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미디 같았던 나의 결혼식, 와장창 깨진 결혼식의 로망
스피디한 결혼식 준비
유야무야 연애하며 1년의 시간이 흐르는 중에 우리는 점점 결혼이라는 문을 향해 가고 있었다.
당시 주말마다 청주와 인천을 오가는 장거리 운전에 지친 그는 최대한 빨리 결혼을 하고 싶어 했고,
나 또한 그 당시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답답한 친정집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일 많고 사람 관계 복잡하고 어려운 서울을 벗어나 새로운 환경에서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여름휴가로 일주일간 그가 인천에 왔지만 일이 너무 많아서 제대로 데이트도 못할 때였다.
그가 시간이 별로 없으니 평소 마음에 들었던 결혼식장을 어머니와 한번 둘러보겠다고 했다.
나도 전에 가본 적 있는 결혼식장이었는데 나이트클럽을 개조한 결혼식장이라 신기하게 지붕이 열리는 곳이었다.
어머니와 식장을 둘러본 그는 위치도 괜찮고 식장도 예쁘고 음식 맛도 괜찮다며 덜컥 계약을 하고 왔다.
상견례를 하기도 전에 결혼식장 예약부터 한 것이다. 게다가 결혼식의 주인인 신부가 식장을 보기도 전에 계약이라니..
지금 생각해 보면 진짜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지만 매일 12시까지 야근에 더 생각할 정신이 없었던 것 같다.
아빠도 보통 결혼식 날짜는 신부 측에서 잡는데 이미 상견례 때부터 날짜와 식장을 잡아오는 경우가 어딨냐며 서운해하셨다.
그렇게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결혼식장을 예약하고 나니 그 이후의 과정들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8월 초에 결혼식장 예약을 하고 8월 말에 상견례를 하고 11월에 결혼. 지금 생각해 보면 결혼이라는 인생 최대 중대사를 어찌 그리 빨리 처리(?)했나 싶다. 사실 나는 11월에 결혼하고 싶지 않았다. 기념일들에 의미 부여를 많이 하는 나는 내 생일이 있는 11월은 피하고 싶었다. 무엇을 주고받아서가 아니라 기념일을 챙기면서 더 사랑하고 행복한 특별한 하루를 보내고 싶어서였다. 예정되어 있는 결혼식 날짜가 내 생일과 단 5일 차이라 왠지 매년 두 기념일을 하나로 퉁칠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그는 두 기념일 모두 잘 챙길 테니 걱정 말라며 나를 안심시키고 밀어붙였다. 하지만 역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기념일에 별다른 의미 부여를 하지 않는 그에게는 생일도 결혼기념일도 매일 반복되는 똑같은 하루일 뿐.
날짜부터 내 의사대로 결정한 결혼식이 아니다 보니 이후 결혼식 준비과정도 쉽지 않았다.
지금은 나일론 크리스천이지만 결혼하기 전만 해도 교회에서 반주도 하고 교사도 할 정도로 나름 열심히 교회를 다녔었다. 주례만큼은 꼭 내가 존경하는, 나를 잘 아시는 분께 부탁드리고 싶었다. 그래서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나를 봐오신 다니던 교회 목사님께 부탁드리고 싶었는데 교회에 대해 반감이 있으신 시부모님의 반대가 심했다. 결국 우리 결혼식의 주례는 우리를 잘 알지 못하는 시어머니의 지인이 맡게 되셨다.
주례를 처음 하시는지 엄청 긴장하셔서 순서를 건너뛰기도 하시고 또 주례사가 너무 길어 신랑도 나도 언제 끝나는지 주례사 원고만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는 애교. 나의 결혼식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시어머니의 축가였다.
여느 결혼식처럼 사실 나도 그가 축가를 불러주길 바랐다. 비록 고음불가의 음치라 할지라도 그 순간 마음을 다해 불러준다면 평생 우리의 인생에 기억될 감동적인 한 장면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로망일 뿐 평소에도 무뚝뚝한 그는 전혀 요지부동이었다.
지인 중에 성악을 공부하던 친구가 흔쾌히 친구들과 축가를 불러주겠다고 해서 한시름 놓고 있었다.
시어머니, 친정엄마와 함께 예물을 보러 가던 차 안에서 축가는 어떻게 하기로 했냐며 시어머니께서 본인이 하고 싶다고 하셨다. 그와 나는 극구 사양했지만 시어머니는 직접 차 안에서 민요 한 구절을 부르시며 친정엄마에게 동의를 구했다. 그렇게 유야무야 시어머니께서 우리 결혼식의 축가를 부르게 되셨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당시에 민요 수업도 듣고 계셨고 가끔 공연도 하신다고 해서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그게 화근이었다. 결혼식의 꽃 축가. 한예종 친구들의 멋진 성악 축가가 끝나고 혼주 속에서 일어나신 어머니는 친구분과 함께 마이크를 잡으셨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긴장하신 시어머니와 친구분은 시작부터 박자를 놓치고 가사를 까먹으셨다. 한 객석에서 웃음이 터져 나오고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나에게까지 들렸다. 동시에 나의 얼굴도 서서히 굳어졌다. 간신히 노래를 마치신 시어머니는 감정이 복받치셨는지 울먹이시면서 우리에게 둘이 잘 살라고 하셨다. 이를 본 친구들은 아직도 나를 만나면 놀린다. 시어머니 잘 계시냐고 축가 때 영화 올가미 찍는 줄 알았다고
우리의 결혼을 축하해 주고 싶었던 시어머니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 당시 나의 심정은 진짜 다시 결혼하고 싶었다. 오랫동안 꿈꿔왔던 나의 행복한 결혼식의 로망은 그렇게 와 창창 깨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