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시골이 들은 적 없던 비명으로 가득 찼다. 그 공간에 있었던 적 없고, 앞으로도 있을 리 없는 크기의 소음은 상상 이상의 파괴력을 가진다. 그 다급한 소란이 공간을 메우는 순간, 그전까지 차있던 들뜸, 설렘, 기분 좋은 긴장감 같은 것들이 순식간에 악몽으로 바뀌었다. 나는 그 난리 속에서 어느새 어둑해진 오솔길을 뛰어 올라가며 생각했다. 꿈같던 시간이 벌써 끝나버렸구나. 내 꿈이 결국 나를, 우리 가족을 궁지로 몰아버렸구나.
나는 가난하고 딱한 사정의 시골 소녀가 자연을 소재로 글을 쓰고 도시 아이들 못지않게 훌륭히 성장한다는 서사의 주인공이었다. 전 학년을 합친 전교생이 31명, 사실은 사정이 딱하지 않은 아이를 찾기가 더 힘들었던 시골 학교에서 책 읽고 글쓰기를 좋아하는 학생이었다. 운이 좋게 중학교 3학년 무렵에 좋은 선생님을 만나 이런저런 글짓기 대회에서 역량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러다 어느 전국 글짓기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뒤로 각종 매체의 주목을 받았다. 꿈같은 날들이었다. 아직도 우스갯소리로 그때가 내 인생 리즈시절이었지,라고 할 만큼 관심과 인정을 듬뿍 받았다. 가슴속에 꿈이 싹텄고, 무슨 일이 있어도 글 쓰는 사람이 되겠노라 다짐했다. 내가 쓴 글과 내 꿈으로 폐교 위기에 처해있던 우리 학교에 희망이 생기고, 고된 가난에 웃을 일 없던 우리 가족에게도 행복이 왔다는 사실에 기뻤다.
그 날은 지방 방송국의 다큐멘터리 촬영을 진행하는 중이었다. 사실 다큐멘터리라고는 하지만 대부분의 촬영이 설정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체감하는 중이었다. 대본이야 당연히 없었지만 어느 순간에 어떤 행동을 할지가 정해져 있었다. 그날은 엄마 아빠의 농사일을 도와주는 장면을 찍을 차례였다. 사실 농사일을 도운 적은 거의 없었다. 엄마 아빠는 두 사람이서 고된 농사일을 감당하기 힘들어하면서도 딸들에게 도와달라 하지 않았다. 언니와 나는 버섯을 솎는 엄마 옆에서 책을 읽다가 아빠가 농장에서 돌아오면 밥상 차리는 일을 겨우 거들뿐이었다.
그래서 터무니없이 큰 목장갑을 끼는 동작이 무척이나 어색했다. 엄마 아빠가 늘 다루는 기계 앞에 서는 순간까지도 모든 것이 낯설었다. 기계는 버섯 종균이 가득 든 플라스틱병 한가운데에 지름 2센티 정도의 구멍을 뚫는 기계였다. 가로로 5개, 세로로 5개씩 총 25개의 기다린 쇠봉이 일정한 간격의 정사각형 모양으로 단단히 박혀있었다. 쇠봉 밑으로 똑같이 25개의 종균병이 든 트레이를 밀어 넣으면 쿵, 하고 떨어져 구멍을 뚫는 식이었다. 그 낡은 기계는 진작에 수명을 다한 듯 종종 말썽을 부리곤 했는데, 하필 그날도 작동을 멈췄다.
자주 있는 고장이었다고 했다. 진작에 정식으로 수리를 하든 새로 사든 했어야 하지만 그럴 돈이 없어 늘 언발에 오줌 누는 식으로 버텼다고 했다. 기계란 것이 다 그렇듯 여기저기 툭툭 건드리다 보면 다시 멀쩡하게 작동이 되곤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날은 아빠의 마음이 조급해졌던 모양이다. 다름 아닌 방송국 카메라가 우릴 찍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어슴푸레하게 어두워지기 시작한 늦은 시각, 촬영에 차질이 생길 기미가 보이자 아빠의 손이 어쩔 줄 모르고 기계 주위를 방황했다.
