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점과 진실

by jungsin


1은 사실, 2와 3은 관점, 4는 해석 혹은 진실에 대한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1. 나갔다 와서 할게요. 다녀오겠습니다. 나는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도망쳐 나갔다. 이거 쓰고 나가. 아버지께서 소리쳐 크게 말씀하셨다. 집안일과 관련된 서류였다. 나는 더 재빠르게 나갔다. 못 들은 척 얼버무리며 나가 현관 앞에서 검은 구두를 찾았다. 긴박했다. 아버지가 쫓아 나오시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오늘따라 요즘에 늘 신는 검은 구두가 안 보였다. 아버지가 문을 여셨다. 일그러진 표정으로 가죽 재킷을 붙잡고 당기시며, 쓰고 나가야 돼 말씀하셨다. 아니, 나갔다 와서 할게요. 약간 힘을 써 도망치듯 나가려다가 그만뒀다. 못 이기는 척 다시 들어왔다. 여덟 시까지 할 게 있단 말이에요. 아이, 이거 하고 나가면 되잖아. 나는 들어오는 척하다가 다시 돌아서 도망쳐 나갔다. 이번에도 현관 바닥에 검은 구두는 안 보였다. 양말만 신은 채 대문까지 우선 도망쳐 내려갔다. 저런다니까. 왜 이걸 안 쓰려고 해. 아버지의 말씀이 들렸다. 내가 나간 줄 알고 포기하신 듯했다. 나는 살금살금 올라가 고양이처럼 샌들을 들었다. 얇은 봄 양말에 샌들을 신었다. 멍하니 걸었다. 계속 걸었다. 영혼이 없었다. 마음은 엉망진창이었는데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걸었다. 정말 영혼은 없이 몸만 걸어갔다. 애초 집에서 휴식을 취하며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가 스케줄에 딱 맞게 출발했었다. 그러나 이렇게 그보다 조금 늦게 나왔고, 따라서 이미 보려던 일은 그르쳤고, 그에 따라 목적지가 사라졌다. 나의 우주 스테이션과 같은 곳인 카페에 들어갔다. 두 번째 스케줄을 거기서 소화할 예정이었다. 줌으로 하는 신앙 독서 모임이었다. 가방을 내려놓고, 우선 화장실에 갔다. 이 이야기의 하나의 챕터가 끝났다고 볼 수 있다. 사실은 이렇게까지만 묘사한다.




2. 나의 관점. 간단히 서명하고 지장을 찍으면 되는 것이란 걸 난 잘 알고 있었다. 언제까지 하면 되는지도 대략적으로 알고 있었다. 꼭 오늘까지 써야 할 필요는 없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반복해 두 번 세 번 쓰라고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말씀에 저항하고 싶은 자신을 느꼈다. 이 부분이 나도 신비로운 지점이다. 나조차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다만 그래야 한다는, 이 권위적인 흐름에서 비켜서고 싶다는 우주적 충동을 느낄 뿐이다. 사실 나는 두 번 세 번 같은 말씀을 하시는 아버지의 말씀에 이미 피로감을 느꼈다. 그래서 쉬면서 마음을 다독이며 정리해야 했다. 그러한 심리적 혹은 신앙적 작업이 끝난 후에야, 하려던 일의 마지노 선의 시간이 임박해 일어났다. 본능적으로 비밀 첩보 작전을 펼치듯 거실과 현관을 통과해 나가려 했다. 그러나 예상보다 아버지의 저지선이 강력했다. 그토록 부자연스러울 만큼 당신의 의지를 표현하고 관철시키실 줄 예상하지 못했다. 정말 급할 것 없고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당신의 성격을 따라서 적당한 고집을 피우실 것이리라, 전체적인 상황은 다만 그 정도일 것이리라 짐작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아버지는 적당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여기서 잠시 아버지의 캐릭터 설명이 필요하다. 아버지는 순박하고 선량하신 분이시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응큼한 구석도 있으시다. 응큼하다는 것은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다. 아버지 역시 ‘사람’이라는 의미가 된다. 모든 사람은 응큼함이 있고, 그건 인격적으로 지극히 자연스러운 한 단면이다. 나는 아버지는 그런 분이 아니셨으면. 사람이 아니셨으면 했다. 나 역시 응큼한 면이 있다. 나는 사람이다. 그러나 난 왜 아버지는 사람이 아니셨으면 했을까. 어쨌든 나는 응큼하게도 오기를 부려 몰래 아버지를 좌절시켜보고 싶었다. 아버지의 궤도를 벗어나 나의 생각과 나의 의가 맞았다는 것을, 그러니까 그런 서류 꼭 오늘까지 하지는 않아도 되는 일이었고, 급하고 스트레이트한 아버지 성격의 문제였음을 은하계에 밝히 드러내고 상기시켜 드리고 싶었다. 여기까지, 나의 응큼함이다.




