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핍

배고프다.

by jungs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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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핍에 관해서 말하려고 한다. 이 이야기는 꼭 카페 콘 레체로부터 시작하고 싶다. 카페 콘 레체는 스페인 커피의 이름이다. 십오 년 전 선교여행으로 갔던 곳에서, 나는 카페 콘 레체를 처음으로 마셨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한 달의 스페인 여행 동안 딱 한 번 마셨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서 다시는 마셔보지 못했다. 그러니까 내 인생에서 딱 한 번, 카페 콘 레체를 마신 것이다. 한 번인 것도 문제지만, 사실 카페 콘 레체를 마셨던 경험 자체가 너무 오래전 일이다. 따라서 나의 기억은 멋대로일 수 있다. 뿌연 김으로 가득한 욕실 거울에 비친 얼굴처럼 흐릿하기만 한 기억이다.


하지만 흐릿한 기억이라는 사실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진실이 중요하다. 그때 한 잔의 카페 콘 레체 경험이 나의 몸과 영혼에, 그득한 향기로 남아있다면 카페 콘 레체가 내 영혼의 결핍의 문제를 푸는데 작은 실마리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희미한 진실을 따라가 보는 것이다.


확실한 건 그날은 1~2월 경의 아주 추운 겨울날이었고, 그곳은 낭만적이고 고풍스러우면서도 세련된 스페인의 어느 도시였다는 것이다. 마드리드가 아니었을까. 나는 팀원들과 함께 카페에 들어가기 전, 한참을 광장 등지의 길거리를 걸어 다니며 차가운 바깥공기 속에서 떨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오들오들 떨릴 정도로 스산한 느낌은 아니었을 것이다. 기분 좋게 설레는 추위. 찬 겨울 공기가 온몸에 파고들며 살아있다는 긴장과 각성을 주는. 코끝이 시리고 가슴 한편이 뜨끈하고 벅찬. 이 카페 콘 레체 기억은 내 마음속에서 우리가 모두 아는, 그러한 겨울의 찬 공기로 피어오른다. 다만 그 공기는 스페인 도시 특유의 매혹적인 냄새와, 포근한 밀도의 습기가 어우러져 있는 스페인 식의 겨울 공기였다.


툴루즈 로트렉 Henri Toulouse Lautrec(1864~1901), 세탁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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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원들과 나는 온몸에 차가운 냉기를 두르고 마침내 한 아담한 카페에 들어갔다. 아마 광장 근처 모퉁이 한켠 즈음에 위치한 곳이었던 것 같다. 그 카페는 추로스를 전문으로 하는 카페였을 것이다. 스페인을 잘 아는 팀장님이 주문하셨는지, 내가 스스로 골랐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무튼 내 앞엔 카페 콘 레체가 놓이게 된다.


얼마 전까지, 한국의 커피숍에서 볼 수 있었던 작은 커피 잔보다 아마 조금 더 작은 잔이었을 것이다. 작고 아름답고 동그란 잔에 뜨거운 우유와 에스프레소 류의 커피가 진하게 뒤섞인 진갈색의 커피가 내 앞에 놓여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한 모금 마셔보았다. 와, 진했다. 처음 느껴보는 진함에 눈이 번쩍 띄었다. 쌉싸름한 커피의 풍미와 온몸을 녹여버리는 단 맛이 어우러진 이 커피. 설렜다. 연애하듯, 꿈꾸듯 설렜다. 이 세상이, 이렇게까지 진하고, 달콤할 수도 있구나. 이런 방식으로 설렐 수도 있구나.


무의식 속에 가라앉아 아직 발견되지도 않은 나의 상상력을 모두 녹여서 작은 잔에 담아버린 것 같았다. 상상력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카페 콘 레체의 김과 함께, 내 입을 타고 두피의 모공을 타고 공기로 흩어졌다.


