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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텔라 Aug 10. 2021

아무래도 나 좀 우울한 것 같다.

인생의 기본값은 슬픔, 회색빛

보통 나는 아침에 안녕하지 못하다.

평범한 인사 '굿 모닝' '좋은 아침' 에도 괜히 심술이 난다. 뭐가 그렇게 좋은 아침이라는 거야?

그냥 또 하루가 시작되었을 뿐, 내가 내 의지로 하루를 연것도 아니고,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모습으로 내가 태어나서 살고 싶어서 사는 것도 아닌데..


괴테는 자기 자신이 우주에서 지구별로 떨어진 이유가 분명 '내가 원해서'라는데. 정말 나는 우주에서 왔을까? 그 이유를 찾다찾다 가장 지 마음에 드는 이유에서 멈춰섰을 뿐이겠지. 괴테도 하나의 동등한 인간일 뿐이라면 그가 진리의 답을 내어놓거나 그 주장을 증명한 것은 아닐테니까. 증명했다고 그 '과학적인 증거'가 의미하는 바는 클까? 어짜피 지구안에서 벌어지는 일, 과학적이라는 것의 정의자체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인데..  아니면 진짜 하느님이란 존재가 있는걸까? 그가 창조해낸 자녀일까? 아니면 생명체가 진화를 거듭하다 여기까지 온 크게 의미둘 바 없는 살아있는 유기체일뿐인데 굳이 의미를 찾아 우겨 넣으려고 앴는 인류의 답없는 몸부림일까?



나는 솔직히 단 한번도 아침에 눈을  뜨면서 '아~ 오늘도 행복한 하루가 시작됐다' 라는 감정을 느껴본적이 없다. 이런건 드라마에서나 있는 감정인줄 알았는데 남편포함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의 모든 날이 행복하게 잠에서 깨어난단다.  가끔 몸에 컨디션이 안 좋거나 특별한 일이 있는날만 가끔 찌뿌둥하고.

첫째와 막내 아이가 잠에서 깬 모습을 보면 남편말이 맞기도 했다가 셋째의 눈뜨자마자 부리는 짜증섞인 얼굴을 보면 이렇게 사는게 나만은 아닌가도 싶고.

이 비율은 따져서 무엇 하려고..

  

'사람은 왜 태어났을까?' '난 어디에서 왔지?'라는 질문이 당연히 내 안에서 자동 생성되어 누구나 하고 사는 고민인줄 알았다. 아니 그런걸 따져볼 겨를도 없이 내가 눈코입이 있으니 너도 있고 내마음도 있으니 니마음도 있는 정도의 당연함 주머니에 들어있을 그런 삶의 본연에 대한 궁금증이 누구나에게 있는 궁금증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때 받았던 충격, 그런 맥락으로 아침에 진심으로 행복하게 눈뜨는 감정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그것도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매일매일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자못 충격적이다.

그리고 그 기분이 몹시 궁금하고, 꼭 나도 그 경지에 가보고 싶어진다.

문득, 그가 거짓말 한거 아니야? 라는 의심이 들만큼, 아니 의심하고 싶을만큼 내 안에 있는 감정 소용돌이가 이제는 조금 지겹고 버겁다.


저절로, 내 안에 자꾸만 고민과 의구심이 들끓는다. 왜 사는지 왜 살게 됐는지 해결할 수 없는 질문이 계속 용암처럼 마음속에 들끓고 있으니, 머리가 지끈거리고 자주 화가난다. 법륜스님은 '왜 사는지 자꾸 묻지 말고 어떻게 살건지나 생각해라' 하셨다. 우문현답이다. 그래서 오랜세월걸려 겨우겨우 어떻게 살건지는 정했는데, 그 정한 것에도 힘이 생각보다 자주 빠진다. 왜냐면 왜 그걸 해야 하는지 가끔 모르겠기 때문이다.


의지라는 녀석을 불러다가 '어짜피 너는 왜 사는지, 이 생을 끝내기 전엔 알수 없어. 아니 생을 마치고도 모를지도 몰라, 간신히 희망하는 것뿐이지. 그러니 너가 생겨먹을것에서 최대치로 행복할 수 있는 어떤 목표를 정해. 그리고 그것을 향해 하루 순간순간을 즐거며 살아' 라고 내 자신에게 세뇌를 해왔다. 그리고 마침내 현실에서 약간의 성취를 맛봄으로서 그 세뇌는 안착이 되어가나 했다.

