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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하룻 Jun 18. 2024

나 자신이 금쪽이 같을 때

금쪽 처방은 무엇?

사람들은 금쪽같은 내 새끼를 보며 혀를 끌끌 찬다. 자신도 어찌할지 모르는 예민한 기질 때문에 끊임없이 세상과 부딪히고, 자신과 타인에게 상처를 내는 금쪽이들을 보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런데 퇴사 후 나는 그게 참 남일 같지 않았다. 나는 ‘새끼’라기에 다 커서 울며 떼쓸 수 없었기 때문에, 어엿한 ‘어른’으로서 나의 뾰족함을 그럴듯하게 숨기고 세상과 잘 지내려 노력해 왔다. 하지만 언제나 세상과의 조율은 버거웠다. 그리고 퇴사는 내게 그 조율이 실패로 끝났음을 증명하는 듯했고, 나는 사회로 조화되지 못하고 떨어져 나온 금쪽이 같았다.

스스로 되뇌는, 주변에서 일러주는 수많은 “괜찮아.” 속에서도 나는 그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오늘은 퇴사 후 나라는 금쪽이를 위해 그동안 나 스스로, 그리고 주위에서 내린 금쪽 처방을 돌아보려고 한다.




01 리페어런팅(Reparenting) : 나라는 금쪽이에게 엄마 되어주기

퇴사한 입장에서 주변인들의 걱정을 덜기 위해 늘 좋다고, 현재 충분히 행복하다고 했다. 표면적으로는 그것 또한 진실이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나를 용서하기가 힘들었다. 퇴사라는 중도 포기 사태에 대해 내 능력과 의지가 부족했던 것은 아닌지 끊임없이 반추했다. 그때마다 나는 내가 별나다며 질책했다. 남들 다 하는 사회생활, 누군들 힘들지 않아서 지속하는가. 잘난 것도 없으면서 둥글어지지도 못한 나의 모난 구석을 쥐어박으며 타박했다. 그러니 참 힘들었다. 괴롭히는 이도 없고 쌓인 업무도 없는 완벽히 행복할 수 있는 자유를 갖고도 행복하지 못하다니. 그 모습마저 미웠다.

내가 약해지니 무척이나 엄마에게 안기고 싶었다. 어린아이처럼 일부러 더 크게 울면서 힘들었다고 투정을 하고, 다정하고 안전한 쓰담쓰담을 받는 장면을 상상했다. 그렇게 한참을 울고 품 속에서 잠든 나. 눈을 비비며 일어나면 그 사이 엄마가 내가 나아질 수 있는 해결책을 마련해 두고 차근차근 일러줄 것이다.

하지만 현실 속 나는 엄마에게 참 힘들었다고 지금도 그렇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어느새 제법 노인이 되어버린 현실 엄마에게는 이 상황을 현명하게 소화할만한 여유가 없었다. 나 역시 서른을 훌쩍 넘어 불혹을 향하는 나이에 엄마 사랑의 한계와 상황을 불평하는 것도 무의미한 일이었다.


당시 나는 나와 사회, 현재를 이해하기 위해 나름대로 심리학과 철학을 탐독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리페어런팅’이란 심리치료 용어를 발견했다.

리페어런팅(재부모화)란 성인이 어린 시절에 충족되지 못한 자신의 정서적 또는 실제적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요구에는 애정, 보호, 공감, 교육 등 사람에 따라 다양하게 포함될 수 있다.

스스로 질책하다 지쳐 어린아이로의 퇴행까지 꿈꿨던 나는 진심으로 엄마의 손길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밉거나 힘을 낼 수 없을 때, ‘내가 나의 엄마라면 지금의 나란 아이에게 어떻게 해줄까?’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면 응석도 들어주고, 맛있는 것도 사주고, 예쁜 옷도 입혀 주며, 밉지만 고운 나 자신을 토닥여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02 역시 전문가는 달라 : 심리 상담

엄마라고 아이의 문제를 해결할 모든 지혜를 갖추고 있지 않다. 그럴 때 엄마는 아이의 손을 붙잡고 학원, 병원 등 전문가를 찾아가야 한다.

나는 내 손을 잡고 상담 센터를 찾았다. 1회에 10만원, 최소 8회(2달) 이상 세션을 등록해야 한다. 부담스러운 액수였다. 한동안 스스로 수입을 끊은 나를 벌주듯 스스로 인색하게 굴던 때라 고민했다. 하지만 엄마는 내 아이에게 필요한 도움을 주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할 것이었다. 과외비라는 생각으로 과감하게 결제했다. 결과적으로 그 선택은 옳았다.


심리학과 철학에서 얻는 큰 위로는 내 문제가 인류 보편의 고민이라는 점이다. 인류 보편의 고민을 상담하고 해결해주기 위해 다년간 공부하고 일한 전문가 상담 선생님은 유능했다. 나는 고착된 사고의 패턴을 깨고 새로운 관점으로 나와 상황을 이해하는 방법을 배웠다. 그중 몇 개를 소개한다.

