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틀, 쓱싹, 웅얼, 뿅뿅의 숲
꿈틀꿈틀, 꿈틀이
하루 종일 사소한 것으로 고민했다. 오늘 나는 제조일자가 너무 오래돼 뭉쳐진 채 굳어버린 꿈틀이 젤리 같았다. 뒹굴뒹굴 꿈틀꿈틀 바닥과 하나가 되어 방에서 나오지도 못했다. 그러다가 별안간 현관문을 열고 뛰쳐나와, 오랫동안 사용해 바닥이 다 닳아 버린 샌들에 무작정 발을 끼워 넣었다. 그러니까 오늘의 햇빛이 30분쯤 남았을 때였다.
나는 완벽주의 성향을 가졌고, MBTI 성격유형은 F가 거의 만점에 가깝다. 나는 365일 조석으로 샤워를 하는 편이다. *특히 집을 나서기 전에는 각종 세정 도구를 사용해 오래도록 샤워를 한다. 그리고는 감성 그래프 지수와 피로 회복도가 정점에 이르러 외출에 최적화된 순간, 마침내 거칠게 벌컥 현관문을 열고 집을 나선다. 마치 구약성서에서 야웨 하나님의 진노가 어떤 분량에 가득 차면 이스라엘에게 어김없이 심판이 임하는 것처럼. 외출 자체가 대통령의 해외 순방이나 목사의 성례 집전처럼 하나의 예민하고 성스러운 의식과도 같은 것이다.
그 모든 것을 깨부순 것이 오늘의 외출이었다. #사악한 악당 무리에게 포위된 톰 크루즈가 몸을 던져 고층 빌딩의 큰 통유리벽을 깨고 탈출하는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의 한 장면처럼 벌컥, 와장창, 쨍그랑하고 나가 버렸다. 바깥은 햇볕의 따스함이 이제 사라졌고, 하늘의 노란 석양빛이 건물과 아스팔트 바닥에 내려앉아 있었다. 고민은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나에게는 그 무엇보다 햇볕이 중요했다. 그것은 오기와 승부욕 같은 것이었다. 상대는 없었지만 이기고 싶었다.
그냥 무작정 걸었다. 처음엔 관성에 이끌려 익숙한 방향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다가 조금 갈팡질팡. 그리고 이내 곧장, 발걸음을 돌려 아주 오랫동안 발걸음을 딛지 않았던 길을 향해 걸었다. 그곳은 나무와 새로 지은 아파트, 그리고 깨끗하게 옷을 입은 아이들과 점잖은 어른들이 거니는, 그리고 무엇보다 내 초등학교 시절의 특별한 추억이 깃든 동네였다. 비록 한낮의 햇볕은 아니었지만, 석양 볕은 기대보다 훨씬 달콤했다. 은은하게 몸을 간지럽히는 실바람의 맛도 낭만적이고 달았다. 기분이 서서히 점진적으로 들뜨고 있었다. 배가 좀 고프기는 했지만 원래 배고픔 따위 나에게는 그렇게 중요한 적이 없었다.
그렇게 어두운 개나리 빛 석양 아래에서 한 이삼십 분쯤 걸었나 보다. 그리고 카페에 들어갔고. 그리고 자리에 앉아, 바로 이렇게 글을 끄적이기 시작했다. 한 걸음 바로 옆의 긴 테이블 자리에서는 초등학교 6학년에서 중학교 1학년쯤 된 아들과 조금 늦은 나이에 그 아이를 가진 듯한 아버지가 편한 캐주얼 복장으로 나란히 마주 앉아 책을 보고 있다. 아까는 마주 앉은 채로 둘이 정겨운 셀프 인증샷을 찍는 것 같았다. 나는 그들 바로 옆의 긴 테이블 끝에 앉아, 통유리로 들어오는 어둑어둑한 석양빛을 느끼며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왜인지 너무나 평범하기만 한 이 순간이 정말 아름답고 좋은 장면이라고 느껴졌다.
