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계획대로 되는 일은 그저 새로운 곡을 출발시키는 일 밖에 없다
사랑의 관계도 더 나아가 우리의 삶 전체도 재즈와 비슷한 면이 있다.
치열하게 대결하고 화해하면서 매 순간 흐름이 생겨난다
그 흐름을 모두 내 의지대로 내 합리성의 기준대로만 짜 맞추려 하면, 오히려 전체의 조화가 어그러진다.
우리의 계획대로 되는 일은, 그저 박자를 세며 새로운 곡을 출발시키는 일 밖에 없다
그 후에 펼쳐지는 리듬에 몸을 맡기면서
[가장 사적인 관계를 위한 다정한 철학책, 이충녕 作]
영화 '비포선라이즈'의 주인공들은 강가를 걷다, 제시한 한 단어로 시를 지어주겠다는 예술가를 만난다. 여주인공인 셀린느가 말한 단어는 "밀크셰이크". 내가 그 예술가은 아니지만 저런 감성 없는 단어를 주면 어쩌라는 건가 싶었지만, 영화 속의 그는 담배를 몇 번 물었다 들었다를 반복한 뒤 어렵지 않다는 듯 괜찮은 시를 읊조렸다. 당시의 나는 코로나가 한창인 지금 아무도 없는 베트남으로 출장을 왔었고, 타국의 호텔에서 격리된 지 4일 차. 나도 단어 하나로 좋은 글을 쓸 수 있을까 생각하는 하루였다.
이곳에서 나의 하루일과란, 아침에 일어나서 스페인어와 중국어를 공부하겠다며 여러 나열된 문장들을 듣는 것. 어느 성공한 사람들처럼 잠기운이 남아있는 이부자리를 정리하는 것. 알 수 없는 찝찝함에 격리된 좁은 방을 한번 닦아내는 것. 그리고 너는 출근했을까 아니 일어는 났을까 생각하는 것. 10년을 알던 친구라기에는 우리는 처음으로 입맞춤을 한 후 나의 출장으로 인해 2개월 동안 휴대폰으로만 연락하고 있는 중이다. Out of sight, Out of mind. 이전 내 마음의 전부였던 사람과는 잠시 떨어져 있기만 해도 결국은 싸운 후 만나기 전까지 대화가 쉽게 단절되어 버렸기에, 이후로 나는 누군가와 멀어져 있을 때에는 연락이 이어질 거라는 기대를 하지 않게 되었다.
“잘 다녀와”
그날 아침 그 연락에 답을 하지 않은 것은, 마땅한 대답의 문장도 없었거니와 이 연락으로 대화가 시작이 된다 하여도 끝은 빈 공간 속 침묵일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럴 땐 일상 속에 있는 그들이 아닌 언제나 떠나 있는 나만 괴로웠기 때문이다. 모든 건 다시 만나게 된다면 결정되겠지. 나이가 들 수록 우리는 최대한 상처받지 않으려 겁쟁이가 된다. 그러고 그의 용기로 대화가 다시 시작되었고, 그는 친구처럼 옆에서 (아 10년간 친구였지) 계속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물론 지금 우리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기에 조심스러움에서 나오는 배려일지 모르나, 생각해 보면 6년 전의 나 홀로 이탈리아에서도 내 옆에서 대화를 이어 나가 주었던 건 너 아니었던가.
잠시만 얼굴 보는 건 안 되겠지? 출장이 끝나고 한국으로 돌아와 다시 격리를 하고 있던 때. S의 말에 거절을 한 것은 며칠 동안 격리로 인해 사람을 만나지 못한 내가, 너를 보면 너무 반가울까 싶어서였다. 너를 안아버릴까 봐. 품속에 얼굴을 기대 버릴까 봐. 내가 네가 아닌 사람 그 자체에 취한 것일까 봐. 정돈되지 않은 이 마음에 후회하게 될 까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