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30호라고 할 때 나는 헬스 보이를.
개성을 마모시키는 알고리즘
나의 취향과 시간을 미디어가 지배한다는 느낌을 견딜 수 없다. 그중 하나가 자꾸만 노출되는 경연대회 우승자의 스토리나 음악이다. 음악 경연 프로그램은 스토리를 엮어 만들 수밖에 없다. 스토리가 주는 감동의 진정성이나 강도는 시청률과 음원 수익 등을 좌우한다. 심사위원들의 한 마디 한 마디는 스토리를 만들어내고, 시청자들은 자신의 눈이 아니라 심사위원의 표정과 말을 따라가며 수동적으로 스토리를 받아들인다.
그것이 결코 의도적으로 만든 스토리가 아니라고 해도 내가 아닌 누군가의 눈에 의해 발견되고 규정되고 수납된 것이라는 점에서 인위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이미 유통 과정에서 스토리의 순도가 오염된 채 배송되는 것이다. 심사위원의 반응이 너무 꽉 차게 화면을 채우고, 그들의 말이 너무 빼곡하게 방송의 흐름을 메우며 프로그램 안에서 절대적으로 군림하고 있는 이상, 시청자가 즐거운 진공 상태에서 주체적인 시선을 확보하고, 최대한 자신의 취향과 판단의 주권을 가지고 감상하기는 힘들다.
결국에 나는 심사위원과 프로듀서가 만든 프레임의 영향 아래서 음악을 소비하게 된다. 경연 프로그램 상위권 랭크 음악들이 먼저 나에게 다가와 수동적으로 듣게 되었든지, 내가 스스로 적극적으로 선택해 듣게 되었든지 말이다. 그렇게, 무명의 뮤지션을 발굴한다는 명분 하에 탄생된 뮤지션과 그의 노래는 심사위원의 감탄과, 출연자의 역경과 감동의 플롯이 들어간 스토리를 덧입게 된다. 어쩌면 그것은 오롯이 알맹이 자체의 힘은 아닌 것이다. 일정 부분 편집의 힘, 화려하게 싼 포장지의 힘에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편집 형식에서 출연자는 심리적으로든 실제적으로든 PD와 심사위원에게 목을 조아릴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런 씬들이 순수한 대중인 시청자 입장에서는 눈쌀을 찌푸리게 만드는 대목이다. 시청자는 아티스트가 방송의 장인들과, 대중음악계에서 시장 권력을 틀어쥐고 있는 기성세대에 의해 주조되고 탄생되는 현실의 증언자이거나 구경꾼이다. 그러니까 아티스트는 대중과, 예술 그 자체에게 빚을 지는 것이 아니라 브로드캐스팅 마이스터에게, 업계 선배에게 빚을 지게 되는 것이다(물론 어느 정도 이런 시각도 왜곡된 편견일 수는 있지만). 이것은 발굴인가, 주조인가.
어쨌든 그처럼 전문적인 방송 편집 기술 공정을 거쳐 알려지기 시작한 뉴 페이스 뮤지션에게는 면역 항체가 달라붙는다. 각종 방송과 음악 앱이 힘을 합쳐 알고리즘 융단 폭격을 하며, '잘 들어봐, 이 음악 좋지 않아? 특별한 스토리가 있다고, 이제 너밖에 안 남았어, 개인의 까다로운 취향 따위 버려, 거대한 미디어의 파도에 너의 영혼을 맡겨봐.'라고 속삭이고. 버서스versus, '나는 너희들의 의도대로 되지 않을 거야, 나에게는 황금 귀를 가진 유명 심사위원의 휘황찬란한 찬탄 따위 필요 없어, 스토리가 아니라 본질적인 음악 하나만 들을 거야.'라고 대응하는, 일종의 바이러스 침투와 면역 체계의 방어 과정을 겪게 되는 것이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이쯤에서 대세를 거스르는 커밍아웃을 하려니 조금 쫄리기는 하는데. 솔직히 나는 이승윤 좋은지 모르겠다. 괜찮다는 느낌이 어느 정도는 있지만 그렇게까지는 아니다. 가사가 신선해서 좋기는 하지만 사실 문예창작학과 과사무실에 수북이 쌓여있는 학부생 과제들 중 어느 하나쯤에 적혀있을 법한 글귀들이기도 하다. 진정성도 좋고 날것의 느낌도 좋지만, 하여튼 미디어의 능수능란한 브랜딩 포장 기술을 힘입어 과장된 측면도 있다.
