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끝에 닿는 온도에서 마음이 오가는 순간
멍하니 티브이를 보다가 면세점에서 일을 하면 좋은 점이 무엇이 있을까 하고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그래, 언젠가 저런 연예인들을 한 번쯤은 만날 수 있지는 않을까' 어릴 적 나는 한 가수의 열렬한 팬이었었는데, 그 시절의 나라면 어떻게 해서든 그를 한 번은 만나보고 싶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나의 연예인은 귀염둥이 아들 둘. 연예 기사보다는 키즈노트와 하이 스쿨 알림장이 더 중요하다. 어쨌거나 한 녀석은 장래희망을 물었더니 영화배우라고 했다. 또 다른 한 놈은 무대를 보거나 음악이 나오면 도무지 흥을 주체하지 못하고 "엄마 내가 춤 보여줄까?" 하며 적극적으로 댄스를 보여준다. 멈추며 보여주는 포즈도 예사롭지 않다. 아들에게 사랑에 빠진 엄마의 눈에는. 어쩌면 몇십 년이 흐른 뒤의 나는 배우와 가수의 엄마가 되어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오늘도 한 연예인이 면세점을 방문했다. 오늘은 유독 한가했고 매장은 한산했다. 한 손님이 여느 손님과 다르지 않게 술이 진열된 매대를 기웃거리고 담배를 물어왔다.
"D** 있나요?"
"몇 mg 찾으시나요?"
"1mg요."
"제가 드리겠습니다. 여권 준비해 주세요."
"어디에서 오셨나요?"
"어디였더라..."
"혹시 방콕이세요?"
"아, 네.(미소)"
피곤하셔서 기억을 못 하시는 분들이 많아요.라고 말을 하려다 아껴놓고 계산을 마무리했다. 그는 사라졌고, 옆의 직원이 말했다.
"여권 이름 봤어요?"
"네? 아니요."(사실 이제 나에게 여권의 이름은 그저 알파벳. 카드의 이름과 동일한지만 본다.)
"A 씨! 그 배우잖아!"
그는 다시 돌아와 다른 물건을 더 사 갔는데, 그를 아는 체할 수가 없었다. 사실 그는 내가 만난 첫 연예인은 아니었고, 이전의 경험으로 연예인에게는 조심스러운 마음이 있다. 내가 처음 만난 연예인도 한 배우였다. 몸이 건장한 사내 여럿과 마치 포로처럼 끌려온 듯이 보이는 그는, 마스크로 얼굴을 온통 가리고 있었다. 앞선 대화에서처럼 나는 필요한 질문을 했을 뿐인데, 그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고 옆의 건장한 사내들이 껄렁하게 대답을 해주었다. '말을 못 하시는 분인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가 건장하고 껄렁한 사내들과 떠나고 나서 직원들은 우르르 모여 물었다. 누구냐고. "네? 누굴까요." 그는 직원들의 짐작대로 연예인이었지만 나는 그때 다음에 연예인을 만나게 된다면 절대로 아는 체하지 말아야지 다짐했다.
사실 나는 눈썰미가 그리 좋은 편도 아니고 아이돌은 비스트(이제는 하이라이트라고 활동한다)가 나의 마지막이기 때문에 그들이 내 코앞에서 연기를 하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대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목소리만 내어도 알아볼까 염려했던 그의 모습이 아직 선하다. 나의 직업이 이따금 나의 정신을 피폐하게 하듯이, 연예인이라는 직업도 그를 피폐하게 만드는 부분이 있었으리라. 그저 평범하게 쇼핑하고 거리를 나서는 일도 쉽지 않았으리라. 그래서 그 이후로 만났던 여럿의 연예인들도 나는 누군지 전혀 모르는 것처럼 행동했고 카드를 주고받을 때도 조심스러웠다. (실제로 알아보지 못한 경우도 있다) 손끝이라도 닿을까 카드도 아주 끝으로 주고받았다. 그리고 이건 곧 습관이 되었다.
