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들레헴을 잃은 동방박사 세 사람

-김승옥「서울, 1964년 겨울」을 읽고

by 이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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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팔레스타인 지역, 구체적으로는 지중해 연안과 요르단강 사이의 지역이 가나안이던 시절, 밤하늘에 별 하나가 떠오른다. 바로 그곳에 메시아가 나실 거란 걸 알았던 동방박사 세 사람은 별이 떠오른 베들레헴으로 향한다.

그렇다면, 서울, 1964년 겨울의 동방박사 세 사람-나, 안, 사내가 향할 베들레헴은 어디인가? 세 사람은 거리에 서서 묻는다.

“어디로 갈까?”

돌아오는 건 대답 대신 부지런히, 혹은 게으름을 피우며 반짝이는 네온사인뿐이다.

“「서울, 1964년 겨울」은 지금 이곳에서 젊다. 그때도 젊었고, 지금도 젊다.”1)는 말에 십분 공감한다. 덧붙이자면, 젊은 척하는 게 아니라 그냥 젊다. 그래서 재밌다. 이 작품을 국어 교과서에서 처음 읽은 중학생 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재밌다. 그 이유는 이 소설이 지극히 개인적이기 때문이다.

굳이 마틴 스코세이지와 그의 말을 인용했던 봉준호까지 언급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안다. 남들 다 아는 얘기보단 저 사람만의 아주 내밀한 얘기, 그만의 경험을 듣는 게 더 재밌다는 것을. 이야기를 사랑하는 호모 사피엔스의 거의 본능적인 감각이랄까. 그러니 선술집에서 군참새를 먹으며 “서대문 근처에서 서울역 쪽으로 가는 전차의 도로리가 내 시야 속에서 꼭 다섯 번 파란 불꽃을 튀기는 것을 보았습니다.”하는 대화를 나누는데, 재미가 없을 수가 있을까.

중학생 때 읽었을 때는 딱 여기까지였다. 참새를 구우면 어떤 맛이 날까, 불구경 재밌겠다, 귤 맛있겠다, 따위의 일차원적인 감상에 머무르다가, 작품의 주제가 ‘해방 이후 한국 사회에 뿌리내린 개인주의’라느니, ‘안’이 상징하는 것이 ‘독재정권 시기 지식인의 고뇌’라느니 하는 교과서적인 해설을 달달 외우고, 시험을 봐서 다 맞으면 그걸로 끝이었다.

물론, 이 정도만 해도 충분히 훌륭한 소설이다. 교과서에서 다룰 정도로 주제가 명확하고 상징이 뚜렷하다. 거기에 “그 얘기는, 내가 만일 라디오의 박사 게임 같은 데에 나가게 돼서 ‘세상에서 가장 신선한 것은?’이라는 질문을 받게 되었을 때, 남들은 상추니 오월의 새벽이니 천사의 이마니 하고 대답하지만 나는 그 움직임이 가장 신선한 것이라고 대답하려니 하고 일부러 기억해 두었던 것이었다.” 같은 재치 넘치는 문장들까지.

그뿐만 아니라, 딱 떨어지는 3막 구조(나, 안, 사내의 만남 ― 세 사람의 거리 방황 ― 모텔에서의 마무리), 그 안에서 끊임없이 벌어지는 사건과 행동까지. 마치 하나의 단편 영화, 혹은 연극을 보는 것 같은 생생함이 있다. “내가 이 소설을 좋아하는 가외적인 요소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이 소설이 갖고 있는 연극성이다.”2)는 말에도 십분 공감한다.

모든 훌륭한 소설이 그렇듯, 이 작품 또한 교과서적인 교훈과 오락적인 재미에서 그치지 않고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런데, 이래도 괜찮겠어?

베들레헴이라는 목적지를 잃은 채 방황하던 동방박사 세 사람은 마음의 편함이 거리만도 못한 여관에서 “혼자 있기가 싫”다는 사내를 끝내 뒤로 하고, “나란히 붙은 방 세 개에 각각 한 한 사람씩 들어갔다.”

지금까지의 한국 사회는 너무 각자의 방이 없어서 문제였다. 일제강점기엔 해방을, 전후엔 사회 복구를, 독재 정권에서는 민주화를, 민주화 이후엔 경제 부흥을, 그렇게 항상 개인보단 사회와 공동체, 더 큰 대의를 쫓아 살았던 게 한국인 아닌가. 1964년이나 2025년이나, “벽으로 나누어진 방”은 모두에게 필요하다.

하지만, 그래도, “아내의 시체를 병원에 팔았”다며 굳게 닫힌 문에 대고 “가끔 ‘여보’라고 중얼거리며 오랫동안 울고 있”는 사내를 만난다면, 그때는 각자의 벽이 안으로 슬며시 열리는 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아니, 꼭 그랬으면 하는 바람이라면, 지나친 욕심일까.



미주

1) 정과리, 「순수 개인의 세계를 처음 그리다」, 실린 곳: 『서울, 1964년 겨울』, 문학나무, 52쪽.

2) 김도언, 「죽지 않고 얼지 않는 현대성 현대성….」, 같은 책, 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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