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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꿀체리 May 06. 2021

당신은 지금 시골을 떠나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교회 앞에서 기다리면 된다."

어머니는 예배 끝나는 시간에 맞춰 교회 앞에서 당신을 픽업해달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일부러 교회와 조금 떨어진 곳에 주차하자고 남편에게 말했다. 예민한 마누라를 만나 인생이 피곤하다고 남편은 투덜거렸지만 결국 내 생각대로 해 주었다. 교회 앞의 낡은 집, 가로 세로 1m 도 안 되는 뜰창에 밥그릇과 함께 넣어진, 주둥이가 시커멓고 의외로 순한 그 강아지를 만나고 싶지 않은 내 마음을 그도 알고 있는 것이다.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을 때는 외면하는 것이 최선이다.




'봉화 슈퍼' 앞을 지난다. 간단한 과자라도 사려고 들르는 이곳에는, 상황은 조금 낫지만, 목줄이 졸리지 않을 정도로만 묶인 강아지가 있다. 원래는 세 마리가 있었는데 이번에 가니 두 마리밖에 없었다. 한 마리는 어디 갔냐고 묻지 않았다. 종전에 없던 울타리가 쳐 있어서 들여다보니 한 녀석이 새끼를 다섯 마리나 낳았다. 어미는 젖이 퉁퉁 불어있고 새끼들은 아직 추운 날씨에 지들끼리 엉겨 붙어 있다. 스티로폼이라도 깔아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말하지 않았다. 얼른 필요한 것을 사고는 그곳을 벗어났다.


봉화 슈퍼 앞의 어미개와 강아지들






몇 달 전보다 어머니는 더 늙어 있었다. 여든세 살의 나이는 이제는 노년 중에서도 끝자락일 것이다. 도시에는 여섯 남매가 있지만, 어머니는 혼자 산다.



"늙으면 공기 좋은 데 사는 게 최고지"


어머니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우리끼리 내뱉은 이 말은, 그래서 회피성 발언일 것이다. 도시의 삶을 포기하고 시골에 내려와 살 수 있는 형제는 아무도 없었다. 가끔씩 돌아가면서 내려와 어머니께 용돈을 드리고, 청소를 해 드리고 밭 모종을 심어드리는 정도가 우리가 하는 일의 전부였다. 이따금 들르는 독거노인 도우미와 어머니가 키우고 있는 고양이가 어머니의 외로움을 덜어드리는 역할을 수행할 뿐이었다.


어머니가 돌봐주는 길냥이들


어머니는 말이 더 많아져 있었다. 오랜 시간의 외로움을 버티어내던 어머니는, 무뚝뚝한 막내딸이지만 당신의 말을 들어줄 사람이 있다는 것이 좋은 것 같았다. '미스터 트롯'에 흠뻑 빠져 살았다는 어머니는, 거의 임영웅 씨의 사생팬 수준이 되어 있었다. 나이는 몇 살이고, 어렸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며, 어떤 과정을 거쳐 트로트 가수의 꿈을 이루었는지... 지난번에 들었던 레퍼토리가 이번에도 똑같이 반복되고 있었지만, 어머니는 여전히 처음인 것처럼 들떠 있었다.




스르르 잠이 왔다. 새벽에 집에서 나왔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처음에는 열심히 맞장구를 쳐 주던 나의 열의가 사그라져버리자 지루함이 몰려왔기 때문이다. 미스터 트롯에 사실 나는 관심이 없었다. 올라버린 집값과 늘 빠듯한 생활비와 두 아이의 대학 등록금과 이제는 은퇴를 준비해야 한다는 조바심이 내 관심의 전부였다. 나의 리액션은 점점 건성이 되어 가다가 결국 나는 선잠이 들어버렸다. 잠시 후 눈을 떴을 때는 어머니도 주무시고 계셨고, 깨어있는 것은 푸른빛을 내뿜고 있는 TV 뿐이었다.







언젠가부터 시골을 떠나는 그 순간에 나는  마음이 편해지고 있었다. 이상했다. 분명히 몇 년까지만 해도 나는 어머니를 한동안 보지 못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려 콧물을 훌쩍거리며 시골을 떠났었다. 편도 4시간이나 걸리기 때문에 어머니 집을 자주 왕래할 수 없다는 생각에 가슴이 미어졌으며 이렇게 먼 곳으로 정착을 해서 어머니만 남겨 놓고 돌아가신 아버지를 원망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알게 되었다. 내가 시골을 점점 부담스럽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시골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내 능력 밖의 상황이 존재하는 곳이라는 것을. 시골 강아지들의 짧은 목줄을 억지로 끊어 줄 수 없듯이, 늙으신 어머니를 도시로 모셔올 형편이 되지 않는 나는, 이제는 시골에서 의무감과 무기력함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을. 그래서 차라리 적당한 이기심과 무관심이 허용되는 도시의 삶이 편해졌다는 것을. 그래서 도망치듯 도시로 회귀하고 있다는 것을.





꼬불꼬불한 시골길을 벗어나자 내 머리 위로 익숙한 팻말이 지나갔다. '여기까지가 봉화군입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군청 공무원 누군가가 의례적인 배웅 인사로 적어 놓은 그 글이 나에게는 이렇게 보였다.



 '당신은 지금 시골을 떠나고 있습니다. 이제 그리움, 동정심, 의무감 따위는 잊으십시오...' 



그 팻말은 나에게 이제부터 이곳을 잊고 적당히 도시의 삶 스며들어도 된다고 말해 주고 있었다. 이제 한동안 시골에 내려와야 한다는 부담감에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었다.  월차를 내서 내려왔고 용돈도 두둑이 드렸으니 할 만큼 했으므로 이곳을 이제는 적당히 외면해도 그리 나쁜 것은 아니라고 그렇게 그 팻말은 나를 내려다보며 속삭였다.



팻말이 멀어지자 고속도로가 나왔다, 나는 가벼운 음악을 틀었다. 그리고 그렇게 시골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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