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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교준 Nov 12. 2020

사랑받기 vs 사랑하기

사랑이 뭘까?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라고 말하는 건 어떤 의미일까? ‘나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하고 있어’라는 주제로는 생각해봤는가? 가만 생각해보면 우리는 사랑의 방법보다는 사랑의 유무에 관심이 많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요즘 연애해?” “만나는 사람은 있어?” 등의 질문은 스스럼없이 건넨다. 반면에 “요즘은 사랑을 어떻게 하고 있어?”, “사랑의 방식은 그대로니?”라는 식의 질문은 찾아보기 쉽지 않다. 

 

당신이 취할 수 있는 첫 번째 사랑의 스탠스 : 온전한 이해


“사랑하는 사람을 ‘가르친다’는 개념은 건방지고 부적합하고 몹시 해롭게 느껴진다.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또는 그녀가 변화하기 바란다는 말은 꺼낼 수 없다. 진실한 사랑은 파트너의 존재를 온전히 수용해야 한다. 올바른 사랑은 모든 면을 승인한다.” - 알랭 드 보통,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흔히 주변 사람들이 연인과 싸우는 사연을 들어보면 종종 ‘가르치려 드는 게 싫어’란 말이 나올 때가 있다. 가장 친숙한 단어로는 ‘잔소리’. 서로의 삶에 간섭하며 상대방을 본인 입맛대로 바꾸려는 태도. 아무리 ‘나는 안 그래!’라 하더라도 정말 좋아하다 보면 본인도 모르게 절로 튀어나올 수 있는 태도다. 이미 자신을 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사랑에 눈이 멀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담백한 사랑을 위해선 아무리 눈이 멀더라도 선은 볼 수 있어야 한다.


알랭 드 보통은 이러한 사랑의 이기심을 견제했다.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모든 면을 이해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이다. 상대가 내 기준에 부합하지 않더라도 사랑할 줄 아는 마음, 상대가 나완 전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더라도 수용할 줄 아는 마음. 이런 마음들을 가져서 나와는 아주 약간 다른 상대를 온전히 이해해야 한다. 


만약 이런 사랑의 스탠스가 감이 오지 않는다면 아이들을 떠올려보면 좋다. 아이들의 순수함은 잘못을 저질러도 수용할 수 있도록 사랑의 압박을 건넨다. 떼를 쓰거나 고집을 부려도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거야’ ‘어떤 점이 불편했을까?’부터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아이가 아이스크림을 갖고 놀다가 바닥에 ‘툭’하고 떨어뜨려 놓곤 해맑게 웃으며 “다시 사줘!”라 한다면, 금세 웃음을 머금고 계산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처럼.


당신이 취할 수 있는 두 번째 사랑의 스탠스 : 성숙한 존중

 

“성숙한 사랑은 자신의 통합성, 곧 개성을 유지하는 상태에서의 합일이다. 사랑은 인간으로 하여금 고립감과 분리감을 극복하게 하면서도 각자에게 각자의 특성을 허용하고 자신의 통합성을 유지시킨다. 사랑에서는 두 존재가 하나로 되면서도 둘로 남아있다는 역설이 성립한다.” -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어떤 이는 사랑을 할 때 자신을 완전히 놓아버린다. 그동안 해왔던 일, 미리 세워뒀던 자기 계발 계획마저도 내팽개치면서까지 사랑을 쫓아가는 것이다. 사랑이란 건 그 어떤 이성적인 부분들도 비이성으로 치환시켜버리는 힘을 지녔다. 


에리히 프롬은 자신을 버리고야 마는, 자신의 통합성을 버리고 상대방을 내 유일한 삶의 이유로 만들어버리는 것은 미숙한 사랑이라고 말한다. 정말 성숙한 사랑을 하려면 자신의 길을 존중하면서 상대방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사랑의 콩깍지는 한 꺼풀 두 꺼풀 벗겨지기 마련이다. 만약 사랑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한다면 상대방이 좋아하기에 충분하지 않은 초라한 상태가 되어 버릴 수도 있다. 그러다 사랑에 마침표가 찾아온다면 자신은 가진 게 하나도 남지 않은 빈껍데기가 될 것이다. 


반대로 사랑을 하면서도 자기 자신의 길을 잃지 않고 묵묵히 걸어가던 사람은 시간이 지나도 상대방에게 충분한 존재가 될 수 있다.(꼭 물질적인 부분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그렇게 자기 자존감이 높아지면서 상대방을 사랑할 수 있는 여유분이 더 확보될 수 있다. 


당신이 취할 수 있는 세 번째 사랑의 스탠스 : 주는 사랑

 

“사랑은 수동적 감정이 아니라 활동이다. 사랑은 ‘참여하는 것’이지 ‘빠지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본래 ‘주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할 수 있다.” -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인간은 주는 것보다 받는 것에 더 중점을 두는 경향이 있다. 일을 할 때도 회사에 줄 수 있는 것보다 회사가 줄 수 있는 걸 더 많이 생각한다. 학교에서도 친구에게 해줄 수 있는 것보다 친구가 내게 해줄 수 있는 것을 더 신경 쓴다. 연인도 마찬가지다. 연인에게 사랑을 주는 것보다 연인이 나를 사랑해주는 걸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실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래서 상대방이 행복하길 바란다면 사랑을 받길 원하는 게 아니라 주길 원해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각대로 해주질 않아서 서운해진다거나, 끊임없이 사랑을 갈구하며 집착성만 짙어지는 걸 경계해야 하는 것이다. 사랑을 주려고 노력한다면, 그토록 원하던 상대의 웃음을 양껏 볼 수 있다. 그렇게 우리는 되려 행복해지고 마음은 풍부해지며 상대방을 향한 사랑은 더 짙어질 수 있다.

 

사랑받는 것과 사랑하는 것


정리하자면, 이를 토대로 난 사랑의 유무보단 사랑의 방법에 중점을 두고 싶다. 언제 사랑을 할지보다 어떻게 사랑할지 생각하고 싶다. 그래서 무엇을 가르칠지 보다 무엇을 사랑할지를, 무엇을 잃을지가 아니라 무엇을 지닐지를, 무엇을 받을지가 아니라 무엇을 줄지 고민하고 싶다. 그렇게 사랑스러운 사랑을 그려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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