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날이 있다. 샤워기를 틀고 나서야 보일러를 켜지 않았다는 것을 인지하는. 그러니까 기어코 사달이 나서야 해야 했다는 걸 생각해내고는 관자놀이 부근에 나사 하나가 빠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날. 언제는 인스턴트커피를 쏟은 컵에 찬물을 붓거나, 재래김 한 봉을 뜯고 나서 밥이 다 떨어졌다는 것을 기억했다. 눈가를 찡그렸던 사건들이었다.
떠올릴 때마다 아련한 표정이 지어지는 사람이 있다. 그를 잃고 난 뒤엔 얼마간 머릿속이 텅 빈 날이 반복됐다. 내려야 할 정거장을 지나쳐 강의에 지각하는 날이 잦았고, 시험 날짜를 잊어서 학점을 통째로 날려버릴 뻔했다. 걷다가 문득 보인 나무가 그의 뒷모습을 닮아서 그대로 무너진 적도 있었다. 주저앉은채 고개를 들었다가 내렸다가 어깨를 들썩였다. 강의가 끝나는 시간까지.
눈가를 찡그리는 것과 아련함 사이의 상관관계를 곱씹어보기로 한다. 블루투스 스피커에선 아련한 목소리로 누군가를 부르는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수-현. 별안간 그 이름이 입술을 타고 밖으로 나오더니 귓바퀴를 돌아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몇 초 후에 다시 입을 통해 토해졌다가 귓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걸 몇 번 되풀이했다. 에너지 보존 법칙 때문일까. 이름이 내 안과 밖을 드나들면서 몸의 에너지가 조금씩 빠졌다. 이마에선 열이 났고, 동시에 귀와 입 사이의 어느 부분이 점점 허전해지는 것 같았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오늘 밤은 온통 그를 회상하다 밤을 새워버릴 거야. 그러나 내일은 출근이니 그럴 순 없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몸을 씻기로 한다. 옷을 벗고 샤워기를 틀었다. 물이 차다. 보일러를 안 켰나. 관자놀이 부근이 시큰했고, 나는 눈가를 찡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