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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다인 Oct 26. 2024

읽고 쓰는 존재 by.가영

어릴 적 제가 기억하는 엄마의 방은 이렇습니다. 아버지는 집에 잘 들어오시지 않았기에 ‘엄마 방’이라 불렀던 그곳엔, 가운데에 큼지막한 침대(지금 생각해보면 아마도 퀸사이즈 정도)가 창문과 마주 보도록 놓여있습니다. 침대 옆에는 원목으로 된 협탁이 있고 그 위에는 연주황빛을 은은하게 뿜어내는 스탠드가, 스탠드 옆 조금 남은 공간엔 엄마가 읽다 만 책이 놓여있습니다. 엄마는 책갈피를 잘 쓰시지 않았던 것 같아요. 엄마에게 읽힌 페이지의 앞부분은 동그랗게 말린 채 아직 읽지 않은 페이지 뒤로 넘어가 있습니다.

      

엄마 방에서만 느낄 수 있는 그 공기를 기억해요. 학교에서 돌아오면 자주 엄마 방에 들어가 놀았거든요. 남동생은 이미 책가방을 던지고 놀러 가고 없는 텅 빈 집에서 저 혼자 놀 거리는 많았습니다. 엄마의 화장대 서랍도 열어보고, 옷장 안 셔츠도 꺼내 입어보고, 책상 위의 서예 도구, 하모니카까지 다 한 번씩 만져봤죠. 그렇게 호기심을 채우고 나면 엄마의 푹신한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어요. 엄마 냄새가 나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한 바퀴 뒹굴고 나면 시선은 엄마가 읽던 책에 머뭅니다. 열려 있던 페이지에서 몇 문장을 읽어보지만, 모르는 한자어가 많아 무슨 내용인지 도통 읽히지 않습니다. 동그랗게 굳어버린 책의 표지를 넘겨 제목을 읽어봅니다.      

저자는 이문열. 제목은 <사색>. 사색이 뭐지? 하며 원래 있던 그대로 제자리에 놓던 기억. 그 기억은 어제의 일처럼 선명하게 재생되곤 합니다. 책을 좋아하고 자주 읽었던 엄마는 뭔가를 자주 쓰시기도 하셨던 것 같아요. 책상 위 화선지들은 먹 냄새를 품은 채 뜻 모를 한자들을 가득 담고 있습니다. 또 그 옆에 4등분으로 접혀있는 신문지엔 누군가와 전화통화를 하며 쓴 듯한 낙서와 전화번호가 여백을 따라 이어져 있습니다. 엄마의 다이어리도 보입니다. 침대 협탁위의 책처럼 역시 펼쳐진 상태로 뭔가가 적혀 있습니다. ‘소야볶음’같은 반찬 레시피들 그 뒤로는 시처럼 보이는 문장들이 쓰여 있습니다.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누군가의 글을 필사한 게 아닌, 엄마가 쓰신 글이라는 걸 느낌으로 알 수 있습니다.     


어느 한 시점을 이토록 세밀하게 기억하는 건 아버지를 닮은 것 같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1996년 몇 월에 너와 낚시하러 갔었다. 너는 그때 빨간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고 네 동생은...’ 하는 식으로 회상하곤 하셨죠. 그런 기억력 덕에 떠올릴 수 있는 소녀 시절의 저는 참 열심히도 엄마의 흔적을 찾았던 것 같아요. 너무 뒤적거린 것 같아 엄마께는 죄송하지만 ‘글을 읽고 쓰는 걸 좋아하는 건 엄마를 닮았다’라고 쓸 수 있는, 저의 일부와도 같은 기억이랍니다.     


돌이켜보면 항상 글을 쓰며 살았던 것 같아요. 자기 위로의 글, 나를 먹여 살리는 글, 상상의 글…. 참 다양한 목적과 이유로 글을 써 왔지만 ‘나’라는 개인의 서사를 담는 과정은 언제나 동일했던 것 같습니다. 내 안에서 어떤 울림이 생기면 그것을 글로 쓰고 싶다는 욕구가 일어나고 숨 쉬듯 자연스럽게 글이 써졌죠. 온전히 나 자신과 마주할 때의 고요. 그 고요 속에서 길어 올린 목소리가 적절한 단어와 문장이 되어 눈 앞에 펼쳐질 때의 쾌감, 자연씨도 잘 아시리라 생각해요.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글 쓰는 순간에 몰입된 그 상태를 좋아합니다. 몰입은 많은 것들을 가능하게 하죠. 평소엔 잊고 살았던 오래된 생채기를 들여다볼 수도 있고, 완전히 다른 곳에 가 있는 듯한 기분에 고립감이나 외로움을 잠시 잊을 수도 있고, 쓰기 전에는 몰랐던 사실을 갑자기 알게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뭔가 무미건조한 기분이 들 때면 무작정 메모장의 빈 페이지를 열어 뭐라도 끄적여 보는 습관이 생긴 것 같아요.     


