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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텔라 Jul 28. 2021

원하는 끝에는 원하는게 없다.

일상의 힘, 최고의 인생 시나리오



아무리 새벽마다 소원노트로 다잡아도 잘 안된다.

"망각이 최고의 적이다."


인생이 무엇인지 한참 스스로에게 묻던 시절 희미한 해결책이 보이고 그것을 향해 거의 다 왔다 싶었던 시절.

마지막 결론처럼 나에게 다가왔던 문장이다


결국 중요한것은 본질이고, 그에 따른 실천일 뿐인데  우리는 너무나 쉽게 이것을 잊어버리고 또 찾아 헤매이는 삶을 반복하고 있다.


어제 새벽글쓰기 주제는 큰아이의 난독증이었다. 나의 이야기속의 예상 스토리는 '이제야 딸의 아픔을 이해한 엄마의 반성과 그에 따른 실천'이기를 바랬다.


내가 나에게 간절히 바랬다.


그런데 여전히 난 나였고, 전개는 평소와 다름없이 비슷하게 흘러간다. 얼마나 참았다가 화가 터져나오느냐에서 '얼마나'의 유예가 조금 길어졌다 뿐, 나는 이런 점에서 발전이 없음을 자책하고 있었다.


그런데 언제 그랬냐는듯, 한없이 밝게 웃는 아이가 나에게 화답으로 '엄마가 나에게 가르쳐주려고 애쓰는 태도가 뭔지 이제 알것 같아요' 하는 딸을 보며 생각을 고쳐먹기로했다. 화를 반복해서 내면서 이런 내가 지겹다 자책하는 대신 '아이가 알겠다고 하니 믿어주겠다. 온전히 믿으면 화는 올라오지 않는다.  고로 '자식을 믿겠다'는 내 자신과의 약속을 망각하지 않겠노라고, 아니 망각하더라도 이내 빨리 제자리를 찾아오겠노라고 다짐하는 편이 낫다.



운동을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어디가서 거하게 정식으로 할 수 있는 상황이 못 되더라도 집에서 1분 플랭크라도 해야 한다고, 하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이 다짐은 그날 하루를 마치고 잠자리를 들때가 되서야 다시 생각난다.


그럼 이 경우 무엇이 잘못된건가? 첫째로 잊어버린게 잘못한거다. 운동을 하기로 한 결심, 그 자체를 잊었다는 것, 그것이 가장 큰 문제다. 망각에는 솔루션이 없다. 둘째, 기억은 했는데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면 그건 그만큼 절실하지 않은거다. 절실하게 필요하다면 떠올랐을때 실천으로 이어 져야 한다. 꼭 하고 싶은데 잘 안되면 '아 말자'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해낼 수 있지?' 시스템을 만들고 습관으로 나를 묶어둘 방법을 자연스럽게 다시 찾게 된다. 그렇게 절실한 것만 내 시작마찰력과 싸울 필요가 없는 습관시스템이 되어 나에게 남는다. 무엇을 남길지 그건 내가 정해야 하지만 그 무엇을 정하든 시스템과 습관없이는 실패로 가는 건 시간문제다.





인류 탄생 이래 가장 효율적이고 불패의 신화를 써가고 있는 것은 '자본주의 시스템'이다. 돈과 연결되면 우리는 모두 절로 절실해지고 또 명확해진다. 왜나햐면 물질은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사실 문제는 세상 모든 중요한 본질적인 것들은 모두 '해도그만, 안해도 그만'이라는 카테고리안에 묶여있다는 사실이다.


육아에서 아이들 성적은 '자본주의의 표상인 돈'과 같다고 생각한다. 성적이나 현주소 파악이 제일 쉬운것은 그 아이의 현재 학습적인 위치, 즉 자본주의에서 말하자면 '얼마의 자신을 가지고 있으며 연봉은 얼마인지'에 해당된다.

렇다 '꿈을 가지고 살기' '인성바르게' '화내지 않고 키우기' '세상에 쓰임이 있는 사람되기'  '인생이 무엇인지 알려고 애쓰기' 등은 그 누구도 크게 관심을 두지  않은 옵션영역이다. 이게 바로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 즉 삶의 본질을 말하는 영역이다.


