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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형국 Nov 06. 2024

13. 학군지에 대하여

양육 환경

지난 글에 예고한 바와 같이 환경, 학군지에 대하여 나의 경험과 생각을 공유하고자 한다.


우리 집 남매는 첫째와 둘째가 2살 차이가 난다. 첫째는 세심하고 꼼꼼한 성격이라 항상 무엇인가를 틀에 맞춰서 갖춰놓는 걸 좋아한다. 둘째는.. 그걸 부수는 걸 좋아한다.. 주 싸움의 요인은 첫째가 갖춰놓고 둘째가 깨부수는데서 나온다.


첫째 : 아니!! 하지 말라고!!

둘째 : 나는 못 만져? (울먹)

첫째 : 아니!! 부수지 말라고!!


둘째는 힘 조절이 안되는지 일부러 그러는지 또 첫째의 규칙으로 정렬된 자동차들을 흩뜨렸다.


첫째 : 하지 마!! 하지 마!!


평소 나는 아이들의 싸움에 개입하지 않는다. 그러나 첫째가 많이 속상했음을 감안하더라도 동생에게 소리 지르고 겁주는 행위가 도를 넘어섰다고 판단했다.


아빠 : OO이 많이 속상하지? 그건 알겠는데 동생한테 그렇게 소리 지르면 동생이 겁먹어.

첫째 : 어린이집에 다른 형도 동생한테 그랬어!!


나는 어떤 말보다 첫째의 이 말이 가장 속상했다. 다른 친구가 그랬다고 본인도 따라 한다는 말. 내 육아 신념이 모두 무너지는 말이었다.


이날 이후 나는 아이들이 다른 아이들을 모방하는 행위를 경계했다. 다시 말해, 휩쓸리지 않고 자존을 가지도록 아이를 교육하기 시작했다.


"누가 뭘 하던 상관없어. 너희가 옳다고 생각하면 행하고 아니라고 생각하면 하지 말아"


다행히 1년이 지난 지금은 모방하여 행동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물론 나의 한마디 말로만 그렇게 변한 건 아닐 것이고 수많은 영향으로 인해서 자존이 키워진 상태이기 때문에 소신에 따라 행동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오늘 이야기할 학군지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고 있다.



많은 학부모들이 학군지를 선호하는 이유가 뭘까? 각자의 생각이 있겠지만 나의 경우는 '면학 환경'이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된다. 공부하는 친구들 사이에 있으면 공부하는 분위기에 따라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공부를 한다는 것이다. 충분히 일리가 있는 말이다. 학교에서도 열심히 공부하는 아이들만 보이고 학교를 마친 후에도 친구들이 모두 공부를 한다면 그건 공부하기 정말 좋은 환경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공부를 하는 것이 당연한 환경이니까. 다시 말해, 당연히 학군지로 가면 공부하는 것이 용이하고 아이가 더 노력할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학군지가 아니라면 희망이 없는 것일까?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작가는 사람이 도덕적인지 아닌지는 개인의 내적인 선택의 결과이지 수용소라는 환경 때문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초반부, 작가는 수용소에 수감된 사람들이 악하게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악행에 무감각해진 사람들의 모습, 도덕성을 잃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었다가 그것이 한 개인의 선택인 것이지 환경 때문에 모두가 이렇게 변하진 않았다고 하였다. 이들 중 도덕적이고 이타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을 위한 길을 선택했다고 경험을 공유하였다.


나는 학군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환경에 영향을 받기는 하겠지만 그것의 경중은 부모의 믿음과 가치관의 영역이라 생각한다. 주변 환경에 의해서 아이의 학습 태도가 결정된다는 믿음과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자신의 길을 선택할 힘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 두 믿음 사이에는 정답이 없기에 서로 합의가 되기 어려우며 이로 인한 갈등이 학군지 논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 중 진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내가 본 인문 서적을 통해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고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내가 믿고 있을 뿐이다.


현실성이 없어 보인다면 이러한 예를 역사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앤드루 램의 '의학의 대가들'에서는 척박한 연구 환경과 주변의 반대에서도 꿋꿋하게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을 시행하여 수많은 인류를 구원한 사례를 쉽게 찾아볼 수 있으며, 최태성의 '역사의 쓸모'에서 볼 수 있는 장보고는 골품제라는 신분제도 환경을 뚫고 중국의 신적 존재가 되었다.


부모의 양육 소신에도 학군지는 영향을 미친다. 이은경의 '나는 다정한 관찰자가 되기로 했다'에서는 학군지를 피해 다니는 작가의 경험이 나온다. 작가는 학군지를 피해 다니는 이유를 설명하며 모두가 영어 유치원을 다니는 환경에서 우리 아이만 영어 유치원을 가지 않는 환경과, 모두가 일반 유치원을 가는 환경에서 우리 아이만 영어 유치원을 보낼지 고민하는 것은 고민의 경중이 다르다는 느낌의 이야기를 하였다. 나는 이것이 크게 와닿았다.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주변인의 양육방식이 내 양육방식을 결정하는 주된 원인이 된다는 이야기다. 나는 이것을 '휘둘린다'라는 단어로 받아들였다.


내가 학습보다는 아이의 행복을 우선하겠다는 믿음을 가져도 학원 스케줄로 빡빡한 다른 아이들을 보며 위기감을 느낀다. 내가 인문학적 소양과 책읽기를 우선하겠다는 믿음을 가져도 다른 친구들처럼 영어 단어 하나라도 더 외우도록 독서 시간을 줄인다. 아이가 주변 면학분위기에 영향을 받는 만큼 부모들도 영향을 받아 육아의 '본질'을 상실해 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가정환경이 아이의 면학 환경보다 중요한 '환경' 임에도 불구하고 그 '본질'을 잃어버린다.


이러한 면에 있어서 나는 학군지를 지금으로서는 선호하진 않는다.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면서 학습에 두각을 보이고 공부라는 것에, 또 학습이라는 것에 갈망을 느끼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리고 어디에 가서도 스스로의 자존을 지키며 나아갈 것을 분명히 알고 본질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 보인다면 그때는 학군지로 이동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맹목적으로 공부를 인생의 목표로 만들겠다는 마음을 지양하겠다. 아이가 공부에 관심이 있다면 '같은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을 만나고 마음껏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는 환경을 주겠다'라는 생각이다.



학군지는 중요하다. 다만, 공부를 잘하는 아이를 만들기 위해서는 중요하다. 학업적인 면에서 훨씬 유리하고 어찌 보면 효율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학군지를 가겠다고 결심하는 문제는 부모와 아이 본인의 가치관에 따라야 한다. 무작정 학군지! 공부!라고 외치는 것보다는 아이를 잘 관찰하고 대화하며 부모의 교육관과 소신을 확실히 갖춰서 학군지를 '선망' 하는 것이 아니라 '활용' 할 수 있는 현명한 부모가 되었으면 한다.


다음 글에는 공부와 학습에 대하여 나의 경험과 생각을 공유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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