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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교준 May 15. 2021

남이 되는 이별

생각난 김에 적는

상처 주는 사랑과 상처 받는 사랑. 이 두 가지가 번갈아가며 나타난단 생각이 든다. 특히 사람 만나기를 유별나게 좋아하는 나 같은 사람이라면 더더욱. 사랑의 생채기를 보여주며 급속히 친해진 사람들이 비슷한 취향이었던 걸 고려하면 제법 일리 있는 말일 테다. 내게도 깊은 생채기가 있다. 종종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저려오는 사람. 그녀는 얼추 십 년이 지났는 데도 가슴속에서 나갈 생각을 안 한다.  

    

“이 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우리는 남이 되는 거야”      


그녀는 한 번 헤어진 연인은 영 잊어야만 하는 버릇이 있다고 했다. 그러니 나나 자신의 핸드폰에 있는 서로의 흔적들을 모두 없애야 한다며 헌 옷 자르듯 썩둑썩둑 거침없이 지울 수 있던 거겠지. 무척 냉철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의 얼굴을 무 자르듯 삭제할 수 있을까 싶었던 거다. 첫사랑이었던 그녀는 그렇게 작은 발톱 조각조차 남기지 않고 떠났다.      


아픈 사랑은 각인된다고 하던가. 당당했던 말과는 달리 그녀는 끝내 남이 되질 못했다. 지금도 체형이 같은 사람을 보면 블랙체리 향이 나고, 긴 머리가 잘 어울리는 사람을 보면 그녀의 이름이 목울대까지 차오르니까. 종종 들려오는 그녀의 소식은 ‘그럼에도 잘 지냈으면 좋겠다’란 생각을 지어내곤 한다. 곁엔 없는 사람이지만 있었던 사람임은 분명한 사실. 세상에 남이 되는 이별은 없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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