아마 우리가 메인으로 주문한 것은 추로스였을 것이다. 고소하고 진한 맛의 추로스와 함께 카페 콘 레체를 한 모금씩 마셨다. 추로스의 맛도 이루 말할 수 없이 환상적이었다. 반죽부터 마지막 단계까지 카페에서 직접 만드는 수제 추로스로 보였다. 진한 고소함과 점성 꽉 찬 쫄깃함, 얄팍하게 베인 시나몬 향. 난생처음 보는 맛이었다. 그냥 너무 맛있었다고밖에, 정확히 표현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맛이었다.


Henri Toulouse Lautrec(1864~1901), 화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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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카페 콘 레체는 나의 결핍과 도대체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나는 오늘 그리 어렵지 않은 대학원 시험에 떨어졌다. 사실은 일주일 전 면접을 보면서 현장에서 이미 떨어진 것이었을지 모르지만. 어쨌든 오늘 열몇 번 이상을 합격자 확인란에 수험번호를 넣어보고, 그래도 잘 믿어지지 않아서 기어이 학교에 전화를 해보고서야 알았다. 미달, 또는 일대일 정도 경쟁률의 시험이었다. 아마 응시자 중 나 혼자 떨어진 것일 테다. 필기는 공부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보았는데 됐었다. 면접에서 떨어진 것이다. 면접은 패스/넌 패스였다.


거의 밤을 새우고 면접장에 갔었다. 감성적으로도 이성적으로도 그렇게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면접 대기실에 앉아서 잠깐 두 손 모아 기도를 했지만, 실은 그렇게 많이 긴장하지는 않았다. 중요한 한 시기와 미래 전체를 건 과정이었고, 또 하나님과의 모종의 속삭임과 관계, 약속 같은 것이 뒤섞인 일과 관련된 시험이었다고 할 수 있었지만, 사활을 건 느낌으로 불안해하지는 않았다. 나름의 믿음 같은 것이 있었다. 우선 경쟁률에 대한 믿음이 있었고. - 일대일 이하 경쟁률의 시험에서 어떻게 떨어질 수 있겠는가 – 비록 미약하지만, 궁극적으로 내가 믿는 하나님의 신실함을 향한 믿음이 있었다.


설령 떨어져도 주님이 나를 인도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일반적인 열망도 있었지만, 여느 신학생들이 그렇듯 심지에는 더욱 견고하고 실체적인 소망 같은 것이 있었다. 그래도 우선 무엇보다 이 시험에 붙고 싶었다. 더 이상 사람들에게 두런두런 변명하듯, 핑계 대듯 길게 나의 거취에 관해 설명하는 일이 없었으면 했다. 대단한 성취를 바란 것이 아니라, 정말이지 어떤 성공에 대한 바람도 없이, 정말 그냥 소박하고 작은 꿈을 꾼 것에 불과했다. 내가 나일 수 있는 최소한의 관문을 통과하는 꿈. 가장 작은 단위의 자격의 증명 같은 것이었다.


똑똑. 소심하게 문을 두드리고 들어갔다. 예상외로 많은 면접관들이 있었다. 대부분 교수님으로 보이는 연로한 면접관들이 투명 프로판 칸막이 사이사이에 앉아있었다. 이렇게 엄중한 시험이었구나. 자리에 앉으며 깨달았다. 생각보다 보수적이고 엄격한 분위기에 일순간 압도되며 면접이 시작되었다.


의외였다. 전체적인 분위기에도, 하나하나의 구체적인 질문들에도 예상하지 못한 진지함과 냉정한 기운이 감돌았다. 면접관들은 제출한 서류들을 꼼꼼히 훑어보면서 비평적인 평가와 날카로운 물음들을 던졌다. 한 명씩 돌아가면서 크고 중요한 것들, 그러니까 교단이나 교회, 개인적인 소명에 관한 이해도, 포부, 희망과 같은 큰 문제들부터 작은 문제들까지 세세히 물어왔다.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관점에서 할 수 있는 의심도 있었고, 내가 느끼기에는 조악했던 질문들도 있었다. 면접관들도 진정한 의미에서는,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들 같았다. 형식적인 면접이 아니라 어떤 틀에 맞지 않는 사람을 떨어트리기 위한 세팅의 시험대 같았다.


