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씨 37도. 오늘의 최고 기온이었다. 창밖에는 만물을 녹여버릴 듯한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아침 뉴스에서는 폭염 주의보라는 단어를 아이 이름 부르듯 말했었다. 이런 날엔 집에서 에어컨을 켜 둔 채로 가만히 누워있는 일이 가장 꿈같은 일일 거였다. 여름의 피서지라는 곳들, 카페나 피시방, 햄버거집 등 그런 곳엘 가서 아무렇게나 시간을 때우는 일도 좋았다. 나는 다분히 활동적인 사람이라, 카페 같은 공간에까지 가서 인터넷을 손 가는 대로 뒤적거렸다.
흥미로운 정보를 발견했다. 사이언스 타임스에 뇌가 없어도 무언가를 기억할 수 있다는 소식이 게재된 거였다. ‘보디 플랜’이라던가. 동물들은 유전적으로 발달 과정의 기억과 기능이 몸체의 특정 위치에 각인된 채로 성장한다는 연구 결과였다. 그것에 따르면 분명 내 몸 어딘가에도 특정 기억이 저장되었을 게 분명했다. 지금 나는 아무렇게나 써야 하는 이 시간을 어떻게든 활용해야 한다. 그런 일이 있을까, 생각해보자 라고 속으로 말했다.
대학교 어느 학년 여름방학. 나는 피시방 아르바이트생이었다. 오후 한 시에 출근하고 밤 열 시가 되면 퇴근했다. 그맘때 연애했던 사람도 기억난다. 여름방학이 되기 전, 그러니까 1학년 1학기 종강 즈음에 만났다. 술자리에서 만난 사람이었는데 그래서인지 내가 술 마시러 가는 일을 좋아하지 않았다. 적확히 표현하자면 내가 자신이 아닌 이성과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것을 무척 싫어했다. 당시 피시방에서는 남자는 야간, 여자는 오후 타임으로 일을 배정받곤 했다. 나와 같이 일하던 대부분의 동료들이 내게는 이성으로 구분된다는 의미였다. 그러니 내가 출근한다는 건 그녀에겐 옳지 못한 행동이 되는 거였다.
그 결과로 나는 그녀에게 최소 한 시간에 한 번씩은 메시지를 보내야 했다. 한 번이라도 지체되면 인내심 테스트를 하듯 그녀는 말뚝 같은 말들을 내 가슴에 꽂았다. 너 그 시간에 뭐 했어. 다른 알바랑 얘기했지. 너 지금 나 외롭게 만드는 거야. 그러다 내가 나 오늘 힘들었어,라고 하면 그녀는 ‘너는 나를 좋아하긴 해?’라고 했다. 폭염 주의보니, 경보니, 하는 말이 이곳저곳에서 들리던 날에도 그녀는 나를 따갑게 찔렀다.
개강이 얼마 남지 않았던 날, 롯데리아에서 그녀의 어머님을 만났다. 애인의 본집은 충청도에 있었는데, 다음 학기에 살 집을 고르기 위해 어머님과 같이 서울로 올라온 거였다. 나는 가장 깔끔한 옷을 입고 그들을 마중 나갔다. 문제는 내가 갖고 있던 것들 중에서였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방학이었더라도 일주일에 6일씩 일을 다녔던 탓에 옷을 사러 갈 시간이 없었다. (남은 하루는 온종일 잠을 잤다) 그날 나의 겉모습은 추레했다. 구김살이 많은 셔츠에 꼬질한 운동화, 머리에선 땀 냄새도 났을 거였다. 그날 밤, 그녀는 내게 ‘엄마가 너 별로였대. 그래도 나는 괜찮아.’라고 했다. 그래도 나는 괜찮아. 그런 종류의 말이 사람을 좋아할 여력을 증발시킬 수도 있다는 걸 그때 배웠다.
“우리 그만하자. 미안해.”
내가 그녀에게 건넨 이별 통보였다. 그 시절에는 사랑하는 사람의 가족 중 한 명이라도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못내 견디기 힘들었던 거였다. 이런 관계, 억지로 끌고 가봤자 그녀든 나든 어지간한 약으로는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받을 것 같아서.
별안간 ‘보디 플랜’이라는 말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나도 그런 게 있다. 롯데리아를 지나칠 때마다 “나는 걔 별로더라.” 하는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