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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들 Jun 28. 2024

마리오랜드, 고흥

 로컬살이를 하고서야 비로소 시골을 비교할 수 있는 안목이 생겼다. 서울에서 어쩌다 한 번씩 놀러 가 접했던, 시골의 자연환경은 거기서 거기였다. 어쩌다 한 번에다, 스치듯 안녕이었으니, 웬만한 인상이 아니라면 다 비슷하다. 산은 다 같은 산이요, 물은 다 같은 물이었다. 하지만 시골에서 시골로 눈을 돌리면, 여태껏 왜 몰랐을까 싶을 정도로 꽤나 다르다.     


 구례의 산세와 영광의 뻘이 험준한 ‘아제로스’라면, 고흥의 산세와 뻘은 아기자기한 ‘마리오랜드’다. 해창만 간척지의 황금빛 논길을 달리면 지평선 뒤로 동산들이 고개를 돌린다. 논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바닷가가 펼쳐지는데 어쩐지 수평선 위에 떠있는 섬들도 산과 똑같은 모양새다. 고흥반도의 희소한 풍광은 십중팔구 멀리서 찾아올 방문자들에게 어딘가 동떨어진 곳에 온 듯한 느낌을 선사한다.           


 “고흥은 개발 전 제주도를 보는 것 같아요.”          


 제주도와 고흥반도를 오가며 살아온 주민이 했던 말이다. 고흥 ‘녹동항’에서 배를 타면 제주도로 들어갈 수 있다. ‘남열리’라는 서핑장에서 만난 한 친구는 김포에서 바이크를 몰고 고흥에 왔었다. 며칠간 유유자적 서핑을 즐기다, 바이크와 함께 제주도행 배에 몸을 실었다. 그는 제주도 한 바퀴를 바이크 위에서 바람을 가르며 보냈을 터다.  

 

        

구례의 어딘가, 험준한 산세, 골짜기 사이에 사람들이 모여 산다.
적대봉에서 본 고흥반도, 바닷가를 간척한 평야에 봉오리들이 솟아 있다.


 ‘지역소멸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사업으로 내려왔건만, 이곳의 생명력은 충만하다. 어촌섬마을의 바닷가는 하루하루 다르다. 하루 두 번 바닷물이 차올랐다 빠진다. 차오르는 시간도 한 물, 두 물 하며 매일 삼십 분씩 늦춰진다. 계절마다 제비가 오가고, 꽃게가 바다와 산을 들락날락하며, 물고기들이 얕은 바다와 깊은 바다를 오르내린다. 하루하루 뜨고 지는 해와 달을 따라, 어민들이 발걸음을 맞춰 터벅터벅 걸어가면, 각양각색의 강아지들도, 비슷한 모양새의 고양이들도 근처에서 조랑조랑 살아간다.     


 나와 다른 수많은 생명들에게 반응해야 하자 별세계가 열렸다. 익숙한 동물의 낯선 감정표현들에서, 낯선 동물들의 일상적인 행동들에서 생명들의 일생을 접한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세상을 발견한다. 벌레들이 창궐하는 어느 시점엔 창문 하나 여는데 경각심을 세우고, 밤길을 걷다가 길 위에 자그마한 그림자 같은 게 보일랑 싶으면, 혹시 생물이지 않을까 멈칫하는 습관도 생겼다.     


 이 세계를 다른 이들도 알게 되면 좋겠다는 생각에 다다르자, 바로 이 세계가 관심 밖으로 사라져 가는 세계임을 깨닫는다. 이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이 한 명, 한 명 사라져 간다. 분명 ‘소멸하는 순간’들이다.     


 나는 서울에서 주민을 도와 도시의 근린사회(neighborhood)를 재생하는 일을 해왔다. 그리고 이렇게 말해도 괜찮다면, 나는 서울에서 차츰차츰 밀려 이곳에 내려오게 됐다. 물론 주민과 함께 하는 이 일을 계속 하고 싶어 스스로 선택한 길이지만, 서울에서 이 일을 이어가고 싶었던 나의 의지와 반한 현실도 엄연히 존재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서울에서의 재생은 근린사회를 어떻게 발전시킬까에 고민이 맞닿아 있었다면, 이곳에서의 재생은 마을을 어떻게 사라지지 않게 하냐에 목적을 두고 있는 만큼, 이곳을 ‘험지(險地)’라고도 생각했다.        

오취마을에 정박해 있는 배들. 소멸위기지역이라 하지만, 이곳에 사는 사람과 생명은 역동적이다.


 하지만 나는 이곳에서 이 세계에 관심 가질만한 사람들을 초청하려 한다. 로컬이 도떼기시장이 되지 않도록 마을에 애정을 갖고, 존중을 표하는 사람들이 모여 마을공동체를 키워가길 바란다. 그리고 이왕이면 그 공동체엔 인간뿐만 아니라 생명도 포함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면서 작은 규모라도 좋으니까 도시와 다른, 마을이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는 길을 모색해 보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지역에 관심을 촉구하는 글을 남긴다고, ‘바람과 같은 사람’으로서 국책사업의 실무를 맡는다고, 심지어 귀촌을 해 ‘지역에 뿌리를 내린다’고 해도, 지역소멸의 흐름을 거스르긴 쉽지 않을 거다. 하지만 지금 이 세계에 반응한다는 건, 마리오랜드야, 사라지지 말라고 발버둥이라도 쳐보는 것이다. 말마따나 IP로 만든 가상의 세계관도 목숨처럼 지키는 세상이지 않은가.     


 지역이 소멸한다는 건 서서히 어둑어둑해져 가는 형광등보다는 깜빡깜빡 명멸하며 죽어가는 전구에 가깝다. 지역은 점차 활기를 잃어가겠지만,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도, 생명도 죽기 전까지 최선을 다해 삶을 영위할 것이다. 아니, 필라멘트도 끊어지기 전에 가장 환한 빛을 뿜어내듯이 이곳에 남은 이들은 더욱 정력적으로 살아갈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안에 다시 타오를 불씨가 잠들어 있을지 누가 알 수 있겠는가.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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