이내 섭섭함도 들지만, 이제 그러한 회한도 차곡차곡 갈무리되어 간다.
국제적으로도 보호받는 ‘람사르 습지’를 메워 귀중한 자연생태계를 파괴해왔다, 농업의 채산성은 낮아진 반면 어업의 채산성이 높아진 상황에서 근시안적 정책 실패다 등 따위의 매우 일리 있는 비판들이 간척에 따라붙어왔다. 하지만 분명 이는 일면이다. 해창만의 논은 남도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의 가난 속 염원을 비유한다. 비록 나이가 들어 다른 이의 손을 빌려야만 논을 경작할 수 있지만, 여전히 그들은 자녀들에게 나눠주기 위해서라도 ‘습속’처럼 농사를 짓는다. 모판을 심기 위해 물이 대어져 팔영산을 비추는 해창만은 이들의 ‘명경지수(明鏡止水)’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