“이, 이기 또 와 이라노.”
누구도 채근하는 사람이 없었지만 엄마와 아빠는 당황했고, 사람들의 눈치를 살폈다. 나는 그저 멀뚱히 기계가 고쳐지길 기다리며 너무 커서 자꾸만 이질감이 드는 목장갑을 고쳐 끼고 있었다. 나와 방송국 사람들, 그 날 촬영을 지켜보고 계시던 선생님은 곧 고쳐지겠거니 하며 잠시 긴장을 풀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철컥하고 기계가 다시 가동되는 듯한 소리가 났다. 그리고,
“옴마야, 옴마야!”
내가 보지 못하게 생략된 장면이 있기라도 한 듯, 짧은 사이에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린 목소리로 엄마가 소리쳤다. 소스라치게 놀라 고개를 돌리자 기계에 팔이 잡아먹힌 아빠의 뒷모습이 보였다. 엄마는 그 옆에서 기계를 들어 올리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내가 볼 수 있었던 것은 그 장면이 다였다. 선생님과 방송국 사람들 모두 내가 가까이 다가서지 못하게 막았고, 나 역시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 굳은 채 서 있을 뿐, 나는 발이 땅에 붙은 듯 아빠에게 달려갈 수 조차 없었다.
“119에 신고해라!”
누군가 소리쳤다.
“니, 니가 좀 눌러봐라.”
엄마는 다급하게 달려와 내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남자들이 전부 기계에 달라붙어 그것을 들어 올리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 중이었다. 손이 떨려서 번호가 안 눌러진다, 엄마는 거의 정신이 나간 것처럼 온몸을 떨었다. 그런데 전화기를 받아 든 나도 마찬가지였다. 119, 세 자리 번호를 누르는 데 열 번은 더 시도를 해야 했다. 지금처럼 화면이 아닌 키패드를 누르는 휴대폰이었다. 와중에 들어본 적 없었던 아빠의 신음이 자꾸만 들려왔다. 너무나도 낯설고 공포스러운 소리였다. 나는 구급대원이 오솔길을 타고 내려와야 하는 우리 동네를 잘 알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마자 내달리기 시작했다. 어느새 밖은 어두워져 있었다. 가로등 하나 없는 시골길이 얼마나 깜깜한지는 겪어본 사람만 안다. 도시의 어둠과는 비할 수 없다. 평소엔 무서워서 쳐다보지도 못했던 한밤중의 오솔길을 뛰어올라갔다. 큰 도로가 나오고, 소방차가 오기를 기다리며 엉엉 울었다. 소방차보다 먼저 도착한 마을버스에서 옆 집 삼촌이 내릴 때까지.
“주연아, 와 울고 있노?”
“아빠가, 아빠 가요...”
웃는 얼굴로 묻던 삼촌은 “아빠가” 까지만 듣고는 오솔길을 뛰어내려 갔다. 나는 얼떨결에 그 뒷모습을 쫓아가 꼼짝도 않는 기계에 삼촌을 포함한 남자들이 달라붙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봤다. 공포스러운 만큼 비현실적인 장면들이었다. 아빠는 쇠봉에 팔이 박힌 채로 앉지도, 서지도 못하고 절박하게 기대 있었다.
“아프다, 아프다!”
아빠의 입에서 아프다는 말이 나온 건 그 전에도, 그 후로도 없는 일이었다.
소방차가 도착하고, 기계는 끝내 들어 올려지지 않아 쇠봉을 모조리 절단하는 작업이 다급하게 이어졌다. 아빠는 손목에 쇠봉이 관통된 채 구급차에 실려갔다. 엄마는 구급차에 함께 올라 그것이 움직이지 않도록 꼭 잡고 있었다고 했다. 나는 선생님의 차를 타고 구급차를 따라갔다. 첫 번째로 갔던 지역 병원에서는 큰 병원으로 가라 했고, 마산에 있는 큰 병원에 가서도 한참을 기다려 수술을 해야 했다. 그때까지 아빠의 손목엔 쇠봉이 박혀있었다. 방송국 PD 아저씨는 병원에서 내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나는 그 모든 장면과 사람들을 바라보며 계속, 계속 울기만 했다. 너무 무서웠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 없었다. 한없이 평화롭고 오히려 기쁜 들뜸이 가득했던 그 장면이 갑자기 이렇게 전환될 수도 있는 걸까. 그 까닭을 하염없이 고민하다 방송국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지 않았더라면 신중한 성격인 아빠가 기계에 손을 집어넣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는 데 생각이 닿았다. 낡은 기계가 또다시 고장 나서 딸과 방송국 사람들과 선생님을 기다리게 하는 일이 아빠를 조급하게 만들지 않았더라면, 다큐멘터리를 찍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느껴졌다. 나 때문이구나. 나는 결론지었고, 그래서 견딜 수 없이 무서웠다.
