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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둘희 Apr 17. 2024

11. 가출

당신의 선택이 당신의 두려움이 아니라 당신의 희망을 반영하기를 바랍니다.
– 넬슨 만델라



남편과 싸운 그 날, 집을 나와 근처 숙박업소에서 뜬눈으로 날을 지새웠다. 그리고 고민 끝에 아침 일찍 다시 집으로 갔다.


아이들은 깨어있었고, 막 들어온 나에게 어디갔다 왔느냐며 참새마냥 재잘거렸다.


“ 엄마, 어디 갔다 왔어? 슈퍼갔었어?”


“ 응-엄마 볼 일이 있어서 잠깐 나갔다 왔어.”



남편은 방에서 누워있었다.


“ 얘기 좀 해.”


내가 먼저 대화요청을 했고, 내 말에 남편은 인상을 찌푸리며 못 이기듯 몸을 일으켰다.


“ 나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되니?”


내 말에 남편은 한껏 불만을 뱉어냈다.


“ 회사에서 모처럼 회식하는 자리에서 회사 사람들 다 있는데 언제 들어오냐고 잔소리하면 내 입장이 뭐가 되겠냐. 창피해서 혼났어. 야. 그건 아니지 않냐? 얼마나 날 무시하면 그런 행동을 하냐?”


남편은 화가 안 풀린 듯 씩씩대며 공격적으로 얘길 했다.


“ 다음날 여행 일정 잡아놓고, 술 마시고 온다는 건 뭐고, 또 술은 조금만 마시고 들어온단 사람이 시간이 늦도록 들어오지도 않으니 전화를 한거지. 근데 또 취해서 발음이 꼬이니까 화가 나서 그랬어. 그게 내가 경솔했다 하더라도 내 지인가게에 쫓아와서 깽판치고 사람을 그렇게 두들겨 때릴 일이니? 대체 왜 손지검을 못 고치는거야? 둘 중 하나 죽어야 끝낼래?”


남편은 계속해서 자기 불만을, 나 역시 나대로 불만을 쏟아냈고 결국 어떠한 합의점도 없이 대화는 마무리 되었다.


곧 남편은 발목이 아프다며 병원을 다녀왔고 결국 인대가 끊어져 통기브스를 하고 왔다.


“ 할 말이 없네. 참…”


목발을 짚고 있는 남편을 보니 그렇게 인대가 끊어질 만큼 나를 때렸어야 했던건지. 이 상황이 황당하고 화가 났다. 하지만 그 마음을 애써 억누르고 아이들과 약속한 여행을 가기 위해 남편을 어르고 달래서 겨우 출발했다.




남편이 운전을 어찌저찌 해서 겨우 여행지에 도착했다. 하지만 발목이 아프다며 남편은 숙소에 있겠다고 했다.


결국 나 혼자서 아이 둘을 데리고 이곳저곳 구경을 했다.


근처에서 사온 비눗방울을 불며 웃고 있는 아이들을 보는데, 행복하다는 기분보다는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잘한거 없지. 그런 생각이 들다가도 그래도 이건 아니다 싶은 생각이 끝에 들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어떻게 돌아다녔는지 모르겠다. 푸드트럭에서 슬러쉬를 사서 해가 지기도 전에 숙소로 갔다.


침대에 누워 TV를 보는 남편을 보니 억울한 마음이 들었지만 신이나서 아빠에게 구경한 것을 이야기해주는 아이들을 보며 꾹 참았다.


딱 하루만 참자…





즐겁지 못한 여행에서 돌아온 후 아이들과 남편이 잠들고 난 조용히 옷가지를 챙겨 집을 나왔다.


남편이 조금이라도 미안해하는 기색이 있었다면 이러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사과를 받지 못해서 서운한걸까? 침대에 누워서 깔깔대며 휴대전화만 보고 있는 모습이 괘씸했던걸까?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서 조용히 집을 나오면서 남편에게 메세지를 넣었다.


‘ 우리 이제 그만하자. 나가서 지낼테니 법원 갈 수 있을 때 연락줘. 가급적 당신이 원하는 대로 맞출테니 조율할 부분은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나서 잘 정리한 다음 메세지로 남겨줘.’


다음날 메세지를 본 남편에게 전화가 왔지만 받지 않았다. 그리고 다행이 운좋게 일당 아르바이트를 구할 수 있어서 며칠간 아르바이트를 다니기로 했다.



이틀 후

남편의 메신저 프로필 사진이 바뀌었다.

내가 집을 나온 후 찍은 아이들 사진이었다.


다행이 사진 속에 우리 아이들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해맑은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 사진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아이들이 불쌍하고 너무나 보고 싶어 오열을 했다.


그때 타이밍도 기가 막히게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 왜.”


“ 어딘데?”


딱딱한 남편의 말이 수화기 건너편에서 들려왔다.


“ 알 거 없고, 용건만 간단히 해.”


