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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교준 Oct 23. 2020

사람답게 대우받기 vs 사람답게 대우하기

“같은 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는 없다. 두 번째 들어갈 때 이미 그 물은 흘러가 버렸기 때문이다.” - 헤라클레이토스, 고대 철학자


시간은 흐른다. 아무것도 하지 않던, 바삐 움직이던, 신체 기능이 정지하던, 열정이 죽음을 맞이하던 시간은 흐른다. 이는 과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기원전 5세기에도 철학적 화두로 사용됐을 정도로 원초적인 사실이다. 


시간은 변화를 데리고 다닌다. 마치 떼려야 뗄 수 없는 운명의 동반자처럼. 생명은 노화에 버둥거리며 끝내 죽는다. 그토록 강하다던 쇠붙이도 생명의 상징인 공기와 만나 시간이 지나면 무뎌진다. 석둑석둑 잘라내던 날은 기껏해야 둔기가 돼버린다. 물질만이 변화의 영향을 받는 건 아니다. 관념 또한 변한다. 특히, 지금 이 순간 누구나 소중히 여기는 ‘사람’에 대한 관념 역시 변해왔다. 

 

지금 시대에서 사람이라는 관념을 소개할 때, ‘시민’이라는 표현을 사용해도 큰 무리가 없다. 시민은 평등한 모든 사람들의 집합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구 상에 사는 우리들은 모두 평등하다. 그러나 누구나 당연하게 여길만한 ‘시민’의 의미는 변화의 결과다. 수천 년 전의 우리 조상들에게 ‘사람이 시민이지 뭐가 달라요?’란 질문을 던지면 더 공부하라며 호통 칠지도 모른다.


사람과 시민 그리고 시민의 역사


고대 그리스 시절, 시민이라고 하면 ‘성인 남성’들만을 뜻했다. 여성이나 아이 그리고 노인과 같이 소위 ‘약자’로 분리되는 순간 시민이 될 수 없었다. 이때 시민들은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즉, 성인 남성이 아니라면 아무리 불이익을 당해도, 불합리한 세상임을 느껴도 사회를 바꿀 수 없었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꽃이라던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에서 논하던 ‘시민’의 관념이다. 


중세로 넘어오면 그나마 좀 낫다. 기독교가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끼치기 시작하면서 ‘천부인권’이란 메시지를 전파했기 때문이다. ‘하늘이 부여한 인간의 권리’라는 메시지는 사람을 평등하게 바라보는 초점을 제공했다. 덕분인지, 일부 지역에선 상인이나 수공업자들을 중심으로 시민이란 개념이 확대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 부족했다. 여전히 여성이나 아이, 노인은 목소리를 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18세기 말 무렵, 근현대의 시발점인 ‘프랑스 대혁명’이 촉발됐다. 이를 통해 왕조는 무너졌고, ‘사람으로서의 권리’가 선언되었다. 이는 시민 개념의 성장 가속화를 재촉했다. 이 기세를 몰아 현대에 오면 ‘시민 = 모든 인간’이 된다. 비로소 여성이든 노인이든, 더불어 학생에게도(만 18세 이상)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 결론적으로, ‘시민’이라는 관념은 시간이 지나면서 계속해서 변해왔고, 지금 이 순간에도 변하고 있다.


여기서 잠깐! 짚고 넘어가야 할 것 


‘사람답게 대우받는 것은 확보했는데,
정작 우리는 서로를 사람답게 대우하고 있는가?’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사람답게 대우받기 위해 상상할 수 없는 노력을 토해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시민의 권리를 얻은 지금, 반대로 상대를 대우해주고 있는가를 생각해봐야 한다. 생각하지 않으면, ‘여성들의 인권운동’은 왜 발생했고, ‘갑질 논란’은 왜 불거졌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


정지우 작가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 난 분노사회임을 비판한다. 그 이유들 중 일부를 가져와봤다.

 

 갑질 사회 


상명하복의 원리가 장착되어야 하는 수직적인 문화는 ‘갑질 사회’를 만들어 냈다. 아무리 봐도 불합리한 것 같아서 따르지 않으면, 명령 불복종으로 불이익을 받는다. 따라서 ‘알아서 기어라!’라는 식의 갑질을 권리인 양 해댄다. 

 

 증오 사회 


개인보다 집단을 중요시하는 집단이기주의는 온갖 증오를 만들어냈다. 서로 으쌰 으쌰 하던 건 어디 가고, 각자 속한 집단의 이익만을 좇아 서로를 피하거나 헐뜯는다. 정치적 성향이 다르면 대화를 멈추거나 흥분하는 것처럼. 