그런데 잘 아시죠, 아기랑 있으면 잠시 끄적이기조차 쉽지 않다는 것. 아기가 신생아 때부터 누적된 피로가 온몸에 덕지덕지 붙어 머릿속엔 온통 ‘쉬고 싶다’ 밖에 떠오르지 않는데 무슨 글이랍니까. 그런데 그럼에도 계속 썼어야 했다는 게 지금의 생각입니다. 저를 너무 돌아보지 못한 탓에 심한 산후우울증이 찾아 왔으니까요. 당시 토해내듯 쓴 일기를 보면 그저 하루를 견딘다는 느낌만이 가득합니다. 과거 저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또다시 ‘최선을 다하는 나’만 있고 ‘나를 챙기는 나’는 부재한 상태가 되어 있었죠.     


다행히 좋은 의사 선생님을 만나 약을 잘 챙겨 먹다 보니 조금씩 안정이 되기 시작했고 육아 외에 나를 위한 뭔가를 해볼 에너지도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선생님께선 아주 조금씩이라도 나에게 성취감을 줄 수 있는 일을 해보길 권하셨어요. 그래서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죠. 처음엔 그저 깜빡이는 커서만 멍하니 응시하다 노트북을 닫았습니다. 뭘 써야 할지 아무 생각이 나질 않았는데, 그날 갑자기 물 흐르듯 글이 써졌습니다. 우리가 함께 유모차를 밀며 아침 산책을 다녀온 날(C아파트 2단지 뒷길을 걸었던 날)이었죠. 그날 산책에서 돌아와 졸려서 칭얼거리던 단우를 재우고 샤워를 한 뒤 두어 시간 남짓 쭉 글을 썼답니다.      


오래전부터 미뤄온 글이었어요. 머릿속에서 맴맴 돌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써낼 수는 없었던 이야기였죠. 러프하지만 일단 하려는 얘기는 다 썼다 생각하고 뿌듯해했는데, 갑자기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감정에 혼이 나간 듯 오열하고 말았습니다. 그 감정에 이름을 붙인다면 ‘지난한 뭔가를 결국 했다는 후련함 내지는 해방감’ 정도로 설명할 수 있겠네요. 만성 비염이 있는 저는 그 울음으로 엄청난 코를 풀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한껏 코를 풀고는 책상에 한가득 쌓인 휴지를 휴지통에 던져넣고 찬물로 세수를 했습니다. 그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멍하게 로션을 바르던 중 단우가 깼고, 정신도 확 깼죠.  

   

아마 그 무렵이었던 것 같아요. 자연씨가 카톡으로 언니랑 같이하고 싶은 것이 있다고 말했을 때가. 참 오랜만에 가슴이 쿵쾅거렸답니다. 때마침 에너지도 올라왔겠다 그게 뭐든 무조건하리라 하는 마음으로 기다렸는데 웬걸, 같이 글을 써보자는 거였어요. 서간문 형식으로 글을 쓰자는 아이디어였고, 언젠가 이런 작업을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저는 자연씨의 제안이 뛸 듯이 기뻤답니다. 아. 진짜 이 사람. 어쩜 이럴까. 저는 그 타이밍의 적절함과 자연씨의 담대함에 놀라며 냉큼 좋다고 답했죠.  

   

그때가 우리가 처음 만난 날로부터 2주 정도 됐을 때의 일이었어요. 3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본다면 2주 전 공원에서 알게 된 동네 친구와 글을 쓴다는 게 가능할까 싶지만, 그동안 우리에게 일어났을 화학적 반응을 생각해본다면 그저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운 좋게도 우리 둘 다 책을 써서 서로를 제법 깊이 읽을 수가 있었죠. 저는 자연씨가 쓴 책으로부터, 자연씨는 제가 쓴 책으로부터. 우리는 각자 공들여 쓴 문장으로 채워진 지면에서 우리의 과거와 빛나던 한 시절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책이라는 흔하지 않은 방식으로 말이죠. 