3. 아버지의 관점. 아버지가 서 계신 곳에서 생각해보았다. 아버지는 왜 이렇게 서두르셨을까.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나는 생각보다 먼 과거로 돌아가야 한다. 아버지는 아득하고 그윽한 옛날 첩첩산중 시골의 농사꾼의 첫째 아들이시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세계는 충청도의 한 작은 시골이 전부셨다. 지극히 폐쇄적이고 유교적인 세계. 그 속의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아버지가 계셨다. 그 아래로 작은 아버지 세분이 계셨다. 아버지는 태생적인 것인지 후천적인 것인지 모를 고지식함 덕분에 아버지의 부모님으로부터 인정과 사랑을 많이 못 받으셨다. 그건 둘째 작은 아버지나 셋째 작은 아버지도 마찬가지셨을 듯하다. 그러나 누구도 아버지만큼 외롭진 않으셨을 것이다. 아버지는 정말 지독히도 외골수이시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사랑의 에너지는 자연스레 아들들 중 가장 사랑스러운 구석이 있고 말이 통했던 막내 작은 아버지에게 가셨던 것 같다. 실제로 조카들이 느끼기에도 막내 작은 아버지는 사형제 중 가장 돋보이는 센스와 명민한 감각을 갖추고 계셨고, 또 당대에는 실제적으로 신세대에 속하셨다. 그래서 나는 조카들에게 엄하기도 했지만 위트와 인간미가 있었던 작은 아버지를 좋아했다.


그러나 우리 아버지는. 우리 아버지는, 그렇지 못하셨다. 어떤 연유에서인지 아버지의 세상은 사랑과 유머, 안전함보다 두려움과 위험, 경쟁, 성공 등이 당신의 세계를 지배하는 언어이셨던 것 같다. 정말 가난하셨던 것이다. 당신은 어떤 치열한 투쟁을 하셔야만 했을 것이다. 사랑이든 인정이든 존중이든 승리든 성공이든. 당신은 한 인간의 중요한 삶의 단면에서 가난하셨던 것 같다. 물론 성격이 급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성격이 여유롭다든지 급하다는 식의 표현은 언제나 본질을 숨기는 경향이 있다. 억척스러움과 안달복달함, 조급함과 같은 묘사는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일 뿐일 것이다. 아버지는 본질적으로 사랑의 결핍이 있으실 것이다. 아버지의 세계는 비좁으실 것이다. 본질적으로 두려움과 잘잘못의 문제들 같은 것이 아버지에게 강력한 영향을 끼치고 있을 것이다. 당위와 책임, 경직성 같은 것이 아버지의 세계관 한가운데에 있을 것이다. 사랑을 받는 것에도 주는 것에도 한없이 서투르기만 하실 것이다.


아버지는 이 서류와 관련된 일로 아마 작은 아버지와 통화를 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자유보다 두려움에 기인한 어떤 긴박한 책임감을 느끼셨을 것이다. 그토록 간단했던 나의 서명과 지장은 그러한 맥락에 있었다. 나의 이야기는 뒤로 하고. 나에게도 신비한 감정이 있었지만, 나에게 절실히 필요했던 것은 아버지에 대한 이해였다. 이해 없이 애초 의미 있는 사랑도 불가능했고, 이해의 토대 없이 아무것도 실은 있을 수가 없었다. 단순했다. 아버지에겐 사랑이 필요했다. 사랑이 없는 자리에 불행 말고 무엇이 또 있을 수 있을까.