그에게서는 분명히 여느 스타들과는 차별된 진정성이 느껴지고, 그에게 그것은 독특한 매력 자산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나는 아직 그 이상을 보지는 못 했다. 따라서 의아하게 느낀 것이다. 현실 속에서 어떤 아티스트가 진정성만으로 평가받는가. 진정성만으로 평가받는 예술가가 있다면 그는 금수저다. 아버지가 유명 갤러리의 관장이라든지. 문화예술계에서 입김 센 인사라든지. 아티스트에게 진정성은 필수적인 도덕성에 불과하다. 결국 내용의 탁월성으로, 그것의 깊이와 아름다움으로 이야기하는 것이고, 그 포인트로 평가받는 것이다.
스타와 아티스트
팝스타를 예술적인 관점으로 너무 엄격하게 볼 필요는 없다. 팝스타가 아티스트가 아니라면. 그래. 그냥 즐겁게 볼 수 있다. 그렇지만 그냥 가볍게 즐기는 것이라면 다들 가볍게 즐기면 될 것을. 유독 경연대회에서 화제가 된 뮤지션들에게는, 담백한 실력 위로 덧입혀지는 아티스트 이미지의 인플레이션이 너무 심하다. 음악 경연 프로그램 수상자를 지나치게 찬양하고, 다들 너무 일사불란하게 좋아하고, 그에 따라 너무 많이 노출되다 보니 피로감이 느껴지고, 나아가 이런 현상에 대해 질문이 생기는 것이다.
한낱 보이 그룹이나 걸 그룹처럼 기획사가 훈육하고 홍보한 스타가 아니라는 점에서, 그는 전형적인 케이팝 스타가 아니다. 그렇기에 더욱 그의 음악과 다양한 방송 활동은 이미 하나의 메시지이고, 그 자신도 음악을 통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 보인다. 그렇다면 그는 아티스트라 불릴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그는 확실히 특별해 보이는데. 그러한 특별함은 기획사와 방송 제작자에게 군침 삼켜지는 먹잇감이 된다. 아티스트 자신이 원하지 않더라도, 이제 언제라도 프로페셔널한 미디어 공학 기술로 부풀려질 수 있다.
이 지점이 위험하다. 여기서 아티스트가 중심을 잡지 못하면, 스스로 냄비의 뚜껑을 열지 않으면, 진귀한 예술의 국물이 흘러넘쳐버릴 것이다. 그렇게 가스불이 꺼지면 차라리 다행이다. 최악의 경우는 계속 펄펄 끓어올라 예술의 영혼이 다 타버리고 전소되는 것이다. 그렇게 가다가는 어쩌면, 그를 과잉 소비하는 방송과 대중에 의해 그 자신이 원하는 길로 가지 못하고 아티스트가 아닌 스타로, 그의 진로가 하향 조정될지도 모르겠다. 슬픈 일이다. 그런 슬픈 풍경은 내 삶으로도 충분하다.
그의 정체성이 팝스타가 아닌 아티스트라면, 그는 어느 정도의 예술가일까. 미디어가 포장한 이미지를 모두 걷어낸다면 말이다. 앞서 커밍아웃했듯 나에게는 아직 흥미롭네, 강단 있네 정도였다. 광고에 너무 많이 나와 궁금해져서 편의점에 달려가 사 먹어 봤더니 질소 포장으로 잔뜩 부풀려져 내용물은 얼마 들어있지도 않고. 맛도 그냥 새롭고 신기한 정도인. 그런 과자가 이삼십 년 사랑받을 수 있겠는가. 지금 편의점에서 허니버터 칩을 볼 수 있는가.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은 나 자신에게 중요하다. 나도 그럴싸한 포장의 유혹과 내용에 대한 고민 사이에서 끝이 보이지 않는 진동을 한다. 관계든 이성이든 꿈이든. 거의 모든 순간 하게 되는 고민이 바로 그 진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