이 정도만 쓰고, 이제 음료를 시켜볼까. 카페 앱을 열어 대단한 고민을 할 것 없이 아이스 케냐를 시켰다. 여자 크루에게 음료를 받으며 이 좋은 기분을 담아서 반짝반짝 웃는 눈빛으로 맞인사를 건넸다. 그녀도 나의 웃음에 담긴 밝은 기운을 다 느끼며 기분 좋아하는 것 같았다. 오늘의 커피인 케냐에 에스프레소 휘핑을 듬뿍 얹은 아이스커피의 감칠맛이 입안을 감돌며 삶의 의욕을 돋운다. 블루투스 이어폰에서는 김광민의 단조 곡 연주가 감미롭게 흘러나오고. 거의 완벽한 순간이다. 긴 하루 중에서 지금보다 더 완벽에 가까운 기분을 만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느껴질 만큼, 지극히 드문 행복감이었다. 고민은 그 안에서 비밀스럽게 해결되었다.
쓱싹쓱싹, 글쓰기
가능하면 매일 글을 쓰거나 읽으려고 노력한다. 쓰기와 읽기는 나에게는 무슨 의미일까. 사실 난 목마름을 느끼면 즉시 쓰고, 즉시 서점에 간다. 물을 마시고 시간이 지나면 화장실에 가듯, 일상을 살며 내내 깊숙이 느끼고 생각하다가 글이 마려우면 쓰는 것이다. 고래가 바닷속에서 한참 헤엄치며 숨을 참다가 물 위로 올라와 어푸우 하고 물을 뿜는 것처럼 글을 뿜는 것이다. 무의식적이고 자연스러운 행위였다.
글을 쓸 땐 주로 클래식이나 피아노 곡을 듣는다. 글을 쓸 때 음악을 틀어 놓으면 불안한 마음을 정돈하거나 글의 리듬을 짚어가는데 도움이 된다고 느낀다. 음악이 그러하듯 글에도 리듬이 있다. 또 이건 매우 은밀한 비밀인데, 삶에도 리듬이 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그 사실을 모른다. 두려움과 절망에 빠져 음악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그것이 해석이 불가능하다고 느껴질 만큼 복잡하기 때문이다. 삶의 리듬이란 대부분 음악이나 글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차라리 삶에는 그러한 것이 없다고 느껴질 만큼 복잡하다. 어쨌든 분명히, 저마다의 삶에는 복잡하고도 고유한 리듬이 있다. 내게도 고유하고, 복잡하고, 난해한 삶의 리듬이 있다. 일상은 너무나 소중한 것인데, 그 리듬을 잃으면 일상의 음악을 잃는 것이고, 음악을, 삶의 운율과 리듬을 잃어버린 일상은 살아갈 의욕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본능적으로 언제나 시간의 고유한 리듬을 짚어가고 싶어 한다.
특히, 무엇보다도 의미에 목말라 있다. 하루하루 일상의 작은 서사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그러려면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일상의 순간까지 서사화하는 것, 그리고 작은 서사들을 연결해나갈 리듬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니까 리듬을 짚어나가기 위해서 글을 쓰는 것이다. 그림을 그리듯 자유롭게 글을 쓰다 보면 어느새 흩어진 삶의 조각들 뒤에 숨은 리듬을 찾아내고, 의미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쓰거나 읽는 단순한 행위가 나에게 주는 위로는 크다. 난 내면이 풍성하기도 하고, 그에 반해 결핍도 강하게 느끼는데, 쓰기와 읽기에 대한 집착은 그러한 나의 특성이 반영된 것일 테다. 살아가며 몰두해 있을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은 짧디 짧은 우리의 삶과, 우리의 시간이 축복일 수 있다는 또렷한 증거들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니까, 잘하는 것은 하나도 중요한 것이 아니다. 몰두의 대상이 인위적이고 목적지향적인 것이 아닐수록 더욱 소중한 무엇이다. 아니 생성취는 섬광처럼 잠시 반짝이는 결과지만, 비생산적이고 지루하고 지난한 과정은 삶 그 자체다. 가령 사랑이 그렇다. 아니 오직 사랑인가.
웅얼웅얼, 책 읽기
나는 책을 좋아한다. 읽고 싶은, 또 읽어야 하는 책들을 읽으려고 부단히 노력하기도 한다. 나에게 노력한다는 말에는 함정이 있다. 그것을 지향한다는 뜻이지 그렇게 행동하고 실현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니까 나에게 있어 ‘노력’이란 단어는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변명이기도 하다. 어느 정도는 변명이지만, 실은 변명이라고 말할 필요도 못 느끼는, 무중력 상태의 즐거운 변명이다.