    

사실 전 자연씨의 책을 읽고 여러 번 놀랐답니다. 책을 읽는 동안에는 ‘이렇게 멋진 사람이라니...’ 하고 감탄했고, 책을 다 읽고 나서는 자연씨와의 첫 만남에서 뭔가 다른 아우라를 감지했던 저의 직관에 고개를 끄덕였답니다. ‘역시 이유가 있었어.’하고 말이죠.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묘하게 대비되는 저의 책을 떠올렸어요. 지금은 같은 동네에 사는 우리지만, 과거에 우리는 서로 다른 반구에 사는 듯 완전히 다른 지점에 있었죠. 저는 테헤란로에 있는 어느 고층 빌딩에. 자연씨는 바다 위 크루즈에. 그런데 어딘지 겹쳐지는 부분이 보이더라고요.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는 것. 그 지점에서 ‘자기다움’이라는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살아온 배경과 방식은 다르지만 ‘자기다움’을 향해 모험과 여행을 해왔다는 점은 같았죠. 그래서인지 자연씨가 같이 글을 쓰자고 한 제안은 너무나 자연씨다웠어요. 멋지고 흥미로운 걸 잘 발견하고 주저 없이 도전하는 개척자 같은 면모가 현실에서도 그대로였죠.      


우리가 같이 글을 쓰면 어떤 게 나올까. 앞으로 우리가 펼쳐낼 지면들을 상상했습니다. 대비가 강한 색채 속에 은은한 중간색들이 촘촘하게 자리 잡은 인상파의 그림이 떠올랐어요. 또, 지금이 아닌 언젠가 같이 해보면 좋겠다 싶은 아이디어들도 연이어 떠올랐죠. 

글쓰기를 시작하고 몇 주가 흐른 지금도 처음과 크게 다르지 않아요. 육아하며 글 쓸 시간을 마련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생각보다 틈새 시간을 잘 이용하는 우리를 보며 역시 하길 잘했다고 생각했어요(물론 안 할 생각도 없었지만). 혹여라도 아주 예기치 못하게 우리의 글쓰기 완주가 잘 안되더라도 괜찮다, 시도 자체를 그저 몇 번이고 칭찬하고 싶다, 그런 마음입니다.    

 

글을 쓰는 시간도 좋지만, 무엇보다 좋은 건 갓 지은 밥처럼 따끈한 자연씨의 글을 읽는 시간이에요. 나와 같은 듯 다르고, 다른 듯 같은 우리의 이야기가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질 때의 즐거움은 저만 맛볼 수 있는 행복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러니 꼭 책으로 만들었으면 해요. 블로그, 인스타그램, 스레드, X. ‘모두가 작가인 시대’라지만 실제로 내 글이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완성된 ‘책’이라는 형태로 누군가에게 가닿고, 그것이 다시 내 삶으로 되돌아오는 경험은 아주 귀하고 특별하니까요. 하물며 ‘종이’라는 물성이 갖는 매력은 말하면 입이 아프죠. 무엇보다 우리는 책을 무척 사랑하는 사람들이니(!) 어떻게든 책으로 펴내리라 생각한답니다. 

    

얼마 전(얼마 전이라기엔 벌써 3주가 지났네요) 제가 부산에 갔었잖아요. 꼭 오늘처럼 부산에 비가 쏟아지던 날. 엄마는 출근하시고 단우는 잘 때 엄마 방에 잠시 누워봤습니다. 엄마 방 풍경은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해요. 퀸사이즈 침대가 창문을 등지고 있는 것 외엔 크게 달라진 게 없었죠. 그날 엄마 방 침대 협탁 위엔 목이 자유자재로 구부러지는 LED 스탠드와 저의 책 <리셋, 다시 나로 살고 싶은 당신에게>가 올려져 있었습니다. 부산에 내려오기 일주일 전쯤 엄마께 자연씨와 함께 글을 쓰고 있다는 얘기를 했었죠. 그때 엄마는 약간 설레하셨어요. 그리고 그다음 날 엄마는 “어젯밤에 네가 쓴 책을 오랜만에 다시 읽어봤어.”라고 하셨습니다. 그 대화 때문인진 몰라도, 딸이 쓴 책이 머리맡에 올려져 있는 엄마 방의 풍경은 어린 시절의 기억보다 더 아련하게 남았습니다.      


아마도 눈 내리는 겨울 즈음이 될까요. 엄마 방 침대 머리맡에 우리가 함께 쓴 책이 올려져 있는 장면을 상상해봅니다. 이번에는 예쁜 책갈피도 같이 드려야겠어요.         


 

나의 첫 글쓰기 동료에게

고마움을 담아.     

가영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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