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사가 주인공인 현대판타지는 왜 재미가 없을까?
저는 어린 시절부터 소설을 보고, 써왔어요.
간호사라는 직업을 가진 지금,
더 이상 소설을 쓰진 않지만 여전히 많은 소설을 읽고 있고,
그중에서도 특히 현대판타지(이후 현판) 장르를 좋아합니다.
(저는 장르 소설을 특히 자주 읽었어요)
현판은 이제 장르의 경계를 넘어,
군인, 의사, 연예인, PD, 프로게이머 같은 다양한 직업군을 다루고 있죠.
그들의 직업은 곧 능력치이자,
세계관을 설명하는 설정이고,
무언가가 시작되는 서사의 출발점이 됩니다.
그런 현판을 보다 보면,
저도 문득 생각하게 돼요.
“나도 내 직업을 살린 소설을 한번 써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실제로 시도해봤습니다.
몇 년 동안 구상하고, 직접 써보기도 했어요.
하지만 결국 내린 결론은 단호했죠.
간호사 판타지는 왜 재미가 없을까?
의사: 한산이가 작가님의 『중증외상센터』, 유인 작가님의 『외과의사 엘리제』
연예인: 백덕수 작가님의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변호사: 자카예프 작가님의 『이것이 법이다』
회사원: 네시십분 작가님의 『말단 사원이 너무 유능함』
군인: 달빛물든 작가님의 『우리 소대 부소대장은 백만장자』
당장 떠오르는 작품만 봐도
각 분야마다 최소 한 작품 이상은 주인공으로 다뤄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간호사는?
없습니다.
(로맨스 소설에서 주인공의 직업이 '간호사'인 경우는 있었어요.)
혹시 내가 모르는 건가 싶어 여러 검색어로 찾아봤지만,
키워드에조차 잘 걸리지 않는 걸 보면
정말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현판의 주인공은 대체로 모든 걸 혼자 해내는 먼치킨입니다.
판단하고, 싸우고, 바꾸는 존재죠.
하지만 간호사는 혼자 모든 걸 할 수 없습니다.
항상 누군가와 협업해야 하는 직업이고,
'나 혼자 모든 걸 결정하고 처리한다'는 구조가 성립하지 않아요.
그러다 보니 현실성이 강해지고,
현판 독자가 기대하는 “통쾌함”이나 “과장된 판타지성”이 부족해지기 쉽습니다.
간호사의 간호는 말 그대로 '돌봄(care)'에 가까워요.
환자가 회복되더라도, 그 공은 대개 의사에게 돌아갑니다.
'환자가 기적적으로 회복하는 이야기'를 쓴다고 했을 때,
간호사가 주인공인 작품과,
의사가 주인공인 작품 중 독자라면 어느 쪽을 고를까요?
저라면, 의사를 고를 거예요.
왜냐하면 간호사의 역할은 극적인 전환보다,
지속적인 유지와 관리에 가깝기 때문에
드라마를 만들 수 있는 지점이 적습니다.
현판은 '현실의 구조를 부수는 재미'가 큰 장르입니다.
회사를 박살내거나, 조폭을 정리하거나, 군대를 뒤집거나.
그런데 간호사는 현실적으로 병원의 구조를 주도적으로 바꾸기 어려운 위치입니다.
최전선에 있지만, 최종 결정권은 갖고 있지 않죠.
그래서 구조적으로 "사이다 전개"가 어렵습니다.
비록 판타지 장르에서는 외면받지만,
간호사 이야기는 '일상물' 제법 인기가 있어요.
태움에 시달리던 신입 이야기
극적으로 회복한 환자가 다시 찾아온 이야기
진상 보호자 썰
응급실에 몰려드는 온갖 인간 군상…
간호사 인구가 워낙 많기도 하고,
직접 관련 없는 사람도 의료라는 익숙한 소재 덕분에 쉽게 감정이입할 수 있거든요.
이건 사실 '의사'라는 직업 내에서도 나타나는 차이에요.
수술이라는 확실한 ‘액션’이 있는 외과의사는 이야깃거리가 많은 반면,
비전공자가 보기엔 내과의사의 이야기는 조금 심심해 보일 수 있죠.
(물론 간호사 입장에서 보면, 내과만큼 하루하루 경과가 다이내믹하고 재밌는 과도 없습니다. ㅋㅋ)
간호사는 주인공이 되기엔 너무 심심합니다.
생명을 다루고, 사람의 곁을 지키고, 책임을 지는 직업이지만
간호사는 주인공이 되기엔 너무 현실적이고,
너무 조용하게 강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직은,
저는 간호사 주인공 소설을
‘재미있게’ 쓸 자신이 없습니다.
하지만 만약, 누군가 쓴다면
언젠가 누군가
간호사라는 직업의 진짜 의미를 판타지로 풀어내는
그런 작품을 만들어 준다면,
저는 그 사람의 1호 팬이 될 겁니다.
이야기를 읽을 준비는 되어 있어요.
제가 이 글을 스레드에 올리고
꽤 많은분들이 즐거워해주시고, 아이디어를 주셨어요.
감사하게도 소설을 써보는게 어떻겠냐고 연락을 주신 분이 계셔서
이 글을 기점으로 현재 소설 작성중에 있습니다.
5월부터 시작했으니, 벌써 한달이네요.
한달동안 초기 인트로 부분을 퇴고만 6번
진짜 그 부분이 말도 안되게 힘들더라구요...ㅎㅎ
혹시라도 좋은 소식이 있다면 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