그러한 영역에서는 나 혼자만 우주인이 된 것 같다. 사람들은 논리적인 납득을 하려고 하지 공감하고 이해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어제 모임에서 한 자매가 나에게 최근에 읽은 책이 무엇인지 물었다. 나는 없다고 답했다. sns를 통해 익히 내가 책을 좋아하는 것으로 알고 있던 듯한 자매는 당황하며 몇 번을 물었다.
네? 책 좋아하지 않으세요? 그러니까 최근에 읽은 책이 있을 텐데, 그게 무슨 책이었어요? - (잠시 생각하고는) 없어요. - 자매, 말문이 막힌다. - 다른 형제. 분위기를 수습하려 다른 말을 하려 한다. - 나. 다시 이야기의 멱살을 잡고 화제를 원래대로 가져온다. 조금씩 펼쳐보고 웅얼거리기도 하지만 완독 한 책은 없고요. 사실 미칠 듯 매력적인 책이 아니라면 자기만족적 틀에 맞춰 완독 하는 일 자체를 별로 안 좋아해요. 책을 읽지 않고 책을 좋아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해요. 마치 여자랑 데이트는 잘 하지 않지만 여자를 맹렬히 좋아하는 일이 가능한 것처럼요. - 자매. 적당한 반응을 못 찾아 더욱 굳게 침묵하게 되고. - 형제. 하하. 분위기가 좀 이상해 지네요(경건하지 않다는 뜻이다). 하하하. 전부터 정말 재밌으신 분 같아요. 자연 같은 것 좋아하지 않으세요?
나는 오랫동안 성취에 지쳤다. 특별히 유별난 느낌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들 내면화된 피로감과 원천적인 불안함을 느끼고 있지 않은가. 조급함에, 쫓김에, 엘리트주의에, 성공주의적인 인과적 사고방식에, 선입견에, 줄 세우기에, 껍데기뿐인 삶에. 나에게 배움이나 읽기, 글쓰기는 그것들로부터 성별 된 영역이다. 내게 언어를 사용하는 모든 배움의 과정은 종교와 같이 이상적이고 성스러운, 불가침의 영역이 되었다. 공부조차 학교조차 사역조차 성공주의에 오염된 사람들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어이없을 수밖에 없었다. 책을 사지만 읽지 않는 것은 일종의 쾌감이다. 예컨대 그것은, 그토록 폭발성 유독 가스로 가득한 세상에서 무심하게 성냥불을 하나씩 켜는 일이다.
뿅뿅뿅뿅, 애착하기
성취주의의 궤도를 완전히 이탈하는 것은 내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나는 큰 성취에 집착하지 않는 대신 작은 것들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나는 어떤 식으로든 어떤 공백을 메워야 했다. 가령 강박적으로 너무나 작은 것들을 버리지 않거나, 남기지 않거나, 잃지 않으려 했다.
멤버십 적립이나 할인, 만보 걷기 포인트, 각종 쿠폰 기간 안에 사용하기, 음식 남기지 않기, 작은 옳고 그름에 예민해지기, 자꾸 미안하다고 말하기.. 등 나의 행동에는 확실히 미시적인 이상 강박 행동의 패턴이 있었다. 슬프고도 놀라운 것은 그것들이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너무나 작고 작은 것들이었다는 것이다. 아니러니다. 넓고 깊고 높은 것을 꿈꿨는데 이렇게 한심하게 왜소해지다니.
꿈틀거리고, 쓰고, 읽고, 애착하는 모든 행위. 그것들은 최종적으로 안식을 지향한다. 끊임없이 먹고 뒹구르고, 연소하며 시간을 지나는 동안, 나는 거의 모든 순간 완벽한 안식을 그리워한다. 살아있어 감사하다. 살아가며 대부분의 순간을 아직 깊숙이 안식할 수 없기에, 대망하는 안식이 아직 오지 않았기에 안식을 그리워할 수 있다. 정말로 늘어지게 쉬기 위해, 꿈틀거리며 고민하고, 의미를 찾고, 사랑하고, 애착하는 것이다.
* 느낌에 예민한 것이지 결벽증이 있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스케줄이 있는 날에도 정작 거울은 대충 보기도 한다.
#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에 정말 그런 장면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