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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은 언제나 그리고 언제나

힘들다고 시작을 두려워 말 것

by 이덕준


얼마 전 한 직원이 그만두었다. 힘들다고. 처음엔 무슨 일이든 다 힘든데. 처음에 힘들지 않은 일은 없는데. 그녀가 지긋하게 했다는 공부도 처음엔 다 힘들었을 텐데.라고 직원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의 처음이 떠올랐다. 정말 힘들었지. 일주일은 두 발이 아파 죽겠더니 그다음엔 허리가 아파 죽겠고 그다음엔 무릎이 아프고 어깨가 아프고...... 전신을 통증으로 한 번 훑고 지나가니 몸도 9시간 내내 서있는 것에 적응을 했는지 더 이상은 처음처럼 아프지 않았다. 그럼 뭐 하나 마음의 통증은 수시로 예고 없이 찾아왔다. 선임 직원과 손님들에게 죄송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런 내 모습이 너무나 지겨워서 아 나는 도대체 언제쯤 선배가 되려나 한탄한 적이 있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선임 직원은 그렇게 선배가 되고 싶은 거냐고 물었다.


나는, 언제나 신입이었다. 공무원으로 시작했던 2015년부터 쭉. 2017년에 결혼을 하고 2018년에 휴직을 했다. 그렇게 긴 휴직이 될지 그때는 몰랐다. 내일이라도 돌아올 것처럼 내 일들을 차곡차곡 정리해 놓고 떠났다. 4년이 지난 2022년, 나는 복직했다. 20대, 아가씨, 48kg의 내가 아닌 30대, 아이 둘 난 아줌마, 68kg라는 타이틀로. 나는 신입은 아니었지만 다시 일을 배워야 하는 중고 신입이었다. 4년 사이 정부는 일을 열심히도 했는지 많은 것들이 바뀌어있었다. 알았었던 것은 과거 완료형으로 끝나버렸다. 차곡차곡 정리해 두었던 내 일들은 모두 무너져 있었다. 산산조각이 나거나 더 큰 돌이 와서 박혀있거나. 일을 모르면 배우면 되지! 하고 호기로운 자세는, 사실 말뿐이었다. 나는 여전히 소심하고 내성적인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내가 아줌마라서 상처받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지 때로는 막말을 해대고 때로는 나를 막대했다. 신입이지만 20대의 시절과는 또 달랐다. 아줌마는 그냥 다 억세고 드세고 거친 것인 줄로만 알았지 이렇게 긁히고 곪았다가를 겹겹이 반복하며 굵어지는 것인 줄은 몰랐다.


다행히도 선배 같은 능력자 후배들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다. 도움을 줄 연차에, 도움받는 미운 오리 같은 나를 직원들은 미워하지도 않고 참 열심히도 도와주었다. 덕분에 나는 미운 오리에서 미운 은 뺀 꽥꽥 오리로 9개월 만에 꽤 잘 적응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래, 이제는 나도 도움은 못 줘도 민폐는 덜 부리며 일하겠다 싶었을 때, 남편의 이직 성공 소식이 들려왔다. 그것은 나의 두 번째 육아휴직이 시작되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남편이 잘 돼서 그러는 건데 왜 속상해하냐고 나무랐던 사람들도 있었다. 당시엔 속상해 마음이 울컥거리던 그 말이 질타가 아닌 줄은 사실 그때도 알고 있었다. 속 좁게 굴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속이 상해 마음이 쪼그라든대도 어쩌겠냐는 위안이었음을. 한배에 타고 있는 남편의 성공이 배 아팠을 리 없다. 다만 나는 내가 슬펐다. 나의 미래가 애달팠다. 내가 일을 한 번 더 잃어버리고, 그러고 나서 직장으로 돌아왔을 때, 여태 보내온 9개월 같은 시간을 또다시 보내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승진도 욕심도 있었다. 급여가 야박한 공직생활에 기쁨이 되는 순간은 오직 승진할 때니까. 그리고 공무원을 했는데 7급은 달아보고 싶었다. 어디 가서 ‘나 일 좀 했어요’하기엔 8급은 초라했다. 그것도 매우. 휴직 없이 일을 해도 어려운 승진을 나처럼 육아휴직을 탈탈 털어 쓴 직원에게 줄 리 만무했다. 이제 일도 적응했는데 갑자기 멈추고 싶지 않았다.


자동차처럼, 나는 일이라는 가속 페달을 밟아 점점 속도를 붙여 달리고 있는데 갑자기 남편의 이직이 등장해 급브레이크를 밟게 된 것이다. 차는 앞으로 가려다 멈추고 몸도 극심하게 흔들렸다. 인생의 방향을 쥐는 핸들을 꽉 붙잡은 채 나는 몇 달 동안 그대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여보, 있지. 나한테 두 번의 휴직은 있어도, 두 번의 복직은 없어.” 그만큼 중고 신입의 자리는 버겁고 힘들었다.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을 만큼.

그래서일까. 그렇게 뱉었던 말이 진짜가 되었고 복직은 없었다. 복식 대신 나는 사직을 했으니까. 그렇게 싫다던 중고 신입의 자리는 제 스스로 마다해 놓고선 면세점에서 늙은 신입 자리에 섰다. 인생에서 세 번의 신입 타이틀이었다. 지긋지긋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뒤로 새로운 직원들이 들어왔다. 선배님 칭호를 받으며 그들을 인솔해 주었다. 지난번 내 푸념은 들었던 직원이 나를 보며 웃었다.


“이제 드디어 선배가 되었네요. 좋아요?”


그럴 리가. 선배 소리가 듣고 싶었던 게 아니라 나는 정말로 일을 잘하는 사람으로서의 경력을 가지고 싶었다. 기존 직원들이 그만두니 나의 자리는 점점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만큼 나를 선배라고 부르는 직원들이 늘어났다. 선배와 후배의 사이. 일에서도 잘함과 잘 못함의 사이. 그 어디쯤에 내가 있었다. 그래도 이제는 꽤나 익숙해졌다. 초반을 나를 기억하기 위해선 조금 애쓰고 노력해야 할 만큼. 8개월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어쩌면 어느 일이나 8개월이나 9개월쯤 하다 보면 더 이상 어려워서 못하는 일은 없는 것 같다. 그 정도로 했는데도 너무나 어려운 일은 두 가지로 나뉘겠지. 그럼에도 버티고 할 것인가, 다시 새로운 일을 찾아 떠날 것인가. 그런데 지금처럼 익숙해지는 순간에도 그 질문은 찾아왔다.


‘나는 무엇을 더 원하는가. 익숙함에 멈추어 지금처럼 읽고 쓰는 데 집중해 볼 삶을 지향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도전에 인생을 던져볼 것인가.’


지금까지 세 번의 신입 직원 생활을 겪었다. 네 번이 될 수도, 다섯 번이 될 수도 혹은 그 이상이 될 수도 있다. 모를 일이다. 그러나 어떤 상황이 되더라도 이제는 이렇게 믿고 싶다.


처음엔 다 그렇다. 처음은 언제나 이렇다. 그리고 언제나 처음은 과거가 된다. 그러니까 뭐든, 시작해도 괜찮다. 뭐든 늦은 것은 없다. 힘이 든다면 성장하는 중인 것을 잊지 말고 이 낯선 일도 곧 익숙해질 것이라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그러니까 언제나 처음은 힘든 것이다. 사실은 삶의 본질이 그러하다. 그러니 처음을 두려워 말아야 한다. 종종 찾아드는 처음에 같은 횟수로 길을 잃겠지만 멈추지 않는 한 우리는 나아지며 나아갈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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