글쓰기, 새벽기상, 운동, 가족, 좋은 사람들과의 연대 이 모든 것은 사실 절실한 현실문제 자본주의 와는 격을 달리하는 문제들이다. 글쓰기, 책쓰기는 내가 해보니 오십견 주사값도 안 나오는 가성비제로의 행위이고 운동한다고 누가 나에게 연봉주지 않으며 아이넷 낳았다고 국가에서 뭐하나 제대로 해주는 것도 없는 현실이다. 내가 한 모든 짓은 참 '돈 안되는 행위'의 일색이다.


하면 더 좋지만, 안해도 그만일 것같은 일들.


"너에게 절실한게 뭔데?"


돈을 버는 일만이 살아남고, 이것과 연결된 것만 생동감 있게 살아 숨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먹고, 입고, 자고 의식주와 직결된 현대사회의 가치는 '자본'이다. 어느덧 못먹고 못입던 시절은 한참을 비켜갔지만 여전히 우리는 경제적결핍을 느낀다.





문득 생각해본다. 그냥 아무것도 하기 싫을 때, 글도 쓰기 싫고 아이들에게 1대4 몸빵하며 애쓰기도 싫고, 이 생이 빨리 영화한편처럼 훅 지나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 "따박따박 월세 나오는 커다란 빌딩이나 하나 있다면..... 휴.."


있다면 정말 좋을 것 같다. 근데 지금 이 상태에서 내일 갑자기 내 명의로 그런 빌딩이 생긴다면 나는 일단 내 손으로 해왔던 겨우 이어가는 집밥에 손을 놓겠지?, 아이들과 1대1로 어떻게든 좀더 나은 세상을 보여주려는 노력을 게을리할것만 같다.


4명의 아이들이 학원도 한곳 안가고 모두 함께 삼복더위에 한집에서 에어컨아래 미어캣처럼 모여 저절로는 오지 않을 신나는 일을 기다리며 그렇게 산다. 이 심심함에 몸서리치는 아이들, 한참 배워야 하기도, 실컷 놀기도 해야할  나이들에게  엄마는 두 팔을 걷어붙이고 요가선생님이 된다. 큰 아이에게 다시 무섭기 그지없는 1대1 영어과외쌤이 되었다가 어느 아이의 요청으로 종이접기선생도 자처하다가 때가 되면 식당주인이 된다.  하나 남은 초코간식 쟁탈전에 절대 지지 않는 철없는 동생도 되었다가 사이사이 청소용역업체도 된다. 개 중에 제일 많이 하는 역할은 네 아이의 싸움과 갈등을 중재하는 민간재판소 역할. 그리고 가끔 집밖에서는 관광가이드까지. 바로 어제 코로나라는 현실감각을 세워, 넷중 둘을 뽑아(이때도 합리적인 이유와 순서가 필요하다)  작렬하는 태양을 가르며 '공짜미술관'이란 혜택에 맞춰 그림이라는 막연히 좋은 예술 세상속에 한발이라도 아이와 함께 더 들여놓으려는 노력하는 큐레이터가 되어본다. 그림은 대충보고 에어컨이 빵빵한 곳에 앉아 간식만 먹고 사진만 찍다 왔지만 그래도 아이들은 '미술관에 다녀온 ' 그날의 의미와 미소를 오래 기억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내가 지금 당장 돈이 많다면 이 모든 것들을 얼핏 놓을 것도 같다. 여전히 좋은 엄마이고 싶을테니 아예 놓지는 않겠지만 손쉽게 처리해 버릴수 있는 일들은 돈으로 해결하려 할 것 같다. 천성이 부지런한 사람도 돈 쓸줄 모르는 이도 아니기에 지금 내가 몸으로 막고 있는 이 자본주의의 가장 큰 대척점. 경제적 결핍이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에너지의 원천이 되고 있다.




이건 사실 없는 자의 핑계일 수도 있다.

