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이 정도의 양은 오래간만이었다. 종종 반찬을 해주는 이모 말로는 올해는 마른장마였던 탓에 풋고추도 청양고추처럼 매워졌다고 했었는데. 빗방울이 통유리창에 부딪치는 소리를 들으며 적당히 나눠서 왔으면 좋았을 걸, 하고 중얼거렸다. 적정 시기를 놓친 것은 때에 맞지 않는 기억도 같이 불러오는 법이던가. 별안간 뭐든 적당한 게 좋다는 걸 깨달았던 순간이 떠올랐다.
사랑을 매개로 했던 인연과의 일이었다. 경아. 그녀와 만나는 동안 나는 시시때때로 뭘 하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분은 어떤지 같은 것들을 궁금해했다. 뭐해? 오늘은 괜찮아? 무슨 일 있어? 경아는 내게 답 대신 부탁 같은 걸 했다. 나 너무 좋아하지 마. 아무리 내가 좋아도 너는 네 인생을 살았으면 좋겠어. 그녀는 이런 식으로 가다간 내가 그녀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런 건 안 좋은 거라고. 자신부터 챙겨야 한다고.
경아의 말은 고스란히 행동으로 나타났다. 도서관에 가거나 아르바이트를 할 때면, 그녀는 그녀의 일에 온전히 집중했다. 반대로 나는 무얼 하든 핸드폰을 열어 그녀의 연락을 기다리거나 그녀만을 생각했다. 그녀라는 존재가 사라진다면 더 살아갈 이유가 없을 정도로. 딱 그녀가 걱정하던 대로였다.
그녀와 이별했을 때. 나를 나라고 부를 수 있는 건 상실뿐이었다. 이렇다 할 목표도 없고 나를 위한 취미라던가, 좋아하는 일이라던가. 아무것도 없었다. 비가 내렸을 때 흠뻑 젖어 무력해진 종이상자처럼. 그녀를 제외하고도 자아를 유지해줄 만한 것을 나는 지니지 못했던 거였다.
자기 자신을 잃어가면서까지 행하는 과도한 사랑은 독이 될 수 있다는 걸 깨닫게 해 준 사람이 있다. 나 너무 좋아하지 마. 너는 네 인생을 살았으면 좋겠어. 예정에 없던 비가 쏟아지는 날이면 그 말이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