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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의 고고학 Oct 26. 2022

여전히 낯선 삶

주어진 삶 속에서, 거저 찾게 된 의미들.

#.1 어느덧 이탈리아에 온지 8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여전히 언어는 어렵고, 환경은 낯설다.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질 것이라 넘기던 부분들은, 여전히 늘 새롭다. 지난 한 주, 아파서 꼼짝 않고 방에만 있었다. 평소 건강했던터라, 이렇게 아픈건 오랜만이다. 아픈 내내, 별 생각이 다 들었다. 몸뿐만 아니라, 마음마저 약해진터라, 그간 억눌렀던 그리움들이 터져 나온다. 가족, 친구, 음식, 환경, 어쩌면 당연히 여겼던 모든 것들에 그리움이 있을 줄이야. 그리움과 낯설음 그 어중간한 사이에서, 아무도 듣지 못할, 또 어느 누구도 관심 갖지 않을 하소를, 연신 혼자 실컷 해댄다. 창문을 닫으면, 볕이 들지 않아, 새까만 우주 한복판에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어두운 방 한 가운데에서, 무거운 내 기침 소리와 함께.



#.2 버티려고 하는 것이라면, 삶은 궁색해 질 것이고, 의미를 찾으려 한다면, 궁핍해 보일 수 있다. 여전히 삶은 낯설다. 전엔 낯선 상황에 날 투신해, 새로움을 얻고자 했다면, 이젠 새로움 안에서 익숙함을 찾으려 고군분투한다. 늘 쓰던 단어, 늘 먹던 것, 늘 이야기 하는 사람만 찾게 된다. 옛날엔 이런게 촌스러워 보였고, 나이 드는 것만 같아 싫었지. 그런데 이제 새로운게 버겁고, 낯선 건 벅차다. 그리움은 내게 그닥 중요하지 않은 정서 중 하나라 생각해왔는데, 이곳에 오니 내가 거쳐간 혹은 접했던 모든 사물과 사람, 곧 존재들 안에 내 자신이 부여한 ‘시간’의 한 형태가 ‘그리움’이 아닐까 생각한다. 예전엔, 그 시간을 나를 스쳐 지나갈 직선형태의 시간으로 생각했다면, 지금은 나를 맴도는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형식으로 그려진다. 사물의 시간 형태는 먼지로 남는다면, 인간의 시간 형태는 그리움으로 켜켜이 쌓인다. ‘그리움이 쌓이네’라는 어느 노래 가사처럼, ‘그리움’은 시간을 통해 존재 안에 쌓인다. 쌓이는건? 내가 부여한 어떤 내적인 것이리라.



#.3 어쩌면 그동안 ‘의미’를 자꾸 ‘찾아나서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의미는 내 안에 오고 가는, 어쩌면 스쳐 지나가는 사건들을 능동적으로 포착해냄으로써, ‘의미화’ 한다는 역동이 숨어 있다. 이런 능동적 차원에서의 의미 포착도 있겠지만, 때론 의식하지 못 한 채 흘려보낸 시간 안에서 영겁의 순간을 발견할 때가 있다. 굳이 찾아 나서지 않아도, 찾아지게 되는 그런 것이랄까. 나는 그동안 너무 애쓰며 살아왔는지도 모르겠다. 자꾸 찾으려고, 포착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게 던져진, 주어진 시간 안에, 나는 관통돼 있고, 그 안에서 내가 찾고 의미화 하려 한 것보다, 내게 주어진 시간은 폭포수 마냥 쏟아져, 어찌할 수 없이 놓친 지나간 수많은 나의 현재를 바라본다. 그간 주어진 시간 안에서, 거저 운 좋게 ‘의미’를 포착했던 것이지, 내가 의미를 찾아나선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4 아파서 속수무책 한 주간 침대 위에서 지냈지만, 무의미한 시간은 없었다. 거의 빈사 상태에서 보냈지만, 시간은 나를 피해가지 않고, 고맙게도 내 안을 관통하여, 좋은 깨달음을 주고 갔다. 날 피해갈 수도 있었겠지만, 아니면 하마터면 내가 깜빡하고 놓쳤을 수도 있지만, 나는 노력하지 않았지만, 시간은 내게 주어져 나를 뚫고, 내 정신을 깨워, ‘의미’라는 선물을 주고 갔다. 우리가 살아온 시간만큼, 모든 것엔 ‘그리움’이 녹아있다는 것. 의미는 내가 찾는 것이 아닌 시간이 주는 선물이라는 것.



성천사성과 바티칸 그 어중간한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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