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여름에서 가을에 기록
이 글은 여성건축인 매거진『SOFA 5 - 혼자이지 않은 건축: 돌봄을 돌아봄』에 기고한 내용을 재편집한 버전입니다. 원문은 해당 매거진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사업관리본부 최차장1)의 근황
하루라도 PF(Project Financing) 위기라는 말을 안 들으면 서운했던 시기에 조직 개편이 있었다. 성적이 떨어졌을 때 책상 정리를 다시 하면 좀 나을까 싶어 방을 뒤집으며 정리하듯, 회사에서도 실적이 안 좋다 싶으면 기존 조직 구조를 정리하곤 하니까. 이번 개편은 회사 초기화 같았다. 나 역시 새로운 본부에 배치되었다.
내가 원래 속했던 본부 이름에는 ‘개발’이 들어갔는데 새로운 본부 이름에는 ‘관리’가 들어갔다. ‘부동산 시장이 어려울수록 새로운 개발보다 보유 중인 자산이나 잘 관리하는 게 낫다.‘라며 엄중한 말투로 이야기하는 사람이었던 나는 막상 그 ‘관리’가 내 명함에 새겨지니 시작부터 지겨워 피하고 싶었다. 힘든 상황 속에서도 나는 뭔가 재밌어 보이는 ‘개발’ 팀에 계속 있고 싶었다. 내 의사와 관계없이 자리도 바뀌고 조직도 바뀌었다. 새로운 관리본부 팀원들과 함께 첫 본부 미팅을 위해 회의실에 둘러앉았다. 어색한 적막을 깨는 본부장의 첫 문장은 “앞으로 모두 스페셜리스트2)라고 생각하지 말고 제너럴리스트3)라고 생각하고 일했으면 좋겠다.”였다.
나는 커리어 대부분을 제너럴리스트 성격으로 채워온 사람이 하는 말을 내심 의심하며 듣는 편이다. 어떤 분야를 깊게 해 보지 않고 관리만 하는 사람이라 생각해서 그렇다. 그리고 스페셜리스트로 평생 살아온 사람에겐 내심 질린다. 누군가 ‘내가 이 바닥 20년이라 잘 아는데…’라고 말을 시작한다면 나도 모르게 시계를 보게 된다. 그러니까 한때 유행했던 T자형 인간*그림참고가 되라며 제너럴 리스트에게 스페셜리스트가 되라고 하거나, 스페셜리스트에게 제너럴리스트가 되라고 했으면 쉽게 알아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미 제너럴리스트 집합체인 시행사 직원들에게 이게 무슨 당부인지 김이 샜다. 때로 깊은 생각은 통장에 꽂히는 월급을 멈추게 할 수 있으니 본부장님이 시키신 대로 제너럴리스트로 세팅 값을 맞추고 자세를 고쳐 앉아 앞으로 시키실 일을 경청했다. 새로 배정된 관리 본부의 주된 업무는 ‘착공 이후 단계 사업관리를 하는 일’이라고 했다.
그러나 몇 달 지난 현재, 정해진 대로 착공 이후 일만을 다루지 는 않는다. 여러 프로젝트가 출발점이 다른 상태에서 맞물려 돌아가기 때문에 사실 닥치는 대로 이 부분 저 부분을 다룬다. 위 그림처럼 나눴다고 해서 착공 후 업무만 맡게 될 줄 알았던 건 아니니 괜찮다. 그보다 회사에서 사용한 조직의 형태를 나누는 방법이 흥미로웠다. 시행사에 입사한 뒤로 지금까지 내가 맡은 포지션이나 하는 일을 명확하게 규정하기 어려웠다. 프로젝트마다 관여하는 부분이 달랐고, 하루하루 주어지는 일을 그저 투두리스트에서 삭 제하는 방식으로 시간을 보냈기에 조직 구성에 흥미를 느낀 것 같다.
내가 하는 일은 설계 진행 시기엔 디자인과 인허가 과정을 관리하고, 매달 자금집행 시기엔 비용을 검토하는 정도의 큰 틀 정도가 있었다. 그 외에는 간간이 들춰봤다가 발견한 다양한 문제들의 해결 방안을 생각하는 일들이 있었다. 간략한 단어보다는 이렇게 문 장으로 설명해야 하는 다소 불규칙하고 규정하기 애매한 일을 처 리하며 3년이 흘렀다. 그러다 보니 회사에서도 이렇게 프로세스별로 조직을 나누면서, 명확하지 않은 업과 주변의 일을 규정짓는 많은 고민을 했을 거란 생각을 했다. 이 구조를 활용해서 나도 정리를 해보고 싶어졌다.
더불어 시행사에서 3년을 보낸 현시점도 꽤 유용하다. 지금이 건축설계업에서 부동산 개발사업에 진입한 지 얼마 안 되어 내 일 을 타인의 일처럼 한 발 떨어져서 바라볼 감각이 아직 남은 시기라 고 나름 정의 중인 시기다. 그래서 현시점에 회사에서 만든 프로세 스 기준으로 나눈 조직 구조를 활용하여 정형화하기 어려운 조직 구조 속 개발사업이 만드는 건물과 그 일을 돌보는 나를 기록해 보았다.
1) 최차장은 현재 시행사(Developer. 부동산 개발사업을 시행할 때, 사업 전 과정을 책임 지고 관리하는 회사)에서 약 3년 정도 개발사업 실무를 맡고 있다. 그전에는 약 10년 정도 건축설계와 건축 컨설팅 업무를 해왔다. 시행사에 발을 들이게 된 건 건축과 금융, 마케팅 등 다양한 것을 모두 다루고 싶은 야심이었다. 그러나 얼굴 어딘가에 건축설계라고 써놨는 지, 회사는 건물이 설계되고 지어지는 과정을 최차장에게 맡긴다. 은근히 상사 말을 잘 듣 는 스타일이기도 하고 월급을 받기 위해 열심히 일한다. 다행히 요즘 야근은 하지 않는다. 건축과를 졸업하고 약 10년간의 건축설계 여정을 SOFA4호에 게재했다. 5호에는 시행사 를 다녔던 3년 동안 보고 겪은 개발사업 속 건축과 본인 사이 일을 기록하며 이 책을 본인 의 커리어 정리용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 같다.
2) 스페셜리스트: 특정분야에 깊이 있는 전문지식을 가진 전문가
3) 제너럴리스트: 여러분야에 폭 넓은 지식을 가진 유연한 전문가
4) T자형인간: 1990년 쯤 맥킨지와 같은 컨설팅 회사에서 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다양한 프로젝트에서 성공을 거두는 데 필요한 인재로 설명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