어제저녁 한 가수의 사망 기사가 떴다. 그 가수의 노래를 너무나 좋아했던 한 사람이 떠올랐다. 학교 축제에 와서 그 넓고 푸르렀던 교정. 스무 살이었던 나와 손을 포개고 내 옆에 맞닿아 있던 나의 첫사랑. 후끈했던 동기들의 가슴을 목소리로 울렸던 그가 어젯밤에는 다른 방식으로 사람들을 울리고 있다. 그저 조용한 애도를 표하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오늘 만난 그도 단지 직업군일 뿐이지 전혀 다른 사람이겠지만 그래도 혹시나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연예인이라는 직업이 과분한 사랑을 받듯 과한 질타도 받는 직업이기 때문에. 그리고 나는 절대로 알 수 없는 영역의 삶을 살아내고 있기에 그들은 조심스러운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언젠가는 자연스럽게 카드를 주고받으며, '팬입니다.' 혹은 '응원합니다.'라는 말을 건 낼 수 있기를 바라본다. 사실 응원한다는 말은 연예인이 아닌 모든 고객에게 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알 수 없는 영역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이곳을 방문하는 모두가 그렇기 때문에. 낯선 삶을 살아내고 있는 타인이자 스치는 인연들에게 응원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며칠 전 첫째 아이가 다리가 아파서 첫 등교 이틀 만에 쉬었다. 가득했던 일정에 추가로 병원을 가야 했다. 오전에 아이를 위해 정형외과-약국, 피부과-약국을 다녀오고 민증을 위한 사진 찍기, 점심 먹기, 동사무소 방문, 은행 방문이 줄줄이 연이어 있는 상황이었다. 시계는 3시 15분이 넘어가고 실수로 길을 잘못 들었다. 10분 거리가 30분이 되어갔다. 급한 마음에 신호를 보지 못하고 빨간불에 직진을 했다. 횡단보도가 있는 길을 아니었지만, 아이를 태워놓고 신호위반이라니. 스스로에게 너무 화가 났다. "엄마가 왜 이럴까 정말." 하고 머리를 쥐어뜯고 있을 때, 갑자기 따뜻하고 말랑한 손이 내 손등 위로 포개졌다.
"엄마, 괜찮아요. 속상해하지 말아요."
"아니야. 전혀 괜찮지 않아."
"......"
그리고 아이는 말없이 나를 조용히 토닥여주었다. 말랑하고 따뜻한 여덟 살의 토닥임을 받고서 나는 정말로 곧 괜찮아졌다. 그날 그 순간, 지금까지 어떤 사람에게도 받지 못했던 따뜻한 위안을 받았다. 우주는 내가 슬퍼할 때 내 곁으로 와주는, 속상해서 혼자 있고 싶다고 하면 그저 조용히 이불을 덮고 옆에 누워 "안아줄까요?"묻는 아이다. 우주에게서 배운 건, 마음을 전할 때는 딱 그렇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 조용하고 부드럽고 따뜻하게 살며시.
오늘도 많은 사람들과 손끝이 스쳤다. 손끝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하는데, 전생에 나는 어떤 삶을 살았길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손끝을 스칠 수 있는 직업을 갖게 된 것일까. 고객에게 최대한 터치를 하지 않으려 배려하지만, 이따금 스치는 손길을 불편해하지 않고 스치는 온기라고 느껴주면 좋겠다. 정신없이 물건을 주고받는 시간에서, 싱긋하고 미소를 건네며 인사를 나누는 순간에도 그들이 따스함을 얻고 가기를 바란다. 당신이 누구든, 나는 살아있는 당신의 삶을 응원하니까.
P.S. 우주야, 너는 정말 멋진 아이로 성장했구나. 그 말랑한 따뜻함은 딱 네 마음의 모양과 온도라는 걸 엄마는 알아. 엄마의 마음도 너만큼 부드럽고 촉촉하고 따끈하면 좋겠어. 그리고 그 마음이 우주처럼 손끝에서 전달될 수 있다면 좋겠어. 엄마는 우주같이 멋진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오늘 엄마가 좋은 이유가 엄마의 마음이라고 했지. 엄마도 우주의 마음이 정말 좋아. 그리고 엄마에게 마음을 전하는 법을 알려줘서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