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아가미로 숨 쉬며 이해한다는 것
가능성
카뮈의 이방인을 요약한 짧은 글을 좀 보았다. 쏘시오 패스처럼 보이는 주인공 뫼르소에게 오묘하게 감정이입이 되었다. 심지어 어떤 대목에서는 그에게 공감이 가기도 한다.
형사법의 기준에서 뫼르소는 심각한 위법 행위를 저지른 흉악범이고, 신학의 기준에서 보자면 회심의 기회조차 내버려 구원의 기회가 거의 없어 보이는 냉담자일 뿐이다. 그러나 문학은 법과 신학이 판단을 끝내버린 뫼르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아무도 서보려 하지 않은 한 사람의 자리에 서본다. 불온하고 위험한 한 ‘사람’의 입장에 서서 새로운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다. 뫼르소라는 사람은 어느 범주의 밖에 있는지, 그 범주란 것은 얼마나 불완전한 것인지, 나는 그처럼 이방인으로써 살아가고 있거나 살아온 적이 없는지, 자꾸만 예민한 양심을 간지럽히고 속삭인다. 그래서. 이러니까 내가 자꾸자꾸 문학과 언어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이해하고 싶어서. 더 넓게 존재하고 싶어서.
난 늘 호기심을 가지길 원하고, 배우고 싶어 하는데, 그건 내가 부족하단 것을 알기 때문이기도 하고, 내게서 스스로 더 많은 가능성을 보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다. 때로는 아직 자신도 모르는 어떤 가능성이 꿈틀거리고 있는 것처럼 느끼기도 하고. 흔한 격언처럼 정말 내가 얼마나 모르고 있나를 아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자신이 안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더 이상의 가능성이 없다. 새로운 가능성은 아직 난 잘 모르고 있다고,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아직 너무나 많다고 믿는 사람에게 열려 있다.
레비오사
나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는 언어를 확장해가고, 자신과 타인과 세상에 관해 얼마나 모르는지를 깨달아가는 과정과 문학의 세계는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전통 신학의 권위에 기대 그것의 세례를 받고, 어쭙잖게 가르치는 자가 되어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기가 죽기보다 싫었다. 그보다 보수적인 틀을 부수고, 제의적인 시간이 안전하게 무한히 반복되는 블랙홀을 벗어나 미답의 시간 속으로, 우주처럼 새까맣고 적막한 시간을 향해 모험해보고 싶었다. 남루한 현실 속에서도 내 언어의 세계는 넓혀가고 싶었다. 언어를 넓혀서 이해를 넓히고, 그렇게 결국 존재를 넓혀가고 싶었다. 공간이 아닌 시간을, 권위가 아닌 자유를 넓혀가고 싶었다.
주변에서 가진 자들이 거들먹거리는 것들을 보며 그들이 가진 것보다 그들이 어떤 면에서 가난한지 집요하게 찾아내어 그것을 노려보려 했고, 내가 자신도 모르게 위축될 때 나에게 없는 것보다 내가 가진 것은 무엇인지를 보려 했다. 물론 어떨 때는 그 누군가 좀 부럽기도 했다. 거의 항상, 거의 매 순간, 자신이 답답하고 싫었다. 내가 잘하고 있다고 느낄 때는 드물었다. 실제로도 진짜로, 진짜 진짜 나는 대부분 무진장 잘못했다. 잘못할 때가 대부분이었고, 한심한 순간이 너무 많아서 그것들을 세는 것조차 포기했다.
하지만 무언가 표현하기 어려운 한 가지는 놓치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것은 이해해가는 것이었다. 많은 싸움에서 지고, 많은 것을 잃어버려도 이해하게 되면 다 지는 것이 아니었다.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놓쳤지만 이해하고 있다면 정작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었다. 고통도, 참담한 좌절도 그만큼 넓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마법처럼 뒤바뀌었다.
그런 마법을 부리려면 한 가지 전제가 필요했다. 이해했다면. 다 이해하지 못했더라도, 빼꼼히 문을 열고 이해의 광활한 들판을 보았다면 나의 존재는 넓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 모든 것을 도울 수 있는 도구로 문학을 선택했다. 명백히 이용하려는 의도였다. 그런데 문학 자체가 살아있는 생명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느껴진 후부터 조금 두려움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해서 화로 가득한 사이비 종교인이 되는 것보다는 덜 두려운 일이었다.
