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어진 삶
안타깝다. 새 책의 작은 흠쯤이야 관대한 편인데, 이건 좀 견디기 힘들다. 책장이 휘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마음이 휘어지는 것 같다. 아직 통계가 많이 부족하기는 하지만 지금까지 k문고는 바로드림보다 배송이 책의 상태가 더 좋았다. 배송은 매번 포장도 너무 튼튼하고 세심했고, 책은 언제나 깨끗한 상태였는데, 바로드림은 작은 흠이 보이는 경우가 좀 있었다. 관용의 원칙을 적용해 넘어가기도 했고, 조지 오웰 에센셜은 중대한 결함(책장 옆면이 오염됐었던가?)이 있어 교환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두 번째 교환 충동. 새 책의 휘어짐이라니.
이즈음 광화문을 정말 많이 갔다. 스터디. 봄 여흥. 그리고 마음이 허해서. 잠시 전두엽의 기어를 풀어놓고 있다가, 정신을 차려보면 k문고였다. 나의 중립 기어는 점점 k문고가 되어가고 있었다. 초등학교 사 학년 때는 주공 아파트 칠백이십 동 앞 놀이터였고, 오륙 학년 때는 학교 운동장, 중 일 때는 주공 팔 단지 농구장과 신세계 오락실(안에 있는) 탁구장, 대학 때는 캠룸이라 불리는 동아리방과 기도실(주로 자러 갔다)이었다.
사실 작년까지만 해도 나는 k문고의 유저가 아니었다. 칠 년 가까이 다른 서점은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a서점 하고만 거래했다. 어렸을 때는 떡볶이 집부터 시작해, 카페, 심야 라디오 채널, 그리고 가만히 보면 이성 여자 생물 사람까지. 한 곳이나 한 사람을 질릴 때까지, 아니 질려도 한결같이 늘 새로운 마음으로 찾는 스타일이었다.
떡볶이 국물이 맵고 맛있으면 그냥 그 집을 계속 갔다. 온 세계에 떡볶이 집은 이제 나에게 그 집뿐이었다. 누군가 좋으면 이제 그녀가 우주 비행사가 되어 대기권을 벗어나, 머나먼 우주비행에 성공했다는 소식이 들릴 때까지, 발길에 차여 쓰러질 때까지 좋아했다. 한 번 좋아하면 그녀를 품 안에 꼭꼭 넣어두고 자결용 단도처럼 비장하게 꺼내보곤 했다. 개로 태어났다면 십중팔구 셰퍼드였을 것이다 난.
휘어진 책장을 펼쳐 조금 읽어보니 정말 그냥 일기였다. 기대와 달리 싱거워 실망스러웠던 첫인상. 그런데 무념무상으로 조금 더 읽어나가자 조금씩 상큼한 과즙이 베어 나왔다. 문장의 리듬이 재밌고, 위트가 흘러서 점점 단 침이 삼켜졌다. 그럼 됐다. 잘 산 책이다. 쉽고 재밌게 술술 읽혀서 이불 속에 숨겨놓은 개껌처럼 이따금 이 책을 물고, 침을 질질 흘리며 읽을지도 모르겠다는 느낌. 충실한 셰퍼드의 개껌이 될 것만 같았다.
좋은 이야기를 접하거나, 문장이나 리듬이 단 글을 보거나, 좋은 책을 집어 들어 만지면 잔잔히 설레는 것을 느낀다. 오로라 폭풍을 보는 것만큼 강렬하지는 않아도 이렇게 설렘을 느낀다면, 그건 나의 중립 기어가 될 확률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TVN 유퀴즈 이직의 기술 편을 정말 재밌게 봤다. 특히 진기주 배우의 인터뷰가 좋았다. 정말 매력 있었다. 사람이 별처럼 총총 빛났다. 그녀가 오로라처럼 빛났다면 같은 회차 출연자였던, 천체 사진가 권오철 작가는 실제 오로라를 찍으면서 살고 싶어 오랫동안 억지로 다니던 회사를 그만둔 사람이었다. 그의 인터뷰 한 마디 한 마디는 정말 인상적이었다.
“좋아하는 건 이유가 없어요. 싫어하는 데는 이유가 있지만, 좋아하는 데는 이유가 없어요.”
“어차피 인간은 우주 먼지거든요. 어차피 우주 먼지가 될 거라면 행복한 우주 먼지가 되자. 이건데, 행복한 우주 먼지가 되려면 하고 싶은 걸 해봐야 돼요.”
“그거(오로라 폭풍) 보면 거의 울고 사람이 못 움직입니다. 그때 어떤 느낌이었어요? 물어본다면 무의미해요. 죽기 전에 한 번은 꼭 봐야 해요.”
오로라처럼 휘어진 새 책을 보며, 휘어져가는 새 인생을 보며, 오로라보다 신비로운 삶의 광휘 앞에서 다만 말없이 경탄하게 된다. 신이 아닌 이상 내가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다만 기도하며 그 별빛 속으로 걸어 들어가, 살 수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