아이는 경제라는 효율적인 기름칠이 더해지면 지금보다 훨씬 더 잘 클런지도 모른다. 엄마의 빽빽대는 목소리 대신 친절하고 예쁜 전문가선생님의 지도편달이 아이들의 신체발달에 좋을 것이고, 영양상태가 고루 갖춰진 누군가가 준비해주는 음식이  잔뜩 예민해져서 인상찌푸리고 만든 엄마밥보다 맛있을 가능성이 높다. 집에서 서로 전쟁을 벌이는 것보다 학원에 가서 할 공부 잘 마치고 집에서 서로 웃는 낯만 보면 부모자식사이가 훨씬 더 좋아질 수도 있고. 실제로 이웃엄마들은 입을 모아 그렇다고도 하고.



그런데,  거기에 없는자의 합리화를 조금더 해보자면 '주도성과, 독립성이 주는 기쁨'은 지금보다 덜 할 것임은 확신한다. 삶은 에너지덩어리인데 지금의 우리집 안에 흐르는 에너지 기운보다 그 합은 더 줄어들 것이고 그 덜어진 양만큼 우리 가족의 스토리는 덜 재미있어 질 것이 분명하다.


나는 스토리텔러이고 작가다. 스토리가 삶에서 제일 중요한 사람인거다.

결핍이 사람을 성장하게 하고 없는 것을 하나하나 만들어 가는 과정.  이건 사실 내가 꿈꾸었던 과거가 현실이 된 모습일 수 있다. 철부지 엄마가 아이들과 하루하루 부딪히면서 부둥켜안고 울고웃다 기절하는 그런 '헝그리  노력' 이 만들어내는 진짜 재미있는 인생스토리가 있다고 믿는다. 그 스토리는 확실히 내가 만든 세상이다. 그러니, 과거에도 했듯이 내 미래스토리를 확실하게 쓰면 또 언제고 현실이 되는것 아닐까?


"돈에도 인격이 있다" 라고 한다.

그말의 표면적인 뜻을 받아들였을때는 언뜻 기분이 상했다. 이렇게나 노오력 하고 사는데도 나는 아직 물질적풍요를 받을 인격조차 아니란건가? 그런데 이 화두에 한층만 더 들어가봐도 이 적당한 결핍이 행운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소원요정은, 우주는, 별자리에서 떨어진 나를 여전히 지켜주는 성단들은 내가 별에서 떨어져나와 이 지구에 온 이유를 기억하고 있고 그 처음마음 그대로 나를 많이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인생을 하나의 긴 연극과 시나리오라고 봤을때


가장 재미있는 것은 '편안하게 굴곡없이 매일 누릴것을 다 누리면서 업앤다운 없이 사는 인생일테다.

다양한 에피소드, 어떻게 전개될지 예측이 안되지만 기대가 되는 주인공들의 다양한 삶이 그려진 시나리오가 명품 배우의 연기력으로 빛날때 그 작품에서는 아우라가 생기고 우리는 그것을 '명작'이라 한다. 다양하거나 혹은 깊이가 있거나. 삶의 깊이는 편안함에서는 나오지 않고 고뇌와 번민 그리고 갈등속에서 나온다. 영화나 연극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소가 바로 갈등과 그 갈등의 해결이 중심축이 되는 플롯인 그 이유와 같다.


갈등이 없는 삶을 꿈꾸는가? 갈등과 화해와, 허무와 결의와, 짜증과 해소가, 예민과 평정등이 일상에 진폭을 그리며 삶을 다이나믹할 리듬위에  태우기를 원하는가? 사람은 결국 내 생각의 총합이 그려낸 모습대로 살게 된다면 나는 앞으로도 이 삶이라는 생생한 그것 그 자체를 음미하고 즐기는 삶이고 싶다.



결과지향적인 내가 요즘 내가 원하는 그 끝점, 성취의 결말에 대한 재정의를 쓰고 있다.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한 이유는 '그 결론에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거나 타인에게 좋은 영향력을 주고자 내달린 그 길 끝에는 잠깐의 환호를 끝으로 사람이 사라지는 거란다. 마라톤의 결승점에는 수많은 관중들이 환호하고 있겠지만 선수와 함께 집에 돌아가지는 않는다. 요즘처럼 무관중인 때는 더 결승점은 의미가 없을런지도.