아버지와 함께 한 우리 가족은 아버지의 가난함에서 자유롭기가 힘들었다. 아버지의 가난함은 자칫 그대로 대물림될 수 있었다. 그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버지의 아들은 전혀 다른 영혼이었다. 어제 저녁 있었던 일은 그토록 멀리 있는 두 영혼 사이의 진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단순히 옳고 그름이나 시시비비나 논리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접근하는 것은 무의미했다. 몸과 감정의 문제 이전에 영혼의 문제가 있었다. 이토록 복합적이고 섬세한 현실 공간 속, 몸과 감정의 일들은 시간을 이해하고 있는 영혼의 대답을 요구했다.




4. 여기까지가 나의 이해다. 이것은 완벽한 이해일까. 당연히 그렇지 않을 것이다. 나는 정말 빙산의 일각의, 일각의 일각을 이해했을 뿐일 것이다. 관계라는 것이, 연애라는 것이, 사람이라는 것이, 한 사람의 마음의 역사라는 것이 얼마나 깊고 다층적이고 신비로운 것인지.


한 시장 후보가 기억 앞에서는 겸손해야 한다는 명언을 남겼는데, 그가 정치적 야심과 열등감, 질투와 같은 인간적 본심 앞에서 겸손했더라면 얼마나 더 매력적인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사람 앞에서. 사람 옆에서. 모두 사람인. 그저 바람과 빛에 흔들리는 연약한 사람일 뿐인. 사람의 마음 앞에서, 나와 너의 마음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이러한 맥락 안에 있다. 사실이나 현상이나 욕망이나 관계보다, 영혼이 울부짖는 절규나 속삭임에 온 신경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도. 내가 읽거나 쓰는 일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는 이유도. 말하기보다 듣기, 쓰기보다 읽기에 더 예민하게, 더 많은 신경과 시간을 쏟아야 한다고 느끼는 이유도 이러한 맥락 안에 놓여 있다.


읽는 것이나 쓰는 것은 모두 침묵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읽기와 쓰기는 겸손히 무언가를 이해해 나가는 과정이 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요건을 갖추고 있다. 그것이 비록 완전할 수는 없어도 꽤 완전한 어떤 감각과 언어를 지향하기에, 쓰고 읽는 행위에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다. 말하기는 그러한 과정의 충분한 숙성이 전제되었을 때 맛깔난 표현이나, 최소한의 사려 깊은 표현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대의 말하기는 사실상 읽기와 쓰기, 생각하기를 무시한 채 행해지고 있고, 따라서 그것은 너무 가벼운 나머지 거의 언제나 낄낄거리며 시간을 낭비하는 일을 동반하게 되고, 그것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삶이 아니다. 지금도 이렇게 글을 쓰면서 부족하지만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자신의 감정을 다독일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신비로운 모순으로 가득 찬 사람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논리와 시시비비와 규칙이 아니라, 이해와 사랑과 위트다. 강박적인 옳고 그름, 시시비비의 문제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종교나 문학이나 철학은 언제나 내게 그런 숙제를 안겨준다. 그러나 종교는 자꾸만 부정적인 아버지성으로 다가왔고, 따라서 내가 문학이나 철학에서 쉬고 싶어 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어쩌면 사실 윗세대의 영향을 받아 순박한 인격적 결이 진했던 나는 애초 성서와 교회와 목사면 충분했을 법도 한데. 몇 페이지 읽지도 못하고 책장을 덮어버리곤 하면서도 내가 막연히 문학의 세계를 향해 그윽한 호기심을 느끼는 것, 그토록 무제약적인 언어의 틈에서 숨을 쉬려 하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자신감과 확신으로 칠판을 가득 메우는 노련한 신학자보다, 칠판에는 몇 글자 쓰지도 않고 한숨과 주저함, 질문과 적막함으로 공간을 가득 메우는, 아직 풋풋하고 설익은 젊은 철학 강사에게 더욱 진정한 매력을 느끼는 것도 다 그런 연유다.




아버지 사랑해요. 미안해요. 말로는 차마 못하지만 이렇게 글로 고백합니다. 진심이에요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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