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먼저 혼난 날
그날,
혼난 건
아이가 아니라
나였다.
상담실 의자는
생각보다 낮았고,
탁자는
이상하게 넓었다.
그 자리에 앉는 순간,
나는
말을 듣는 사람이 아니라
설명해야 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지금 상황은
어떻게 보고 계신가요?”
질문은
차분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분명한 기대가 있었다.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어야 한다는
기대였다.
나는
잠시 말을 고르다
사실에 가장 가까운 말만
남겼다.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 말은
항상 충분하지 않다.
지켜본다는 말에는
눈에 보이는 결과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말은
종종
아무것도 하지 않는 말처럼
들린다.
“아직
변화는 없나요?”
“개입은
하셨고요?”
질문은
계속 이어졌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속으로는
내가 선택한 하루들을
떠올렸다.
아이를
앞서 끌어당기지 않겠다는
결정.
설득보다
기다림을 택하겠다는
선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지켜낸 하루들.
그 모든 것은
말로 설명하기엔
너무 느린 일이었다.
“조금 더
보려고 합니다.”
나는
그렇게 말했다.
확신이 있어서라기보다
그 선택을
지금은
바꾸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상담실을
나오는 길에
문득
생각이 들었다.
이 구조에서는
아이보다
어른이
먼저 흔들린다는 것.
아이의 변화는
늘 요구되지만,
어른의 기다림은
항상
설명의 대상이 된다.
기다린다는 선택은
언제나
근거를 요구받는다.
교실로 돌아오니
아이는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연필을 쥐고
종이를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그날의 혼남이
완전히 헛된 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아이의 하루는
어른의 판단보다
훨씬
조용하게 흐른다.
눈에 띄지 않게,
그러나
분명하게.
어른이
먼저 혼나는 날은
불편하다.
하지만
그 불편함을
감당하지 않으면
아이에게
선택권은
남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대한민국 초등교사다.
아이를 대신해
어른의 질문을
먼저 견디는 사람으로
오늘도
이 자리에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