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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리 Feb 06. 2024

밝은 회색빛 풍경(11)

11화 겨울은 참 길다.

어제는 낮잠이 간절한 오후를 보내고, 저녁이 되어서는 생각처럼 잠이 오질 않아 정확히 몇 시에 잠이 들었는지도 모르게 잠이 들어버렸다. 오늘 아침은 평소와 같이 일어나 여름이와 인사를 했다. 커피를 마시기 위해 따뜻한 물도 끓였다. 암막 커튼을 살짝 걷어 보니 오늘은 흐린 날이었다. 따뜻한 커피를 마시면서 날씨와는 반전되는 신나는 팝송 모음을 틀었다. 책상 한편에 항상 있는 책 하나를 펼쳤고, 읽었다. 여름이는 또 나른한 표정으로 내 옆에 누웠다. 흐린 하늘과 나른한 여름이의 표정이 무언가 나를 차분하게 만드는 날인 듯하다. (이 와중에 통통 튀는 음악이 방안에 흐르고 있지만..)


오늘은 처음 만나는 6,7세 아이들의 미술수업이 있는 날이다. 간단하게 샤워를 하고, 머리를 정리하고 밖으로 나왔다. 수업을 위해 마련한 사무실에 도착했다. 수업 전에 간단하게 배를 채우기 위해 컵라면에 물을 부었고 흐린 하늘을 구경하며 먹었다. 환기를 시키고, 난로에 불을 올리고 수업을 준비하던 중에 아이들이 도착했다. 4명의 아이들이었다. 2명은 남매였고, 2명은 서로 아는 친구가 없이 수업을 들으러 온 아이들이었다. 아이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오늘 수업을 설명해 주었다. 아이들은 내가 이야기해 준 수업의 내용과 틀에 맞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나는 아이들의 그림을 구경하는 것을 좋아한다. 같은 내용의 주제를 가지고 그림을 그리지만 아이들의 그림은 제각각이다. 아이들의 그림과 대화로 내 앞에 있는 아이를 이해하게 된다. 아이들과 수업하고, 그런 아이들의 그림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최근의 나에게 꽤나 큰 즐거운 일이고 의미 있는 일이 된 것 같다. 나에게 수업을 할 수 있는 재능이 있음이 감사한 요즘이다. 처음 만난 아이들의 조금은 어색했던 분위기는 잠깐이었고, 서로 그림도 구경하고 웃으며 시간이 흘렀다. 아이들의 부모님이 오셨다. 시끌벅적하게 정리하고 우리는 다음 수업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아이들이 흘리고 간 책상의 색종이, 물감들을 정리하며 이다음 시간을 무엇을 하며 보낼지 고민했다. 그러다 우연히 본 벽에 걸린 그림들의 배열이 무언가 맘에 안 들었다. 나는 또 그림의 배열을 정리하기 시작했고, 갑자기 또 어딘가 지저분해 보이는 벽을 페인트칠 시작했다. 나는 정리하는 걸 매우 좋아한다. 잘 정리된 공간을 보면 마음이 좋아진다. 공간을 여기저기 들쑤시며 정리했다. 어느새 밤이 되었다. 난로를 끄고 잘 정리된 공간의 불을 내리고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하니 자고 있는 여름이가 기지개를 켜며 현관으로 오고 있었다. “여름이, 잘 있었어?” 나의 오늘 역시 비슷한 일상으로 마무리되고 있었다. 자취를 꽤 오랫동안 한 나이지만, 겨울의 주택은 더 세심하게 확인해야 할 것이 참 많았다. 저녁 샤워를 하고 나서는 오늘도 화장실의 수도를 살짝 열어 물을 흐르게 했고, 보일러를 확인했다. 가만히 테이블에 앉아 집 안을 둘러보았다. 여기저기에 묻어있는 나의 흔적들이 보였다. 이와 같은 공간이 나에게 있다는 것이 참 감사했다. 별일 없는 오늘 하루가 참 감사했다.

류소리, 그늘진 구름, 종이에 유채, 31.0x23.0cm,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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