꿈
처음부터 나의 꿈은 구분하고 수납하는 것이 아니었다. 모눈종이처럼 나뉘어 있는 칸에 알맞게, 어떤 현상이나 사람들을 차곡차곡 채워 넣고 생각의 보석함을 잠가버리는 것이 아니었다. 사랑과 미움, 만남과 이별, 폰 번호 저장과 비 저장,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 매력적인 사람과 매력적이지 않은 사람,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그런 식으로 분류하고, 안전해지고, 주변 사람들을 안전한 곳에 피신시키면서 살아가는 것이 구원의 주서사일 리는 없었다.
심판의 홍수가 끝나고, 방주의 문이 열리고, 사슴과 코끼리와 사자가 답답한 배 속에서 방류되어 마른땅으로 뛰어나가는 장면이 내가 꿈꾸는 구원의 이미지에 훨씬 더 가까운 것 같았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 방주 안에 들어갈 수 있는지, 몇 마리가 들어가는지, 심판 날은 언제 오고, 언제 끝나는지, 누가 훌륭한 사역자인지, 무엇이 어떻게 옳고 그른지, 잘했고 잘못했고, 자꾸 그런 것을 따지느라 내 존재는 왜소해져만 가기만 했다.
이해한다는 것이 물론 모든 어둠과 죄에 대한 면죄를 뜻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해조차 못한다면, 아무것도 이해하려는 생각도 하지 않고 오직 안전해지려고만 한다면, 그는 아직 하나님의 사랑을 충분히 배우지 못한 것이리라고 어느 정도 예단이 가능하다. 적어도 이해가 무엇인지 고민도 안 해본 사역자는 기본도 안 되어있는 사역자이리라. 많은 사역자들이 겉으로 보기에 자신감 넘쳐보이고 자신의 삶에 만족해 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행복해 보이지는 않는다. 어딘지 화가 나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화를 참을 수 없는 것이다. 몰이해의 상태로, 그리하여 영혼에 화를 가득 안고서 사랑하겠다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이야기다. 사랑하겠다, 교제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가스 라이팅 하겠다는 것이다. 이해라는 것은 그만큼 엄중하고, 중요하고, 또 아득히 넓은 주제다.
내가 얼마나 모르는지를 알아가겠다, 겸손히 이해하고 공감해 나가 보겠다는 태도가 기본이다. 성서는 공의와 심판을 말하고 있기도 하지만, 실은 그것들을 뒤덮고 삼켜버릴 만큼 온통 사랑과 이해를 노래한다(고 느낀다). 그런데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에는 관심도 없고 전체의 이야기 중 일부만을 나의 포부와 야망에, 성향과 취향에 맞게 채집하여 신념으로써 소유하는 것은 실상 신앙으로부터 더 멀리 도망가겠다는 것이다. 살자는 것이 아니라 다 같이 죽자는 것이다. 제대로 해보겠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행세만 해보겠다는 것이다.
복음의 지식을 배워서 공학적으로 가르치겠다, 공학적으로 가르치고 공학적인 대가와 존경을 받겠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난 그저 옳고 그름만을 논하겠다, 전통과 성취 속에, 안전한 곳에만 있겠다는 것은 사랑의 모험을 감행하라고 부르신 이의 원수가 되겠다는 것이나 다름 없다. 신념으로써의 믿음과 지식, 상과 벌, 행동함과 행동하지 않음, 빠짐과 건져짐, 불안함과 어떤 안전한 감각 같은 것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려고만 드는 것은 이해로부터, 신앙의 본질로부터 멀어지는 길이라고 느끼게 되었다. 어떤 연유에서든 그렇게 느끼게 되는 경험들을 지속적으로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이제 경직되어 굳어버린 복음주의자들의 언어로부터 도망쳐 달리게 된다. 정말 살려고, 살아보려고 달리게 된다. 하염없이 도망쳐 달리다 지쳐 그다지 힘도 없지만, 미약한 힘이라도 생기면 이제 나는 수납하기보다 이해해 나가는데 힘을 기울여보려 한다. 바르트가 ‘한 손에는 신문을, 한 손에는 성서를’ 하고 외쳤다면, 이제 난 남몰래, 나지막이 중얼거려본다. 한 손에는 이해를, 나머지 한 손에도 이해를. 양 발에도 이해를. 그렇게 신앙해도 지구는 둥글다. 그래도 하나님은 사랑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