다음 날, 오랜 시간 이어진 아빠의 수술이 무사히 끝났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학교에 등교해서 잔뜩 웅크리고 있던 내게 선생님께서 전해주신 소식이었다. 다행히 중요한 신경은 비껴갔다고, 그래서 열심히 재활하면 전처럼 팔을 쓸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지름이 2센티가 되는 쇠봉이 관통을 했는데, 이 정도인 건 천운이라는 말을 덧붙이셨다. 나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무서움은 가시질 않았다. 너무나도 무서운 일이 일어났다. 나 때문에. 아빠의 고통과 병원비와 완전히 절단된 기계와 더 잔혹해질 가난이 어깨를 짓눌렀다. 어떻게 하면 좋지. 그냥 가만히 있을걸. 글짓기 대회에 나가지 말걸. 방송 안 찍는 다고 할걸. 아니 처음부터 글을 쓴다고 설치질 말걸. 어깨를 둥글게 말고 그런 후회들을 했던 것 같다. 아빠의 외침이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아프다, 아프다!
방송은 그래도 완성되었다. 큰일이 벌어졌으니 조금이라도 도움을 받기 위해선 더더욱 다큐멘터리를 방영해야 한다는 어른들의 결정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물론 아빠가 다친 내용은 방송에서 삭제되었다. 다만 방송이 끝나는 말미에 “주연이 아버지의 쾌유를 빕니다” 하는 문구가 추가되었다. 아빠는 병실에서 방송을 시청했다. 병원 사람들에게 우리 딸이 나온다는 자랑을 하고 다 같이 봤다고 했다. 괜찮다고, 네 때문에 이런 사고가 생긴 게 아니라고 안쓰러운 눈을 한 어른들이 반복해서 말해주었다. 하지만 나는 방송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고 엄마 대신 집에 온 이모가 갈비찜을 해주는데도 혓바늘이 돋아 먹지 못했다. 한동안 글을 쓰지 않겠다고 버티고, 울고, 괴로워했다. 꿈으로 부풀었던 어린 가슴에 아빠 손목에 난 상처만큼, 치명적인 생채기가 났다.
그러나 나는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그 후로도 띄엄띄엄, 그러나 끊이지는 않고 글을 썼다. 생채기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속수무책으로 부풀어대는 꿈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일은 나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그때의 소란은 우리 가족에게 행복을 가져다주긴커녕 결과적으론 더 잔혹한 가난을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쓴다. 쓰면서 삶의 많은 부분을 살아냈고 쓰면서 많은 것들을 극복했다. 쓰지 않으려 했던 적이 있지만,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아직도 글 쓰며 살아가는 것이 꿈이라 말하고 요즘은 특히나 그때처럼 꿈에 부풀어있다.
그런 순간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냥 가만히 있을걸, 괜히 들떠서 일을 그르치고, 결과는 좋지도 않고, 아무 일 없을 뻔했던 평화를 망가뜨리기만 했던 순간들. 스스로가 허울 좋은 꿈을 좇느라 민폐만 끼치는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느껴지는 순간들. 꿈 타령하는 것이 배부른 소리처럼 생각되는 일상들. 하지만 결국 시작과, 과정과, 결과는 나의 몫이지 꿈에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오히려 살다가 수많은 일에 망쳐지고 좌절되고 민폐를 끼쳐보니 알겠다. 그래도 다른 것 아닌 꿈에 망쳐지는 것이, 가장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