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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텔라 Jul 09. 2021

아들한테 지는날, 내 죽는 날

승부근성은 유전된다

'엄마 이제 나한테 달리기 지실걸요?'

'하. 놔. 진짜 어이가 없네. 장난치니? 엄마 아직 팔팔이야. 너 그러지 말고 붙어!

아들. 근데 이제 너 좀 많이 컸고 야구선수니까 엄마는 한발 뒤에서 시작하지 않아도 되지?'

'에이.. 시작 전부터 약한 모습이시네'

'조용히 하고 준비나 해, 엄마 안 봐준다.

준비. 시.... 시.......  '작'이라고 하면 뛰는 거다'

'아... 아빠!!!! 엄마 또 장난만 쳐요!!  아빠가 시작 신호해주세요.'


가슴이 떨려온다. 아 오늘 이럴 줄 알았으면 밑창이 더 가벼운 신발 신고 올걸. 목적지가 어디라고? 좋아!!

평화롭게 저녁 외식을 향해 여섯 식구가 동네를 걷다 말고, 아들의 훅 들어온 자극성 도전 발언, 

하아.. 이게 뭐라고 이토록 심장이 두근거린다.

그때 나를 온통 감싸고 있던 지배적인 생각은 딱 하나 '지고 싶지 않다!'였다.




'아빠 이제 나한테 안될걸?'

'허, 참 나..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아빠 늙었다고 무시하냐..'

아빠, 엄마, 할머니, 이모 이모부 얘들아. 우리 엄마랑 할아버지랑 달리기 내기한대!!

(잠시 후.)


 퍽 으악~ 꺅!! 압.! 철퍼덕........ 우루루루.... 아들, 괜찮아? 

으앙!!!!   우에에엥~~~ 아이고 이런, 많이 다쳤니?


우리 집 셋째가 넘어졌다. 달리기도 안 하던 이 애가 왜?

출발선에 서서 '우리 엄마, 이겨라! 엄마 이겨라! 를 열심히 외치던 이 아이' 어떤 일이 있기에 넘어졌고, 넘어진 것보다 더 서러운 한이 서린 울음소리로 공원을 떠내려가라 채우고 있는 걸까. 

사건의 경위는 다시 할아버지와 엄마의 달리기 스타트 장면, 도착선에는 할머니가 서 있었고. 출발선과 도착점 사이 꽤 많은 관중 (우리 집은 4남매, 우리 형제 아이들만 11명인 대가족이다) 들이 산발적으로 서 있었다. 그런데 '공정'이 삶의 중요한 잣대인 셋째의 눈엔 할머니의 출발 신호가 마저 떨어지기도 전에 할아버지가 먼저 출발했다는 것을 소리 높여 알려야 했고 이미 진검승부가 시작된 현장에서는 보이는 게 없는 부녀의 달리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아이가 아무리 소리 높여 

'할아버지 신호전에 출발했어요. 다시 해야 해요!! 불공평하다고요!!!'를 외쳐대도 아랑곳하지 않는 할아버지를 제지하려 경기장 중간을 아이가 막아섰고 급한 할아버지는 그 손주를 밀치면서 계속 달리기를 이어나간 것이다. 할아버지의 속도감에 가로막고 있던 작은 몸이 밀침 당하면서 나가떨어진 아이는 억울해 죽겠다며 고래고래 울고불고 난리가 한바탕 벌어졌다.

가족 친선경기에서 시작해서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공원에서 소리 높여 우는 아이를 언니 형부가 겨우 달래주었고, 우리 어른들끼리는 이 현장에 서서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어른들은 달달한 커피로, 아이들에겐 아이스크림을 물려주면서 진정시켰다. 할아버지에게 그랬냐는 질문에 두 번 망설이지 않는 대답 "지기 싫었다"



사람은 잘 안 바뀐다. 타고난 성향대로 살다가 다시 타고난 곳으로 돌아가는 게 인생이다. 

다만 인생에 최선이라고 함은 나의 타고난 성향이 무엇인지 잘 알고, 이 중 살릴 것을 잘 살리고 모자란 부분은 좀 채워가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거지, 나를 다른 사람으로 바꿀 수는 없다. 아빠의 네 자식 중에 가장 아빠와 많이 대척점에 서 있으면서도 가장 많이 닮았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지점 바로 이놈의 '승부근성'이다.

타고난 것이 잘 안 바뀌지만 일생일대로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인생에 몇 번은 찾아오는데 바로 출산과 자식농사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 집 '승부근성 유전자'는 자식을 낳아도 전혀 사그라들지 않는다. 


자식에게는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데 아빠와 나에게는 '지는 것은 그냥 지는 것이다'가 통한다. 그래서 지고 싶지 않다. 지면 내가 사라질 것처럼 작은 승부에 세상이 주목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이김'에 집착하는 이유가 도대체 뭘까?


사람마다 자존심 주머니가 다 있는데 이 모양과 크기는 다 다른 것 같다.

나의 것은 길쭉하고 깊게 생겼고, 나와 같이 사는 사람 것은 얇아 보이지만 끝을 알 수 없는 정도로 넓다래 도 보인다. 나의 자존심 주머니는 아빠의 그것과 많이 닮았다. 깊고도 깊어 채워도 채워도 끝이 없는 자아가 있어 오랜 시간 애달픈 노력과 가까운 사람들의 조력이 있어야지만 '내가 겨우 답게' 있다.