아니 되어가고 있는 현재진행형인데, 마음은 그 속도와 같지 않다. 자주 무너지고, 허무하고, 옴짝달싹하기가 싫다. 



 



어제 밤에는 멀쩡하게 남편과 야간데이트를 다녀왔다. 아이들의 입맛에 맞는 저녁을 챙겨주고 안전한 그들의 TV앞 자리매김을 확인한 후 그의 손에 깍지를 끼고 룰루랄라 그토록 가고 싶어 벼르던 선술집에 자리를 잡았다. 둘다 소중하게 저녁운동을 빼고 부부끼리 마음토크를 주제로 저녁배를 아껴두었다가 맛있는 술안주를 세가지나 시켜먹고 연신 웃었다.  그 동안 우리의 삶, 잘해왔고 잘하고 있고 앞으로는 더 잘할꺼라며 짠을 부딪혔다. 그리고 집에 와서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폭팔을 했다. 내가 제일 황당했다. 부모가 몇시간 부재했던 집이 당연히 깨끗하거나 단정할리 없다. 지난 몇일동안 누적되어 있던 화내고 싶지 않거나 상황이 바빠서 넘겨버렸던 집안 구석구석의 불결함이 갑자기 나를 쓰나미처럼 덮쳤나?.

그냥 '집이 너무 정신산만하고 말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정리하지 않는 최가들을 향한 분노'로 심사종결을 하고 싶지만 그걸로만 사건정황을 설명하기엔 못내 찝찝하다.


몇 시간 전에 내 모습을 소환해 본다. 잠자고 있던 내 안에 괴물이 다시 등판한다. 고래고래 소리를 치면서 아이들을 힐난하고 더 하지는 못하다 싶게 쿵쾅 씩씩거리면서 집안에 있는 잡동사니들을 손에 들고 있는 쓰레기봉투에 닥치는대로 쑤셔 넣는다. 보이는대로, 아무렇게나 분리도 하지 않고 살펴보지도 않고 그렇게 일반쓰레기봉투라는 공간에 알알이 박힌다. 나와 그들의 감정처럼 돌보아지지 않은 상태로 아무렇게나.


정신차려보니 아이들은 모두 누운 것 같고 집은 캄캄했고 내 마음도 어둑어둑하다. 캄캄한 빛 사이사이로 보이는 집은 겨우 원상태를 회복했다. 그 사실은 내 마음을 흡족하게도 웃음짓게도 하지 못했다. 그저 방금전 남편과의 회동자리에서 '이제 정말 난 이제 꽤나 많이 평온해졌고, 화가 빠진 엄마로 겨우 사나봐' 라고 했고 인정과 축하의 봉인으로 다시는 나오지 않을줄 알았던 내 안의 괴물의 예상치 못한 출격에.. 

망연자실할 뿐이다. 




셋째인가? 썩지 않는 플라스틱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엄마가 누나에게 던지면 누나는 형한테, 형은 나한테, 자기는 막내에게 던진다고 한다. 그러면 그 썩지도 않는 플라스틱을 막내는 다시 아빠에게 던지고, 아빠는 그걸 어떻게 처리하는지 모르겠지만 엄마에겐 던지지 않는걸로 보인다고. 그러면 아빠가 먹어치운 썩지 않는 그 플라스틱의 존재는 사라져야 할텐데 엄마는 어디선가 또 그걸 만들어온다고. 신기하다고.


모든 감정에는 이유가 있다고 하던데, 정말일까?


전문가의 도움조차 '가성비를 따지느라' 받지 못하는 나. 구원책이 무엇일까?

아무도 날 돕지 못할꺼라는 이 근본적인 불신을 거두어들이지 않고서는 나는 계속 이 모양으로 살것 같은 불안감에 휩싸인다. 

이제는 정말 괜찮은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자신하지 않는 겸손한 삶이 그리고 다를바 없는 일상이 내 눈앞에 펼쳐있을 뿐이다.

그래도 솔직히 이야기 하고 반나절정도는 파업할 자유가 있다는 것, 그 사실에 간신희 희망을 걸어본다.


부정할 수 없는 내가 블혹이 넘게 살면서 알게 된 나에대한 

어쩔수 없는 진실은

나에게 세상살이의 기본값은 '슬픔'과 '회색빛'이라는 거다.


아무래도 나 좀 우울한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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