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사랑의 서사를 그린 한 점의 목탄화

-배수아 「회색 時」를 읽고

by 이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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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특별한 이유도 없이, 과거의 어느 사소한 순간이 생각날 때가 있다.” 이 소설의 첫 문장엔 정확한 것이 없다. 이유, 시간, 공간, 인물, 초점, 감정, 행동, 기타 그 어떤, 이른바 ‘소설의 좋은 첫 문장’의 요소랄 게 하나도 없다. 책을 덮고, 표지를 다시 본다. 분명 ‘소설’이라고 적혀 있다. 다음 문장은 “과거는 주로 미래의 한순간과 강하게 연결되는데,”로 시작한다. 그렇게 시간에 관해 얘기하며 “거울의 벽을 통한 미래는 과거의 예언이 되었다.”고 하질 않나, “죄의식은 그 자체가 곧 과거의 보편적인 거울”이라질 않나, “내가 함께 살고 있는 채식주의자 친구”에 관해서 길게 늘어놓질 않나, 그런 후에야 ‘나’는 수미 얘기를 시작한다. 다 읽고 나면 내 머릿속이 ‘회색 뇌’가 된다.

대체 이게 뭐냐고 작가에게 따지는 심정으로, 내가 읽은 게 뭐냐고 그 실체를 파헤치는 심정으로 소설의 첫 문장으로 돌아가서 다시 읽어보고서야, 인정한다. 그래, 당신이 맞다. “이 작품은 단순히 ‘수미’라는 한 인물에 대한 사랑의 서사가 아니라 ‘타인’ 일반에 대한 사랑과 만남에 대한 에세이적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1)고 했지만, 내게 이건 100% 사랑의 서사다.


소설은 다분히 의도적으로 줄 바꿈 공백을 넣은 형태가 그렇듯, 크게 세 파트―1. 에세이 파트, 2. 수미 파트, 3. 타인 파트―로 나뉜다.

수미 파트에 앞서 길게 붙는 에세이 파트는 작가가 마련한, 암호 같은 본문을 푸는 열쇠다. “거울의 벽을 통한 미래는 과거의 예언이 되었”듯이 이 에세이 같은 글이 수미 파트의 거울이 된다. 여기에 비춰 보아야 “말 그대로 나는 때때로 미래의 일을 ‘기억’하곤 했”기 때문에, “앞으로 몇 년 뒤 수미를 만나게 되었고 그것에 대해서 쓰게 되었을 터”라는 ‘나’의 말을 해독할 수 있다. 또한 이것은 ‘나’가 절절히 고백하는 후회와 변명의 고해성사다. 죄의식에 대한 자기반성이다. ‘나’에게 죄의식은 “수치의 쌍둥이이자 더욱 견고하고 지속적인 형태”다. 그것은 “자신의 과실로 인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어느 순간들을 그대로 헛되게 흘려보냈다는 과도하게 예민한 책임감에서 기인한다.” 수미 파트에 이것을 대입해 보면, “수미에게 진심으로 행동하지 않았다.”는 후회, “거절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수미를 그저 “남몰래 관찰”만 하며 “만족하는 몽상가의 자세를 버리지 않았”던 자신에 대한 수치다. 영화 <빠삐용>의 대사를 빌리자면, “인생을 낭비한 죄, 유죄”다. 이게 사랑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이 파트가 기능적인 역할을 한다고 해서, 단순히 거기에만 그치진 않는다. 에세이 파트는 독립적인 글로도 충분히 읽을 만한 힘이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어지는 수미 파트로 넘어가질 못한다.

수미 파트는 소설을 소설답게 만들어주는 외피다. 여기엔 분명한 서사가 있다. ‘나’가 수미를 만났고, 만났지만 아무 일 없었고, 나중에 그녀가 죽었다는 얘길 전해 들었는데, 어느 미래에 그녀를 다시 만났고, 그녀와 ‘나’는 비로소 함께했다. 서사는 분명하나 시간은 분명치 않다. 미래 서사가 과거 시제로 쓰인 아리송한 문장은 오타가 아니라 작가의 의도며 소설의 핵심이다. 살면서 자신을 유일하게 사로잡았던 ‘수미’가 한 명도 없었던 사람, 그녀(혹은 그)와 아무 일 없었지만, 그녀(혹은 그)와 함께하는 온갖 미래를 상상하다 못해 과거로 기억하는 일이 한 번도 없었던 사람, 그랬던 자신에게 수치를 넘어 죄의식마저 느꼈던 적이 정말 한 번도 없는 사람, 그런 사람만 ‘나’에게 돌을 던져라. 수미 파트도 독립적인 힘은 충분하지만, 에세이 파트와 나란히 놓일 때, 이 소설은 비로소 가장 높은 위치의 완성도에 다다른다. 둘의 관계는 상호 보완적이고 필수 불가결이다.

타인 파트는 오히려 사설이다. 평론가들을 위한 팔팔한 미끼이자, 작품과 작가 자신의 외적 확장을 위한 맛있는 양념이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자. 우리는 모든 타인에 대해 ‘나’가 수미를 떠올리듯 하지 않는다. 아무 이유 없이 떠오르고, 진심을 숨기고, 오히려 반대로 말하고 행동하고, 계속 생각하고, 후회하고, 끝내 같이 있는 미래를 상상하고, 영화 <라라랜드>의 마지막 시퀀스처럼 “만약에, 라고 만번쯤 상상해보았”을 “완전 무결한 환상”을 갖는 일은2) 모든 타인에게 해당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지만, 이게 사랑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회색은 흐리다. 충분히 흐리지 않은 회색은 한없이 흰색에 가깝고, 그렇다고 너무 흐린 회색은 한없이 검은색에 가깝다. 회색은 언제나 적당히 흐린 채 머물러야 한다. 「회색 時」는 흐리지만, 흐리지 않다. 기존의 시간관, 소설의 문법, 독자의 인식 체계, 고정관념, 이런 것들을 모두 흐리면서, “회색 바탕 그림 속의 회색 옷을 입은 회색빛 남자를 회색으로 덧칠”하지만, 그 도구는 “회색빛 붓”이 아닌 두터운 목탄이다. 종이에 스며들어 투명하게 말라가는 게 아니라, 자기를 줄여서라도 기어코 그 위에 유의미한 얼룩을 남긴다. 그렇게 소설은 그 자체로 선명해진다. 투명하고 맑은 수묵화가 아니라 단단하고 묵직한 한 점의 목탄화다. 심지어 자기를 줄이지도 않고 오히려 점점 더 커진다. 그 위에 작가는 배수아 석 자가 새겨진 인장을 지그시 눌러 찍는다.


미주

1) 정은경, 「과거와 타인은 어떻게 도래하는가」, 『회색 時』, 도서출판 아시아, 2013, 100쪽.

2) 허지웅, 「[허지웅의 경사기도권], 관객을 무너뜨리는 <라라랜드>의 엔딩 신」, 『씨네 21』, 2016-12-19, https://cine21.com/news/view/?mag_id=85976, 2025-10-31 접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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