 

 정답 사회 


자신의 기준을 강요하는 건 어떤가? ‘세상에 정답은 하나야!’라는 메시지는 생각보다 강력해서 개인의 취향을 존중하려는 태도를 내면 깊숙이 숨겨버렸다. 따라서 사람들은 ‘성공의 기준’을 정해진 것으로 간주하고 이에 자식들이나 주변 사람들이 부응하지 못하면 비교하고 기준을 강요한다. “공부해라!” “더 열심히 살아라!” “라테는~@#$%”

 

 혐오 사회 


이제는 증오를 넘어섰다. 서로를 혐오한다. ‘김치녀’ ‘한남’ ‘틀딱충’ 등.. 서로를 비하하는 말들은 성행하고, 웃음을 자아내 버린다. 심지어 이런 공격적인 단어들은 서로 간 대화하려는 의지조차 꺾어버린다. 시작부터 강한 고정관념을 씌워버리기 때문이다. (이런 단어들이 웃음을 만든다는 것 자체가 건강하지 못한 사회를 보여준다.)

 

이제는 대우받기 전에 먼저 대우해야 할 때

 

우리는 살면서 사랑하는 방법보다 증오하는 방법을 더 자주 배운다. 일을 터무니없이 주는 상사에게, 일을 떠미는 동료에게, 걱정은커녕 충고만 하는 가족에게, 친구들에 비해 비교되는 나에게 등등.. 분노사회는 삶의 ‘우울감’ ‘비참함’ 등만을 남긴다. 따라서 우리는 분노사회를 화합 사회로 만드는 법을 익혀야 한다. 

 

 수평 사회 


갑질은 누가 높고 낮은지에 심히 집착한다. 이는 ‘권력’ 때문이다. 우리는 반대로 집단보단 개인을 중요시해야 한다. ‘조직이 살아야 나라가 살고, 그래야 너희가 살지!’란 생각은 쓰레기통에 버리자. ‘먼저 개인이 살아야 조직이 살고, 그래야 나라가 산다.’ 다행히도 최근 수평적 구조가 유행하면서, 미투 운동이 성공하면서 불합리성은 많이 낮아지고 있는 추세다. 


 이해 사회 


증오는 사람을 사람으로서 바라보지 않기 때문에 생긴다. 일례로 어딘가에 소속되면 그 사람은 그때부터 ‘소속의 사람’이 된다. 예를 들어 이름이 ‘하나’인 군인이 있다고 하자. 그는 그때부터 ‘하나’가 아니라 ‘군인 하나’다. ‘군인으로서의 모습’을 입지 않더라도 입게 된다. 상명하복, 명령복종, 융통성 제로 등등.. 고정관념들이 수없이 많이 씐다. 이제는 수식어를 버리고 ‘하나’ 면 ‘하나’로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있는 그대로 보면 그 사람을 이해하지 않아도 이해가 될 것이다.


 존중 사회 


정답은 더 이상 하나가 아니다. 절대적인 정답이라고 생각해왔던 ‘자본주의’도 그 밑천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는 걸 보라. 우리가 생각했던 그것은 절대적 진리가 아니었다. 생각해보자. 당신의 의견은 당신에게 있어서 세상 누구의 의견보다 중요하지 않은가? 다른 누군가가 “당신의 의견은 잘못됐어!”라고 한다면 화나지 않는가? 마음 상하지 않겠는가? 반대로 생각해보자. 다른 사람도 그에게는 그의 의견이 중요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그 사람의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잘못됐다고 말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대로 싸움이다. 이미 정답은 하나가 아님을 알게 된 지금, 각자의 생각을 우기려는 의지는 터무니없이 불필요하다. ‘내게 중요한 건 다른 이에게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그럼 저절로 존중할 줄 아는 태도가 드러날 것이다.


 사랑 사회 


마지막으로, 혐오는 고정관념과 공격으로 인한 감정 때문에 안에 감춰진 아픔을 보지 못하는 데서 나온다. 이러한 고정관념을 조금은 닦아내야만 한다. 아니, 조금 옆으로 치워놓을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상대방의 아픔을 공감해야 한다. 혼자 독립했을 때, 독감에 걸리거나, 몸살에 걸린다면 어떤가? 아픔을 좀 알아줬으면 좋겠는데 아무도 얘기를 안 들어줘서 짜증 난 적은 없는가? 아니면 서러웠던 적은? 이를 반대로 적용해보자. ‘왜 이 사람이 이런 반응을 보일까?’ ‘이 사람에게 정말 필요한 건 뭘까?’ ‘내가 잘못하고 있는 건 뭐가 있을까?’를 생각해보면 된다. 그럼 우리는 서로의 아픔을 몸소 느껴 사랑을 건네줄 수 있는 기회를 얻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사랑’을 전하는 사람들 덕분에 우리 사회는 점점 좋은 사회로 변해가고 있다. <언어의 온도>의 이기주 작가,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의 혜민 스님,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의 백세희 작가 등등. 작가들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상업적으로도 많은 이들이 ‘사랑’을 중요시하고 있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 이제는 우리 스스로도 사랑을 전하는, 그래서 서로 싸우기보다 화합하는 그런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아무리 ‘지금’을 뜻하는 관념이 ‘갑질’ ‘증오’ ‘정답 강요’ ‘혐오’로 설명되더라도 상관없다. 우리가 조금씩만 노력한다면 ‘수평’ ‘이해’ ‘존중’ ‘사랑’이란 단어들로 변할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은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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