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 끝, 큼지막하게 임대문의가 붙어있는 버려진 세탁소 앞에 그녀가 온몸으로 비를 맞으며 서있었다. 젖은 머리칼이 얼굴에 달라붙은 걸 보니 그녀가 얼마나 그곳에 서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편의점에서 커피를 사 들고 나오던 길에 발견한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체격에 비해 미묘하게 부푼 그녀의 배 때문일지도 몰랐다.
"괜찮으세요? 우산 드릴까요?"
내 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빛이 얼굴에 보이는 나이와 달리 아이처럼 순수했다. 이 동네와 어울리지 않는 눈빛이었다. 얼마 전 이사 온 이 마을에는 묵직한 침묵이 맴돌고 있었다. 지난번 태풍으로 인해 뜯겨나간 간판들은 채 회복되지 않아 흉물스러웠고, 주민들은 낯선 이주민을 반길 여유가 없어 보였다.
"아이가 비를 맞고 싶다고 해서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맑게 웃었다. 나는 뭐라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녀가 다시
비를 올려다보는 동안, 나는 그녀를 뒤로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녀의 이름은 은혜였다.
그 뒤로도 종종 비가 오는 날이면 그녀를 마주쳤는데 그녀는 그때마다 늘 혼자였고, 늘 그 세탁소 앞에 서 있었다. 내가 아는 건 그게 다였다. 그녀의 이름을 알려준 것은 그나마 이 동네에서 가장 나를 반기는 슈퍼아줌마였다. 대형마트를 가거나 쿠팡을 이용하지 않고 늘 자신의 슈퍼에서 식재료를 사는 내가 퍽 맘에 들었는지, 아줌마는 나에게 동네의 이런저런 소식을 전해주었다. 아줌마의 입을 통해 그녀의 이름이 은혜이고, 세탁소집의 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줌마의 말에 따르면 다른 가족들은 행방이 묘연한데 은혜만 동네에 남아있어 다들 의문이라고 했다. 은혜는 비가 오지 않는 날에는 동네를 서성거렸고, 비가 오는 날에는 어김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 동네는 유난히 비가 자주 내리는 것 같았다. 매일이 장마철 같은 동네에 적응할 때쯤 처음엔 신경 쓰이던 그녀도 이제 이 동네의 풍경처럼 자연스러워졌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은 그녀의 배가 점점 부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무감각한 나라도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그녀의 배는 확연히 커지고 있었다.
"임신하신 거예요?"
소낙비에 우산을 챙기지 못한 날이었다. 내키진 않았지만 그녀가 비를 맞고 서있는 세탁소의 처마 밑에 잠시 몸을 숨겼다. 그녀는 전혀 나를 의식하지 않는 듯했지만 괜히 어색한 기분에 말을 걸었다.
"네, 아이가 비를 좋아해요."
"아, 결혼하신 줄 몰랐어요. 감기 걸리시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배를 쓰다듬었다. 더 이상의 대화를 원하지 않는 것 같았다. 마침
소나기도 그쳐가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뒤통수에 그녀의 시선이 느껴지는 듯했다. 그날 밤, 담배를 피우러 나왔다가 나도 모르게 그 세탁소 앞으로 발길이 향했다. 비는 그쳤지만, 물웅덩이가 남아 있었다. 그녀가 없으니 세탁소는 더 휑해 보였다. 미처 정리되지 않은 기물들이 어지럽게 내부에 남아있었다. 괜히 물웅덩이에 첨벙하고 발길질을 했다. 구정물이 바닥에, 바지에 차례로 튀었다.
은혜의 배는 이제 임신을 의심하는 것이 되려 이상할 만큼 커졌다. 그녀는 커진 배를 붙잡고 느릿느릿 걸었고, 비가 오면 여전히 그 자리에서 배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슈퍼 아줌마를 포함해 보다 못한 동네 사람들이 그녀를 붙잡고 병원에 가보라고 채근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아이가 비를 좋아해요."
그 말에 아줌마들은 혀를 차며 정신이 나간 모양이라고 수군거렸다. 정신이 나간 그녀를 누가 데려다 사고를 친 게 분명하다며, 경찰에 신고해야 하는 게 아닌지 의논하고 있었다. 그녀를 딱하게 보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왠지 그녀가 무서웠다. 무엇을 믿는지 모를 그녀 안의 믿음이 무서웠다. 비가 그녀를 삼킨 것 같았다.
슈퍼 아줌마가 일주일 후에도 그녀가 병원을 가지 않으면 경찰에 알리겠다고 다짐하는 것을 들은 다음날, 폭우가 내렸다. 뉴스에서는 침수 피해와 실종자 소식이 연이어 보도되고 있었다. 아줌마는 어느새 그녀를 잊은 듯 슈퍼 앞의 물건을 치우며 장마를 대비하고 있었다. 오늘 같은 비에는 그녀도 나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찜찜한 불안감에 세탁소 앞으로 달려갔다. 그녀는 비를 맞으며, 배를 감싸 안고 서 있었다.
"은혜 씨! 들어가요, 위험해요!"
내가 소리쳤지만, 그녀는 고개를 들지 않고 중얼거렸다.
"아기가… 나와요. 지금 나와요."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면서도 묘하게 단호했다. 그녀는 다급히 뻗은 내 손을 뿌리쳤다. 어디서 나오는 힘인지 모르게 강한 힘에 잠시 소스라쳤지만 병원에 가야 한다는 생각에 다시 힘을 주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다 괜찮아질 거예요. 다, 돌아올 거예요."
그녀는 계속 그런 말을 반복했지만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내가 그녀의 손목을 강하게 잡고 또다시 그녀가 내 손을 뿌리치던 그때, 그녀의 배가 이상했다. 부풀어 있던 배가 점점 작아지는 것 같았다. 비가 그녀를 적시며 흘러내렸다. 나도 모르게 그녀의 손목을 놓쳤고, 그다음부터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그날 이후, 은혜는 사라졌다. 세탁소 자리에는 서울에서 내려온 부부가 코인 세탁방을 차리려는 모양인지 인테리어 공사가 시작되었다. 동네 사람들은 자연스레 그녀를 잊었지만 나는 가끔 그녀가 서있던 자리에서 비를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