나는 시종일관 자기 방어를 해야 했다. 아니. 그러지 않아도 되었는데, 내 태도가 자꾸만 그렇게 되어갔다. 변명을 늘어놓고, 핑계를 댔다. 나는 스스로 정말 싫어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정직하려고 안간힘을 쓰면서도, 그렇게 진솔된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부족하지만 믿어달라는 한 마디의 말이면 될 것을. 허세로 가득한, 거창한 단어와 표현들이나 비린내 나는 대답들이 입에서 술술 세어 나왔다. 꾸밈과 불필요한 말들이 자꾸만 픽픽 새 나왔다. 학교에는 학생이 필요할 텐데, 설마 이 정도의 결점과 실언들로 면접관들이 지원자를 떨어트릴까 싶은 생각에 자꾸만 기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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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에 관해 나는 그렇게 깊은 실망이나 절망의 경험이 없다. 그렇게 어려운 시험에 응시한 적은 없지만, 어쨌든 대부분의 시험을 설렁설렁 준비하는 듯 마는 듯하고 보아도, 놀랍게도 붙곤 했다. 그럼에도 나는 마치 열심히 공부하기라도 한 듯 기뻐했다. 이번에도 그렇게 될 줄 알았다. 기대하는 대로 안 되었다고 해도 실망할 문제는 아니었다. 늘 그랬듯 실망할 만큼 정성껏 준비하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십 대나 이십 대 시절에는 여느 젊은이들처럼 막연한 두려움과 불안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나의 두려움과 불안은 조금 달랐다. 내 안의 그것들은 언제나 결과와 성취보다는 나의 내면과 더욱 깊숙이 연루된 것이었다. 실은 모든 것은 안식의 문제였다. 희망, 사랑, 연애, 개성, 풍요로움, 자기 증명과 같은 것 이전에 안식의 문제가 있었다. 그건 욕망과 성취와는, 정말 너무나 다른 문제였다.


생각해보면 나는 무언가, 늘 배고프고 목말라있었다. 무엇이 되어야만 해, 또는 안 되어도 괜찮아 따위의 문제가 아니었다. 애초 그러한 차원이 아니었다. 그 모든 것 이전에 궁극적인 안식이 필요했다.


이십 대 후반에도 나는 결핍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그러한 나날들을 보내던 중, 스페인에서 마신 카페 콘 레체 한잔에서 눅진한 사랑을 느낀 것이었다. 세상이 이토록 넓구나. 이토록 다양한 음식과 사람들이 있구나. 스페인 사람들은 이토록 뜨겁고 열정적이고 지적이고 자연적이고 설레는 삶을 사는구나. 이들은 커피 한잔을 만들어도 참으로 이렇게 풍미 있게 만들어 마실 정도로, 삶에 관한 강한 열의와 자신감, 애착을 갖고 있구나. 나는 누구일까.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세상이 넓구나, 세상이 넓구나...


이런 말들에는 조금 더 견고한 해석이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 선교 여행의 날들 속에서, 추로스와 카페 콘 레체 한 잔을 마시며 몸도 마음도 너무나 따스하고 달콤했다. 일정 내내 하나님이 나를 당신의 마음 깊숙이 사랑하시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 느낌들이 시간이 많이 지나고 나서는 카페 콘 레체 한 잔으로 응축되어 추억된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의 결핍을 채울 수 있는 것은 사랑인 것 같다. 나에게 필요한 모든 것은 사랑이라는 단어로 압축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사람들로부터,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있고, 하나님과 사람을 향해 뜨거운 사랑을 하며 살 날들이 있다는 것, 그처럼 튼튼한 사랑의 기반 자체가 나의 안식의 기원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오직 용기 있는 진실이 중요한 것인데, 나의 진실이란 그러니까 진한 카페 콘 레체 한 잔에, 사랑에, 안식에 담겨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서류 몇 장에는 나의 불안과 방황의 기록들이 상흔처럼 남아 있을지라도 그것들이 나의 진실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면접관이든 누구든, 어느 누구도 그런 말을, 진실과 잇닿아 있는 말을 내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카페 콘 레체에 진실이 있다고, 나의 결핍은 내 안에 이미 담고 있고, 내가 간절히 목말라하는 사랑으로 채울 수 있는 것이라고, 그럴 때에만 안식을 얻을 수 있다고. 나 자신이 흔들릴 때마다, 스스로 휘청거리는 몸을 꼭 붙들고 지긋이 영혼의 눈동자를 응시하며 말해주어야 한다. 괜찮아. 제도는 종교지만, 하나님은 종교가 아니야. 하나님은 이해야. 사랑이야.