얇고 넓은 그의 것은 그 광활함이 넓을수록 아무리 물을 부어도 물이 제자리인 것 같다. 깊지만 좁았던 내 건 그래도 붓고 있는 동안 채워짐은 확연하게 눈에 보이긴 했는데.


아빠와 나는 기다랗고 좁은 자존심 주머니를 채우는데 급급한 사람이고, 이 주머니를 채우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경쟁에서 지지 않는' 방법을 실천해 나갔다. 둘 다 사회생활에 적합한 캐릭터는 아니지만, 이거다 싶으면 앞뒤 없이 몰입하는 성향도 비슷하다. 그는 17살에 두메산골에서 탈출해 시장 바닥 생활부터 시작해 지금의 사업을 일으켰다. 이제는 제법 큰 회사의 회장님이 되셨고 쓰면 대하소설 몇 권이 나올 삶을 살았지만 여전히 그 주머니는 비어 보인다. 돈은 가졌지만 자신의 텅 빈 주머니는 돈만으로 채우는 것이 아님을 모르는 외롭고 쓸쓸해 보이는 칠순 노인. 그 정정하던 아빠의 현주소다. 물론 지금도 알록달록 아트프린팅의 청바지에 흰색 재킷을 받쳐 입고 다니는 멋쟁이 할아버지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라이딩 복장으로 자전거에 오르면 그 나이를 가늠할 수 없애 씽씽 달리는 멋진 오빠지만. 그의 얼굴만큼 시커먼 속을 보면서도 따스하게 손 내밀 줄 모르는 나도 참 그렇다.  그의 막내딸인 나는 9살부터 시작된 존재로서의 고민을 끝내 '글쓰기'와 '네 아이의 출산'에서 찾아냈고 불혹이 넘어서야 '글쓰기'라는 사회 무대에 겨우 발을 들여놓았다. 그리고 자기 아비처럼 몸에 집착한다. 작년에 바디 프로필 찍기에 벨리댄스, 골프, 스케이트, 암벽등반, 태보, 줌바, 방송댄스, 수영, 어제 등록한 플랑잉요가까지. 정말 왜 이러나 싶을 만큼 뭔가 배울 거리 발산할 거리를 찾아다닌다. 특히 몸을 불사 지르는 류의 것을 주종으로.



조직생활을 할 수 없는, 사회성이 떨어지는 부녀는 그렇게 각자의 자존심 주머니를 닮은 인생길을 개척해나가느라 힘든 인생을 살아왔다. '나는 아빠와 달라'를 외치며 사회 속에 뛰어들었지만 나를 가져다 안착시킬 수 있다 했던 희망은 매번 어디 조직에서건 허망하게 실패로 끝날 때마다 내 가진 성향이 참 싫었다.  나는 왜 때문에 이렇게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어려울까? 속으론 그 사람에 대해 별의 별것을 다 신경 쓰면서도 겉으로는 한 발자국도 상대에게 먼저 다가서지 못하는 나를 볼 때 '타고난 것'을 향한 끝없는 도전을 그만두고 싶다는 마음이 치솟아 올랐다. 끝내 그 무엇도 그만두지 못해 이렇게 살고 있지만. 아빠처럼 칠순까지 저렇게 사는 게 나의 예정된 미래 모습인 건가.


다행히 세상은 어떤 부분에서는 공평하다 할만하다.  다행해 집집마다 세대마다 '이런 근성의 분자'들이 하나씩 골고루 배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한집에 이런 분자 둘만 있어도 그 집은 멀쩡하지 못할 거라는 결혼으로 제2의 가족이 된 누군가에 발언에 우리 가족 전원이 숙연해진다. 아빠가 네 자식 중엔 3번인 내가 그렇고 우리 집엔 큰아들이 그렇다. 언니네는 큰딸이 그렇고 일곱 삼촌 고모네 집안에도 한 두 명씩 꼭 있다.  그 분자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모두 지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고, 기회만 있으면 서로 붙어보려고 한다는 것이다. 사회생활을 할 때도 자신이 확실하게 존재감을 표출할 수 있는 영역만 구축해서 '나만의 아방궁'을 만드는 형태의 관계성만 맺고 그 안에서 좁고 기다란 주머니를 열정적으로 채워간다.



서두에 밝힌 아들과의 달리기 시합에서는 내가 이겼다. 월등하게 이겼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내 소망일 뿐 '겨우겨우' '간발의 차'로 이긴 것이 현실이다. 그 달리기 시합이 끝난 후 넓고 얕은 주머니를 가지고 사는 나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에게 유언하듯 이렇게 말했다. 

"아들이랑 달리기 지는 날, 당신은 아내를 잃는 날인 줄로 알아'. 

일찍 죽기 싫다. 여태 고생하고 살았고, 이제 좀 나답게 살아가려는 참인데 억울하다. 그래서 난 오늘도 새벽 글과 덜 새벽 글 사이에 푸시업과 플랭크를 했고 글벗들에게도 하게 종용, 압박한다. 그리고 오늘부터 새로 배우는 운동을 하러 간다. 참고로 나에게 달리기 도전장을 내민 아들은 초등부 야구선수다. 아.. 이 아이에게만큼은 지지 않겠다 확고한 목적의 엄마의 운동, 전의가 활활 타오르는 새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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