나 역시 퉁명스럽게 대답을 던졌다.


“ 이혼하자며. 정리할 것도 많고 하니 상의 좀 하려고.”


남편의 요구사항을 먼저 들어보니 아이들은 본인이 데려간다고 한다. 나는 당신이 정 그러고 싶다면 그렇게 하라고 했고, 원룸 월세를 구할 보증금과 두 달분 생활비만 받고 나가겠다고 얘기했다. 그리고 후에 취업을 하게 되면 형편껏 양육비도 보내겠다고 했다.


당장 원룸을 알아볼테니 다음주에 내 짐을 전부 가지러 가겠다고 얘기한 후 통화는 끝이 났다.


그 후 아무에게도 하소연을 하거나 내 상황을 알리지 않고 묵묵히 아르바이트를 다니며 3일이 더 흘렀다.





평소보다 일찍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내가 지내고 있는 숙소로 돌아왔다. 5일 째 청소를 하지 않아 쾌쾌한 느낌이 들었다.


그때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렸다.

발신자는 평소 알고 지내던 같은 계모임 일원인 언니었다.


“ 너 지금 어디니? 솔직히 얘기해봐.”


“ 언니. 저 요즘 아르바이트 다녀요. 지금 막 아르바이트 끝나고 집에 가려던 중이에요. 무슨 일 있으세요?”


“ 너희 남편한테 전화 왔었어. 이것아.”


언니는 남편에게 우리 일을 다 전해들은 눈치였다.


“ 남편이 내일 아이들 데리고 시골로 간다더라. 혹시 너 돌아오거나, 연락되면 소식 전해줄 수 있냐면서 전화왔었어.”



이건 무슨 X소리인가 싶었다.

왜 굳이 언니에게 전화를 해서 소식을 전해달란건지.

싸우던 날 남편이 친정아빠한테 전화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그의 유치하고 치졸한 속셈이 뻔히 보였다.



“ 언니. 괜히 이런 얘기나 듣게 해서 죄송해요. 다음에 제가 밥 한번 살게요.”


“ 애들이 무슨 죄니. 얼른 들어가.”



애들이 무슨 죄냐는 언니의 말에 울컥 눈물이 터졌다. 내일 시댁으로 간다면 당분간 아이들을 볼 수 없다는 생각에 가슴이 미어졌다.


울음을 그치고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그리고 왜 상관없는 사람에게 전화했는지, 자랑도 아닌 일을 떠벌리는지, 하물며 본인이 아는 사람도 아니고 내 지인한테 그런 전화를 한 것인지 따져물었다.


남편은 내 질문에 대한 대답 대신 내일 시골에 가면 당분간 아이들을 못 볼테니 아이들이 보고싶으면 오늘 와서 보고 가라고 했다.


그가 무슨 의도인지 휜히 보였지만, 아이들이 정말 보고싶었고, 또 만에 하나 정말로 남편과 아이들이 시골로 간다면 당분간 아이들을 볼 수 없을 수도 있단 생각과 갈아입을 내 옷가지와 짐을 챙기기 위해 못 이기는 척 집으로 향했다.





“ 엄마, 다 나았어?”


남편은 아이들한테 엄마가 아파서 치료하느라 병원에 입원했다고 설명한 듯 했다. (예전에도 며칠씩 입원한 적이 여러번 있었기에 아이들은 더 믿었던 듯 하다.)


아이들은 며칠만에 본 나에게 그간 유치원에서 있던 얘기를 재잘거렸고, 이 내 만화영화에 푹 빠져있었다.


그 모습을 뒤로 하고 내 짐을 챙기기위해 옷방으로 들어갔다.


조용히 뒤따라 들어온 남편이 갑자기 뒤에서 날 껴안았다.


이거 놓으라며 뿌리쳤지만 남편은 잘못했다며 용서를 구한다. 그러던지 말던지 뿌리치고 나가는데 첫째 딸아이가 ‘ 엄마, 어디가? 다시 병원가?’냐며 붙잡았다.


남편은 놓치지 않고 아이들도 보고 있으니 이대로 가지말라고 붙잡았다.


아이들을 무기삼아 얘기하는 듯한 남편이 참을 수 없을만큼 싫었지만, 아이들을 보며 못 이기는 척 다시 아이들 곁에 앉았다.


“ 엄마, 병원 안가도 돼?”


“ 응. 안가도 될 것 같아.”


“ 그럼 나 유치원에서 배운 율동 봐줘. 알았지?”


첫째 딸아이의 장난끼 가득 담은 표정에 눈물이 왈칵났다.

‘ 그래. 애기들을 위해서라도 참자. 참자. 또 참자.’ 라며 주문을 걸었고, 며칠만에 보는 아이들의 재롱을 보며 나도 모르게 웃고 있었다.



남편은 그제서야 안심한 듯 했고,

그 뒤로 내 눈치를 보며 비위를 맞췄다. 늘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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