이번 시험 결과에 관해 느낀 실망감은 조금 다른 것이었다. 정말 전혀 어려운 시험이 아니었다. 컨디션이 좋지 않아 횡설수설했다고, 얼마든지 결과나 과정을 가볍게 받아들일 수 있을 텐데, 마음이 참 많이 무거워졌다. 다시 또 서류를 준비하고, 다시 몇 시간씩 앉아 시험을 보고 면접을 볼 엄두가 나지 않아 답답하고 힘들었다. 면접관들 앞에서 자신을 잃지 않으며, 변명하지 않으며, 오롯이 나를 증명하고 표현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게 되기까지, 나의 결핍을 다시 무엇으로 채워야 할까 하는 것들이 자연스러운 부담감 이상으로 암담했다. 그것은 공부 실력의 문제나 자격의 문제가 아니다. 세상 앞에,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충실히 안식을 얻고, 감히 하나님의 안식을 말하고자 하는 한 인간이, 에누리 없는 어떤 과정을 놓고 씨름하고 있는 것이라고 받아들이게 된다.


Henri Toulouse Lautrec, 휴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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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처음이 되었다. 내 앞에는 눈밭처럼 하얀 시간이 펼쳐져 있다. 이제 다시 새로운 날과 기회들이 놓여있게 되었다. 지금 나의 영혼이 너무나 핍절하다는 것이 오로지 문제다. 기름지고 풍요롭지 못한 내면. 그 점이 무엇보다 암담하고 막막하다.


나도 모르게 또다시 그걸 보이는 것으로 채우고 빛내려고 했나 보다, 내가 하나님의 옷소매를 붙들고 억지로 끌고 가려했나 보다, 주님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채 날 품 안에 품고 차가운 나의 몸을 데워주시려 하셨나 보다, 이런 일들이란 원래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정직한 과정인가 보다, 그런 생각들이 반죽에 잘 붙지 않는 밀가루처럼 뒹굴러 다닌다.


베이킹 소다 두 스푼쯤 넣은 것처럼 부푼 꿈들이 마음속에서 모두 사라졌다. 억지로 감사하고 싶지 않지만, 정말 한 가지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이제 무엇으로 빛나야 할까 깨끗이 처음부터 다시 고민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최소한 한 학기 정도는 신학 책을 멀리해도 괜찮을 수 있게 되었다. 소설이나 그래픽 노블이나 영화도 마음껏 보고 베이킹 같은 것도 배울 수 있게 되었다. 나의 결핍에 대해 다시 넓고 깊게 배울 수 있게 되었다. 세상은 넓고 읽을 책도, 쓸 글도 많다. 나의 영혼 안에는 스페인의 아담한 카페에서 카페 콘 레체를 들이켜던 그 날의 쌉싸름한 설렘과 풋풋한 마음이 그대로 있다. 깨끗이 새로워질 수 있게 되어, 개성을 더욱 도드라지게 깎을 수 있게 되어 감사하다. 이제 다시 힘을 빼도 된다. 영혼을 풀어헤치고, 깎고, 그리며, 홀짝이고 싶다. 처음부터. 카페 콘 레체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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