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늘 아침엔 알람이 내가 아닌 우주를 깨웠다. 우주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가 화장실에 다녀오는 동안에도 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어제 낮잠을 자서 늦게 잠을 잔 탓일까. 오늘은 빨리 가야 하는데 빨리 일어나지 못했다.
3
5월이면 낮엔 너무 더워 반팔을 입고, 저녁엔 셔츠나 후드 집업 같은 걸 걸치고 다녔던 것 같은데, 요새는 날이 마냥 덥지가 않다. 오히려 셔츠를 입고 재킷을 걸쳤는데도 추웠다. 요즘은 자꾸만 춥다. 자꾸만.
4
어제 근무자 명단이 바뀌었다. 오전엔 두 명만 나와서 근무해야 한다. 야간 지배인님이 퇴근을 못하고 있었는데 오후 조로 근무가 바뀐 선배님이 등장했다. 그 순간 안도와 공포가 교차했다. 오전이 수월할 것이라는 안도와, 화가 날 실장님의 천둥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5
비어버린 말의 자리.
공유. 우리는 드디어 그녀 이야기를 꺼냈다. 그 순간이 좋았다고 해야 할까.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부정적인 순간은 아니지만 긍정적인 단어를 붙일 수도 없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눈시울을 붉혔고, 이내 우리는 다시 흩어졌다. 오래오래 그녀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가도,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슬픔이 우리 사이에 고일까 봐. 그게 길을 만들어 바다로 들이치는 물길의 시작이 될까 봐서 우리는 자기 몫의 슬픔은 자기 앞으로 모아 둑을 쌓았다. 우리는 애도하는 법을, 제대로 슬퍼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그런 시간을 보냈다. 다만, 그녀가 살아있었다는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어서 __했다. ____안에는 어떤 말을 쓸 수도 없다.
6
그녀의 환영이 보이지는 않는데, 머릿속엔 그녀와 있던 장소에서는 어김없이 그녀가 등장한다. 지금은 그것이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언제까지 그녀는 등장하고, 언제까지 그것은 내 머릿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을 다잡아야 하는 것일까.
스타벅스에 내려와 커피를 주문하고 기다리고 있다. 자리에 앉아서 앞을 바라보았다. 커피가 만들어지길 기다리는 사람들 틈에서 그날의 그녀가 나타났다. 점심 대신에 잠을 잤던 그녀, 밥 대신에 커피를 사들고 가던 그녀. 그날도 나는 커피를 마시고, 책을 읽고 글을 썼다. 오후 근무인 그녀가 매장에 들어왔다. 그녀는 커피를 기다리며 서있었고 그런 그녀는 나는 또 반가워서 다가가 인사했다. 밥 먹어야지! 하는 나의 작은 타박에도 그녀는 미소를 지어 보여주었다. 여기에도 그녀가 있다.
이곳에 일하는 사람은 그녀가 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까? 스치는 인연에도, 조금 더 다정해질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7
공유할 수 있는 슬픔.
오늘은 내가 그보다 30분 일찍 식사를 하러 나가게 되었다. 나가려는 나를 그가 다급하게 붙잡으며 커피 한 잔 괜찮으시냐고 물었다. 어떤 카페를 갈까 생각했다. 우리가 할 이야기는 오직 그것뿐이고 나는 분명 울 텐데 그런 나를 잘 가려줄 수 있는, 우리의 감정처럼 차분하고 덜 개방되어 있는 카페가 어딜지 고민했다. 지하철역으로 이어지는 곳 앞에 위치한 스타벅스에서 그를 만나기로 했다.
그렇게나 먹고 싶었던 베르가못이 나왔다. 콜드브루인 것 싫지만, 나는 이 커피를 2년이나 기다렸다. 주저 없이 커피를 시키고 앉았다. 30분 뒤 그가 카페로 들어왔고, 그도 나와 같은 커피 한 잔을 시켰다. 우리 둘은 같은 커피를 앞에 두었다. 먼저 주문한 내 커피 잔의 커피는 탁하고, 얼음이 많이 녹아있었다. 반면 그의 커피 잔 안의 커피는 아직 영롱한 색이었다. 베르가못 시럽이 살아있는 것처럼 커피를 파고들었다.
우리는 1시간 동안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공유할 수 없던 각자의 슬픔이 이제야 공유할 수 있는 이야기가 되었다. 그와 나의 기억에 있던 그녀의 모습을 하나 둘 꺼내어 놓았다. 하릴없이 새빨개진 눈에서 눈물이 굴러다녔다. 흐르지도 못하게 꾹꾹 담아두었다가 결국에는 흐르고 말았다. 우리의 것을 나누었더니 슬픔이 더 커다래졌다. 우리는 조용히 그리고 하나씩 일하는 동안 참아왔던 것들을 터트렸다. 커피 잔의 얼음이 녹으며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의 커피는 잘 줄지 않았고 시럽은 이제 커피와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얼음이 녹은 자리에는 투명한 물이 찰랑거렸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지 못하고 탁해져 버린 커피를 담은 커피잔의 애꿎은 얼음만을 휘저었다. 아무리 저어도 마음은 제자리였다. 얼음 하나가 툭, 컵 옆으로 떨어졌다. 그걸 하얀 휴지로 감쌌다. 휴지로 감싼 얼음은 흔적도 없이 녹아버렸다. 그리고 온통 젖은, 투명해진 휴지가 남았다. 우리 같았다. 사랑한다고 하기에는 그녀가 부담스러워할 것 같고, 좋아했다고 하기엔 격했던 우리의 마음이 얼음이 녹은 자리의 물기처럼 휴지를 적시고 있었다. 그녀라는 존재는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고 그녀의 존재감은 우리를 하염없이 적셔댔다.
결론이 없는 본문만 있는 슬픔에, 잊고 싶지 않다고 아프고 슬퍼도 어여쁜 그녀를 오래오래 기억하겠다고 우리는 마무리가 아닌 마지막 말을 서로에게 건넸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그리고 매장에 돌아와서도 그가, 너무 힘들어해서, 그걸 보는 것은 또 다른 방식으로 마음이 아프게 했다. 어딘가에 그녀가 있을지, 아니면 완전히 사라졌을지, 그것도 아니라면 어딘가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존재로 존재하고서도 지금 우리를 보고 있지는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왠지 그녀라면 그에게, 에이 저는 괜찮아요,라고 할 것 같았다. 미안해하지 말라고. 고맙다고 해줄 것 같았다. 그래서 다시 매장에서 만난 그에게 힘내라고, 해주었다. 아마도 그녀는 괜찮다고 말해줄 것 같다고. 그는 아파나죠. 당연히 잊지 말아야죠,라고 말했다. 퇴근하며 우리는 다음 어느 날 퇴근하고 그녀를 만나러 가기로 했다.
어쩌면 혼자서 수도 없이 무너졌을 우리가, 아무렇지 않을 수 없는 일을 아무렇지 않은 척 애쓰며 혼자라면 무너질 것 같은 서로를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요. 우리 같이 가요. 그녀에게 가요.
그는 지하철로 나는 주차장으로 갔다. 함께 나누었던 슬픔이 제자리를 찾아갔다. 우리는 제 몫의 슬픔을 한 아름 안아 들고 헤어졌다. 그녀를 생각하면, 이 슬픔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고운 단어로만 그녀를 기억하고 싶다. 그녀를 수식하는 모든 것 중에 조금이라도 까만 것이 있다면 애를 써서라도 떼어주고 싶었다.
세상에 좋기만 한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그런데 그녀는 저에게 좋기만 한 사람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