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문장

by 금교준

글의 소재가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 날이 있다. 아무리 쓰는 직업을 가졌다고 해도 사람인 이상 써지지 않는 날도 있는 거니까. 그런 순간이 찾아오면 메모장을 들춰보거나 사진첩을 열어본다. 생소하거나 이목을 순간적으로 끌어당기는 문장을 사진으로 찍어놓는 버릇이 있는데, 이게 제법 유용하다.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낯설었다. 분명 처음 보는 게 아닐 텐데도. 익숙해지기 위해 같은 문장을 몇 번 발음했다. ‘장님’부터 ‘갇혔네’까지. 횟수를 높일수록 한 시간 전에 사랑을 잃은 사람이 되는 기분이었다. 가끔 누군가 적은 울적한 이야기는 가슴 한 짝이 모조리 뜯겨나가는 것 같은 촉감을 들게 한다더니. 이번이 그랬다. 가엾은 사랑이 빈집에 갇혔다니. 분명 그 집에는 애정 하는 두 사람이 살았을 텐데. 온기가 꽉 찬 안식처였을 텐데. 있던 게 없어지는 건 공백과도 관련이 있다. 빈집에 갇혔을 때의 심정은 공기가 없는 공간, 우주에서 인간이 느끼는 무력감과도 밀접할 거였다. 유추해보자면 화자는 지난 사랑이 남긴 공허함 때문에 새로운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저주에 걸린 게 분명했다.


경아는 오래 알고 지내다가 성인이 됐을 때 연인으로 발전했던 사람이었다. 나는 그녀와 연애하면서 있었던 일이나 다짐했던 것을 다이어리에 적었다. 만남부터 이별까지. 그러니까 그녀가 기억에서 영 잊혀진다 해도, 어떤 사람이었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강 알 수 있는 방법이 남아있다는 의미였다. 방에 있는 4단 책장에는 아직 그 다이어리가 꽂혀있다.


9월 17일, 경아가 너무 좋다. 아무래도 그녀는 나를 만나려고 태어난 사람 같다. 11월 3일, 오늘은 경아가 무슨 행동을 하던 이해하기로 결심했다. 사랑이 뭔지 배우는 중이다. 누군가 사랑은 이해에서부터 비롯된다고 했다. 2월 4일, 경아랑 다퉜다. 새로 친해진 남사친 이야기를 꺼내는 모습이 영 못마땅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간다. 3월 6일, 경아와 헤어졌다. 화가 나서 그녀에게 막말을 했다. 그녀가 밉다. 4월 7일, 경아의 친구가 페이스북 메시지를 보냈다. 내일 발인을 한다고. 무슨 소리냐고 물으니 익숙한 이름을 말했다. 경아요. 마지막 인사는 하셔야죠. 그녀의 말에 따르면 경아는 생명이 다할 걸 진즉 알고 있었다고 했다. 나한테는 너무 큰 상처가 될까 봐 말 못 했던 거라고. 장례식 때 보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고.


시간은 무심하므로. 누가 그녀에 대한 기억이 얼마나 남았냐고 묻는다면 대충, 이라고 답해야 한다. 대신 심장 부근을 충격했던 장면의 파편이 관자엽 안쪽 해마에는 분명히 존재하고 있을 거란 말을 덧붙이면서.


그래선가. 가끔 다이어리가 눈에 들면 경아의 이름을 여러 번 곱씹다가 밤을 잃었다.



* 삽입된 문장은 기형도 시인의 <빈집>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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