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어진 자판에 대해 생각한다. 이 년 넘도록 썼으면 오래되긴 했지. 세월을 머금은 것은 본래의 기운을 잃는다는 말을 곱씹는다. ‘ㅏ’자가 빠진 노트북도. 연결이 됐다 안됐다 하는 무선 마우스도. 그러다 응당 예외는 있기 마련이 아닌가, 하는 결론까지 도달하고 말았다.
“그만해. 지긋지긋해.”
수현이었다. 그녀는 오 년 전에 입술을 나눴던 사람이다. 특유의 촉촉한 감촉과 은은한 체리 향이 선연하다. 그녀 덕에 과일 향 틴트가 달다는 사실을 배웠다. 그게 사람의 생을 다소간 깎는다는 것도. 그녀는 새로운 직장에 들어갔을 때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다. 적확히 말하면 나는 수현을 원하지만, 그녀의 삶에서 내가 차지하는 비중은 급속히 줄었다. 그녀의 메시지를 기다리는 시간은 늘었고, 그녀에게 부재중 전화를 남기는 경우가 잦았다. 어쩌면 집착으로 느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미안해. 만취한 수현이 내게 전화했을 때의 첫말이었다. 어디야. 나 당고개. 뭐 했어. 동료랑 술 마셨어. 그녀는 그 사람이 자신의 힘든 것들을 다 들어줬다고, 내 흉도 봤다고. 심지어 그 사람이 조금씩 좋아지는 것 같다고도 했다. 그래도 동료랑 친해져서 다행이네. 얼른 들어가.
그 일이 있고 얼마 후, 이태원 골목을 걷다가 그녀에게 물음 하날 던졌다. 오 년이 지났을 때 우린 뭐 하고 있을까. 다음 주에 지구가 멸망한다면 제일 먼저 하고 싶은 게 뭐야. 잘 살 수 있을까 우리. 나는 두 발을 딛고 있는 세계가 이대로 지속될지를 궁금해했다.
“그만해. 지긋지긋해.”
그날 수현은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뭔가를 들을 대로 들은듯한 표정도 지었다. 그녀의 체념 비슷한 눈빛이 가슴을 찔렀다. 새로 친해진 직장 동료가 당고개에 산다는 것과 그 사람과 술을 마셨다는 것, 그가 남자라는 것까지. 나는 모든 내용을 다 알고 있는데. 너 지금 나한테 그런 표정 지으면 안 되잖아, 하고 속으로 뇌까렸다.
이제 와서 그녀를 마주친다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당신이 좋아하던 책을 쓰고 있어. 한 번쯤 다시 만나보고 싶었어. 나는 당신 없이도 잘살고 있어. 키보드 위의 낯선 공백을 본다. 자판이 빠진 곳이 유독 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