1) 나는 내 상사가 좋은 어른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회사에서 상사는 내게 절대적 권능을 행사한다. 그를 미워해봤자 내 손해인 것이다. 나는 그를 흉보고 부당하다고 호소하면서도 언제나 마지막은 ‘그래도 좋은 분이셔.’로 마무리했다. 좋은 분을 실망시킨 나, 좋은 분과 잘 지내지 못하는 나는 문제가 있는 것이었다. 상담 선생님은 상사를 더 이상 ‘좋은 분’으로 포장할 필요가 없다고 알려주었다. 오직 내 입장과 경험 속에서 그는 이기적이고 표현이 미숙한, 즉 미성숙한 어른으로 재정의되었다. 덕분에 나는 그와의 관계에서 내 잘못의 포션을 덜고 스스로를 문제아에서 해방시킬 수 있었다.

2) 과제도 종종 있었는데 가장 도움이 됐던 건 ‘나를 괴롭히는 습관에게 이별 편지 쓰기’였다. 편지의 대상이 될 습관을 쭉 검토하면서 나는 나를 괴롭히는 가장 주요한 습관은 ‘과도한 책임감’ 임을 알 수 있었다. 힘들 때 물러서지 못하고 나를 몰아세웠던 것, 가족들을 도우려다 오히려 원망에 사로잡힌 것 모두 내가 누구도 시키지 않은 ‘과도한 책임감’을 가지면서 생긴 부작용이었다. 나는 성장 동력이기도 했던 나의 오랜 습관에게 감사 인사와 함께 이별을 고했다. 조금 오글거리지만 마지막 인사를 발췌해 덧붙인다.

너는 나를 궂은 세상에서 씩씩하게 살아가게 해주었고, 사회의 일원이 되도록 해주었고, 좋은 딸이 되려고 노력하게 해주었어. 그동안 정말 고마웠어. 네가 해준 역할들을 먼 시간이 지나도 잊지 않을 거야. 힘든 점도 있었지만 그것들이 또 지금의 나를 만들어 주었으니까. 이제 너도 푹 쉬어. 고생 많았어.


03 남편이 내린 금쪽 처방 : 소유냐 존재냐

나는 늘상 종종 거리는 성향이 있는데, 쉬어도 알차게 쉬어야 하고, 무엇을 해도 빠르고 효과적으로 하려고 하는 게 주된 특징이다. 이런 내게 갑자기 찾아온 긴 휴식은 낯설고 어찌할 바 모르는 것이었다. 퇴사 후 낮잠 자는 나,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 나는 무척 어색하고 잘못된 것 같았다. 도태되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 내 존재의 유용성을 가늠해 보며 우울에 잠기곤 했다. 다행히도 나의 최측근인 남편이 내게 꽤나 효과적인 금쪽 처방을 내려주곤 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나 : 오늘도 낮잠 자서 온종일 아무것도 한 게 없어. 한심해. ㅠㅠ
남편 : 부럽다~ 평일에 낮잠 자는 게 제일 좋은 건데 그걸 왜 안 하려고 하는 거야.

낮잠 자는 게 한심한 행동이 아니고, 남들은 못 하는 특권을 누리는 행위로 사고를 전환시켜 주었다. 퇴사 후 빽빽하게 놀고 배울 계획을 짜는 나를 보며 당분간은 그냥 온전히 쉬는 것이나 배우라 한다. 나의 퇴사로 우리의 현금흐름은 반토막이 났지만 자기는 다행히도 물욕이 별로 없다고 한다. 남편의 조언은 단순하지만 나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해서 나는 천천히 기능이 없는 나의 존재 그 자체를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


부담 주지 않으려 무척 애쓰기도 했겠지만 아무리 배우자라도 방황하고 침체된 내 모습이 실망스러울 때도 있었을 것이다. 만약 남편이 조금이라도 어떤 행동을 채근하거나 실망한 내색을 했다면 나는 억지로 무언갈 시작했을 것이다. 이래나 저래나 시간이 약이 되어 잘 살아갔겠지만 그 시나리오에서 나는 평생 ‘기능성 나’만 인정했을 것이다.

소유냐 존재냐. 철학 공부는 내가 하는데 일 년에 책 한 권 읽지 않는 그가 에리히 프롬의 철학을 관통한다. 덕분에 나는 세상에 온전히 존재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정말 금쪽이였을까? 지금 스스로 다시 묻는다면 아니라고 대답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세상과 자아와의 충돌은 누구나 겪는 인생의 과정이다. 개인의 민감성과 같은 성향이 그 충돌을 크거나 잦게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개인에게 찾아오는 상황은 제각기 너무 다양하고 그 크기와 빈도, 행운과 불운도 불가항력적이다. 아무리 훌륭한 재질의 사람이라도 반복적으로 불운을 겪으면 좌절할 수 있고, 아무리 엉망인 사람이라도 연속적으로 행운을 맞이하면 기꺼이 삶을 긍정하게 된다. 한 사람의 삶의 형태는 개인의 역량보다 주어지는 상황, 결국 운에 더 크게 좌우된다. 그러니 세상과의 자아와의 충돌에서 대통합을 이루지 못했다고 하여 그 사람을 금쪽이로 선언한다면 다소 억울할 수 있는 문제다.


금쪽같은 내새끼에서도 상황을 분석하다 보면, 원인이 아이가 아닌 주변의 잘못된 자극에서 시작된 경우가 대부분인 것도 이 문제에서 약간의 힌트다.

그러니 나를 의심하는 금쪽이들은 명심하자. 내가 아무리 용써도 올 불행은 오고, 그러다 뜻밖의 행운을 마주칠 일도 있다는 것을. 다만 나를 아껴주자. 행운을 마주했을 때 그것을 꼭 거머쥘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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