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꺼낸다는 것

<핵개인사회> 28화

by 신 작가 수달샘

그날 밤,

집에는

TV 소리가

없었다.


익숙하게 흐르던 소리가

사라지자
공간이 먼저

비어버렸다.


미라는

거실에 있었다.


서아는 방문을 닫지 않은 채

책상에 앉아 있었다.


윤호는

부엌에서

컵을 씻다가

손을 멈췄다.


물소리가 끊기자
말하지 않은 것들이

더 또렷해졌다.


이제는 알고 있었다.
오늘은 말을

하지 않으면
이 집이

그 말을

대신해 버릴 거라는 걸.


말하지 않은 문장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저 다른 곳으로

흘러갈 뿐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누군가의 입을 빌려
다시 돌아온다.


“그거, 내가 쓴 문장이야.”


윤호가 입을 열었다.
말은 생각보다 작았다.


설명은 덧붙이지 않았다.
변명도 없었다.


잠깐의 정적.

미라가 먼저 말했다.

“알고 있었어.”


놀라움도
책망도 없는 목소리였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을
그저 확인하는 말처럼 들렸다.


“서아도 봤어.”


윤호는 시선을 옮겼다.
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 짧은 대답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말하고 있었다.


윤호는 숨을 깊게 들이켰다.

“그 말이…”

잠깐 멈췄다.


“너희를 설명하는 것처럼 보일까 봐.”


그제야 자신의 마음을 꺼냈다.

말하지 않았던 이유가 아니라


말하지 못했던 이유였다.


두려움이었다.

미라는 잠시 윤호를 바라봤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설명하지 않아도 돼.”

윤호는 그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는 이미 우리 방식으로 살고 있어.”

미라는 이어 말했다.


“누군가가 그걸 정리해서 말한다고 해서
달라지지는 않아.”


그 말은 위로처럼 들리면서도
선을 긋는 말이었다.


우리의 삶은
우리 안에 있다는 선언 같았다.


그때, 서아가 입을 열었다.

“근데…”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향했다.

“아빠가 아무 말 안 하면
다른 사람들이 먼저 말해.”


짧은 문장이었다.


하지만 그 말은
이 집의 침묵이 이미 밖으로 흘러갔다는 걸
정확하게 짚고 있었다.


말하지 않는 사이에도
누군가는 우리를 해석한다.


그리고 그 해석은

생각보다 빠르게 퍼진다.


윤호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꺼내는 건
무언가를 통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를
넘겨주지 않기 위한 선택일지도 모른다.


그날 밤, 윤호는 보고서를 쓰지 않았다.


대신 식탁에 앉아

컵을 하나 더 꺼냈다.


세 사람은 같은 공간에
조금 더 머물렀다.


아무 결론도 내리지 않았고
아무 합의도 하지 않았다.


그저
말이 다시 이 집 안에

머물 수 있도록
조금의 자리를

내어주었다.


아마 우리는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침묵이
가장 안전한 선택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지 않아도
이야기는 계속된다는 것을.


그리고 결국
누군가의 말이 아니라


우리의 말로

남겨야 한다는 것을.


✍️ 작가 메모


침묵은
결코 중립이 아니다.

매거진의 이전글누군가의 말이 된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