그럼 결승선에 없는 그 사람은 어디가 있냐하니. 같이 인생이라는 긴 마라톤, 생생하게 뛰고 있는 그 과정속에 길고 진하게 함께 공존한다. 물을 챙겨주고 같이 헉헉대고, 포기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손을 내밀고, 어깨를 내어주고 나도 힘들지만 입으로 크게 '화이팅!!' 구호를 외쳐주는 그 동반자들 그들은 나의 결론에 머무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러니 또 계속 재밌는 인생을 살려면 마라톤 결승점에 들어오고 나서 한동안 재충전을 하고나면 그 결론점에서부터 다시 무언가를 꾸려 새로 어딘가로 향하는 과정을 선택할 것인데 지금의 내 길과 그때의 내 길은 뭐가 달라지는 걸까?


좋은 풍경을 보고, 중간에 더 좋아하는 것을 먹을 수 있다면 가는길이 더 풍요롭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내가 직접 내 두발로 걷거나 뛰어야 하는 그 과정은 오롯이 내 몫이다. 풍경과 환경은 보탤 뿐. 꽃길은 험난한 길 사이사이에 만났을때 그 아름다움이 빛난다. 처음부터 끝까지 꽃만 있는 길은 더 이상 꽃길의 의미를 다 하지 못할것이다.





난 감히 '다 가져본 자' 즉 마라톤 결승점에 혹은 산의 정상에 올라본 자가 되어 이렇게 말하고 싶은 거다. '이 길이 최고였어' 라고 말하면 사람들이 와~~~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그곳.


나의 그곳에는 완벽한 부부 그리고 잘큰 사남매, 작가로서의 명망, 부모의전당이라는 멋진 공간과 시스템, 한국과 미국을 연결하는 글벗망, 아무리 퍼다써도 마르지않는 돈우물, 완벽에 가까운 체력과 예술과 풍류를 즐기는 마음을 잊지 않는것까지. 사람과의 동반이 메인 주인공이다.


욕심이 욕심만으로 끝나지 않을 실천의 합을 최대치로 늘려가는 일상을 살아가려 노력. 또 노력한다.


지금이나 다 가진때나 같다면서 왜 굳이 그곳을 향해 힘들게 노력을 하나? 라고 누가 물으면 이렇게 대답 할 것 같다.


등산을 왜 하나? 거기에 정상이 있으니까. 즉 나는 어디론가는 가야할 운명을 타고 났다면 내가 정한 목표의 그 산에 가고 싶으니까.


올라가보고 나서 즉 다 가지고 난 세상에서 이렇게 말하고 싶다. "2021년 무더위와 코로나 속에 사남매와 지지고 볶던 어느 여름 새벽, 스스로를 새벽글시스템이라나 무거운 책임감에 묶어놓고 매일 찾아 헤매던 그 삶의 의미가 살아보니, 정말. 맞.더.라" 이 증언을 내 입으로 하게 되는 날을 만나기 위해서다.


생의 목표와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을 재정의 하고 나니 , 다시 거칠었던 마음자리가 한결 보드라워짐을 느낀다.


이 글이 끝남과 동시에 네아이와의 일상이라는 어택이 들어오겠지만, 거기에서 난 또 망각과의 싸움에서 지고 애들에겐 엄마답지 못하게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해야 할 일이 뻔히 있는것을 알면서 올림픽 채널을 틀어놓고 뒹굴거리다 밥시간이 다 되어 폭팔음처럼 분노의 밥짓기를 하고 운동 가기 싫은 마음을 일으켜 겨우 다녀오고, 나도 모르겠는 내 마음을 남편에게 툴툴 아이들에게 툭툭 던지겠지.


뻔한 일상을 살겠지만 나의 이런 일상은 산의 정상을 향한 길 위에 있으니, 괜찮다.


인생은 등산인데, 누구는 뛸 수는 있겠지만

지치지 않을 재간이 없을 것이고 아무리 세상최고의 부자라해도 세상유능한 점쟁이래도, 대통령이래도 바퀴달린거나 날개달린 물체를 타고 산정상에 갈 수는 없는 법이다.


내 두발, 내 몸뚱이로 직접 가야 만날 수 있는 그 곳

그곳으로 향하는 아름다운 산길에 핀 꽃과 새와 나뭇잎의 반짝임 그리고 사랑스러운 동반자들의 손을 놓치지 않는 그런 일상을 다시 한번 꼭 눌러 다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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