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부터 나의 커리어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앞에서 살짝 부정적인 어투로 누누이 얘기했던 고흥에 오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이 이야기의 구체적인 배경은 아마도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기 전후 특정시점으로 잡으면 되겠다. 나는 7년 정도 꾸준히 근린사회를 활성화시키기 위한 국책사업에만 참여해 왔고, 이 시기, 커리어 환경이 점차 굳건해지고 있다고 느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얘기하기 전에 살짝 과거로 돌아가 보자. 내가 막 중학생이 됐을 시점이다. 참여민주주의를 지향하겠다는 ‘참여정부’가 출범하고, 한국의 시민사회는 ‘시민 없는 시민운동’, ‘명망가 위주의 운동’이라는 비판에 나름대로 자성의 행보를 시작했다. 당시 시민운동의 지도자들은 ‘시민을 어떻게 참여시킬 것인가’에 대한 과제에 ‘시민운동의 인프라’를 구축하자는 전략을 내세웠다.
정부와 시민사회가 협력하자는 ‘거버넌스’의 기치 아래, ‘센터’, ‘재단’, ‘기금’, ‘조례’ 등과 같은 인프라가 폭넓게 논의됐고, 정권에 따라 어느 정도 부침은 있었지만, 개별 지역에서, 개별 운동영역에서 각개약진 하는 방식으로 차츰차츰 구축되어 갔다. 신자유주의가 제도화되는 과정과 시민운동의 인프라가 깔리는 과정이 ‘세계화’라는 자장 안에서 깔끔하게 중층으로 결정됐다. 그 인프라 위에서 국가는 자신이 사는 근린사회를 스스로 가꾸고, 지역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주체로 ‘주민’을 호명했다.
80년대 히트를 친 새마을 운동의 풀네임이 ‘새마을 가꾸기 운동’이었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딱히 새로운 접근은 아니었다. 다만, 독재정권에선 주민을 국민으로 동원했지만, 민주공화국은 주민을 시민으로 지원하고자 했고, 자연스레 ‘주민주도’는 ‘지방분권’, ‘지역균형발전’, ‘풀뿌리민주주의’ 등등과 엮였다. ‘마치즈쿠리(まちづくり)’라는 일본식 명칭을 ‘마을만들기’로 번역·차용한 90년대 시민운동의 일파가 이 시기, ‘지역’, ‘도시’, ‘마을(공동체)’, ‘농촌’과 ‘가꾸기’, ‘만들기’, ‘활성화’라는 단어를 결합한, 다양한 명칭의 공공사업으로 추진됐다. 통틀어 ‘마을만들기 정책사업’이라 부를 수 있겠다.
(좌)2000년대, 낙천낙선운동으로 선거결과에 큰 영향을 미칠 정도로 시민운동은 강력해졌고, (우)그만큼 자성의 목소리도 커져갔다(출처 : 연합뉴스, 동아일보).
참여정부가 비극적으로 끝날 때, 나는 성인이 됐다. 그리고 이어진, 십 년이 채 못 되었으나, 체감 상 매우 길었던 보수 집권 기간 동안 나는 학업을 마치고 사회에 진출했으며, 마을만들기 정책사업의 실무자가 되었다. 그 와중에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이 선고되었고, 다음 대선에서 문재인 전 대통령의 승리가 명확히 점쳐졌다. 이제 충분하다. 다시 나의 시간으로 돌아올 시점이다.
‘사람이 먼저다.’
지금이야 전 대통령 특유의 웃음소리가 앞에 붙으며 다소 희화화됐지만, 그 슬로건을 처음 들었을 때, 솔직히 나는 꽤 좋았다. 국가가 나아가는 데 있어, 국가, 시장이 국민에게 자리를 내줬음을 천명하는 것 같았다. 정권이 바뀌는 과정 중 공공성은 국민들의 생활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설파하셨던 지도교수님이 장관직에서 낙마하시긴 했지만, 나에겐 실망보다 더 큰 기대가 있었다. 참여정부 때 호명한 주민이 이를 계승한 정부에서 드디어 날개를 달았구나 싶었던 것이다.
당시 나에게 문재인 전 대통령은 ‘소명(Calling)’을 가진 정치인이었다. 판문점에서 군사분계선을 아무렇지도 않게 넘나드는 모습은 역사적인 콜링(calling)의 순간이었고, 강력한 지지율을 바탕으로 국민의 동선마저 통제하며 코로나 사태를 넘겨내는 모습은 강한 신념윤리와 책임윤리 사이 어딘가에 입각해 있었다. 오늘날, 머신(machine)을 가진 지도자가 바로 이런 모습이 아닐까 생각됐다.
하지만 그런 강력한 정부도 타협을 거듭했지만 끝내 넘지 못한 언덕이 있었다. 바로 부동산시장이다. 통화의 ‘양적완화’로 인한 버블을 경계한 정부는 부동산투기를 통제하려 했고, 주택공급을 국가의 영향력 아래 종속시키고자 했다. 과세를 때리고, 재개발·재건축 절차에 허들을 세웠다. 중앙정부에서 그러니 일선에서 감독하는 지자체들은 당연히 신중해졌다. 돈은 넘쳤으나 흐를 통로가 좁아졌고, 주택을 갖고자 염원하는 모든 이들의 불만은 쌓여갔다. 물론 오해는 마시라. 임기 말로 향하는 이 정부의 행보도 신념윤리와 책임윤리 사이 어딘가에서 결국 규제를 완화하는 쪽으로 나아갔으니.
그럼에도 투기열풍은 걷잡을 수 없었다. ‘리스크’라는 파도에 사람들은 넘실넘실 서핑을 탔다. 주택가격은 로켓이 발사되듯이 끝없이 치솟았고, 주택이든, 주식이든, 코인이든 무언가에 투기하지 않으면 야수의 심장을 가지지 못한 소위 ‘하남자’가 됐다. 당국은 규제 완화, 주택공급 보조 등 다방면의 대책을 줄줄이 내놓았지만, 소 잃고 외양간 고친 격, 총알은 이미 발사된 후였다. 전 국민에게 부동산정책은 실패로 여겨졌고, 끝끝내 레임덕의 트리거로 당겨졌다.
정권은 쇠락의 길을 걸었고, 대통령은 정치공학 상 막후로 물러서야 했다. 부자와 서민이 한 배를 타고 한 목소리로 정부를 비난했다. 집값이 높아질 거라 기대하면서, 집값이 너무 높다는 불만을 동시에 쏟아냈다. 그들이 바라는 해결책은 오직 공급, 공급, 공급뿐이었고, 공급을 원활하게 할 수 있을 법한 규제를 모조리 풀어달라고 요구했다. MBTI는 모르지만 MB는 아는, 정치계의 ‘유령’ 같은 사람은 이를 그럴싸하게 ‘과세저항’이라고 평했다.
문재인정부 시기, 마을만들기 정책사업의 꽃은 ‘도시재생’이었다. ‘도시재생’. 문재인정부를 지나면서 많은 국민들이 정비 사업에 대해 웬만한 전문가 수준의 지식을 갖추게 됐을 테니, ‘마을만들기’보다는 덜 생소할 것이라 믿는다. 그러다 보니, 투기할 목돈도 없어, 근근이 저축만 하던 나도 어느샌가 도시재생 실무자라는 이유만으로 투기열풍의 격랑에 휩쓸려 있었다. 주택구매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음에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