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그리고 신학을 공부한다는 것.
1. 숭고함
아침마다 지저귀는 새처럼 참 성실히 내게 인사를 하는 곳이 있다. 탈북여성과의 중매를 주선하는 결혼정보회사다. 오래전 언젠가 메신저로 친구 신청을 했던가, 상담 신청을 했던가. 사실은 다급함과 궁금함 같은 것이 뒤섞인, 얄팍한 충동질 같은 것이었을 테다. 그런데 그 일로 금방 실제로 전화가 왔었고, 이제는 아주 오래전 일인데도 수시로 안부 메시지를 보내오는 것이다.
나는 남쪽 지방의 사투리를 쓰는 여성이나 북한 여성들에 대해 판타지를 갖고 있다. 갈 수 없는 곳, 닿을 수 없는 곳에 대한 환상 같은 것이다. 그렇지만 막상 실제로 전화가 오니 당황스러워 주저주저 어버버, 횡설수설했었다. 가입비 백오십만 원, 건당 소개비 십오 만원, 성사 시 이백 만원과 같은 것들로 순수한 환상을 얼룩지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럴 돈이 있었다고 해도 말이다.
상담사는 익숙하고도 낯선 억양으로 내게 이런저런 것을 물어왔다. 진한 북쪽 사투리가 배어있는 것으로 보아 그녀 역시 탈북 여성 같았다. 고향을 떠나 한국에서 생계를 걸고 일을 하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전화를 쉽게 끊을 수 없었다. 통화는 지극히 비즈니스적인 이야기뿐이었지만 그녀가, 그녀가 하는 일이, 그녀의 삶이, 이러한 현대사가, 이 일체의 사건이 일순간 숭고하게 다가왔다. 그녀의 절실함과 나의 한가하고 단편적인 호기심은 선명히 대비되었다. 숙연하고 미안한 감정으로 수화기를 붙들고 있었다.
수년 전까지만 해도 한동안 교회 가는 길, 여의도 도로변에 그 자리와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베트남 여성 02-OOO-OOOO’. 큼지막한 현수막 안에 두터운 견고딕체로 쓰여있는 문구는 내 기억에 거의 그게 다였다. 다짜고짜 대표적인 단어와 꼭 필요한 정보들만 나열한 그 하얀 현수막을 바라보면서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한국의 농촌 총각과 동남아 여성의 결혼 붐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삶이란 게 얄궂은 장난 같다고 느끼곤 했다. 동남아 여성도, 농촌 총각도 피차 그러한 감상 한 번쯤 느끼지 않았을 리 없다. 결혼을 돈으로 사는 사람이라고 오해받기 십상인 농촌 총각에게도 드러내지 못한 사연이 수백 가지 있었을 것이다. 어떻게든 대를 이어야 할 것 같아서. 늙어가는 부모님을 생각해서. 농사일 뒷바라지를 해줄 가족 노동인구가 필요해서. 여자 한번 못 만나보고 끝낼 인생을 생각하니 나의 삶이 가여워서.
너무나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베트남 여성도, 탈북 여성도, 농촌 총각도, 노총각도, 노처녀도 숭고하다. 알고 보면 배우자를 찾는 그들은 모두 마음 한 켠에 어떤 숭고함을 안고 있을 것이다. 결혼의 본질이 사랑이라는 것은 자명하지만, 누군가에게 그런 이야기는 그냥 TV 속에서나 존재하는 낭만일 수가 있다. 그러면 좋겠지만 그럴 여력이 없는 것, 바로 그런 것을 우리는 사치라고 부르곤 한다. 그러니까 그들은 다른 방식으로 숭고한 것이다. 예외 없이, 우리는 모두 숭고하다.
2. 위험함
모든 인생과 모든 일, 모든 만남에는 숨죽인 사연이 있다. 그것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생의 풋비린내가 풍기기 마련이다. 우리는 짠내 나는 삶의 숭고한 표정은 숨겨두고 적당히 가면을 쓰고 서로를 대한다. 아무리 그곳이 넓다 하더라도 녹슨 집기와 잡다한 살림살이가 나뒹구는 뒤뜰을 손님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다. 비록 몇 평 안 되는 좁은 공간이라도, 잘 가꿔진 앞뜰의 화단을 보여주고 싶다.
언제부턴가 뒤뜰에 더 독특하고 깊은 진실이 있을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좋아하는 여자애의 검은 코트에 묻은 생활 먼지. 코트 어깨 위에 엉겨 나와 붙은 머리카락 몇 가닥. 빌려준 목도리를 돌려받은 쇼핑백. 그러한 것들에 시선이 좀 더 그윽이 오래 닿았다.
어렸을 때는 건강한 사람을 좋아했다. 그러니까, 밝고 정직하고 쾌활하고 올바른. 그런 사람들 말이다. 나 자신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랬던 내가 조금씩 변해갔다. 정직하고자 아득바득 애쓰는 나 자신의 모습이 질리고, 지루했다. 세상에 관한 이해랄까, 프레임 같은 것이 바뀌어 가기 시작했다. 함께 대화하고 싶은 사람의 유형도 변해갔다. 어둠을 이해할 줄 아는 사람에게 끌리기 시작했다. 위험한 거짓말이라도 하는 듯 몸을 배배 꼬아가며 말을 해도, 거짓을 통해 더 깊은 진실을 말할 줄 아는 사람. 그런 사람들을 더 깊은 눈빛으로 보게 되곤 했다.
독특한 시선을 갖고 독특한 생각을 하며 특별한 말을 내뱉을 줄 아는 사람. 신비롭고 궁금한 사람. 독특한 그림을 그리고, 독특한 시선으로 글을 쓸 줄 아는 사람. 햇살처럼 환하게 웃는 웃음 뒤,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머리칼처럼 약간의 어두움이 스쳐가는 사람. 그런 사람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런 사람은 나의 뒤뜰도 이해해줄 수 있지 않을까. 어떤 대화도 마음 폭 놓고 할 수 있는, 어떤 말을 내뱉기 전 나 스스로 자기 검열을 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은, 궁극적으로 안심이 되는 사람을 만나면 어떤 기분이 들까. 나도 위험한 사람이 되어갔기 때문에 뒤뜰에 위험한 구석을 숨겨둔 듯한 사람을 만나면 어떨지 궁금했다.
3. Eclipse.
나는 엄마이기 때문에 널 사랑할 거야.
혹은
나는 네가 살인자라도 널 사랑할 거야.
아무 이유 없이 널 사랑할 거야.
넌 나를 엄마라고 부르면 돼.
엄마가 되기 위해 자녀를 사랑하는 사람은 없다. 사랑하기 때문에 엄마인 것이다. 책을 내고 싶다, 작가가 되고 싶다는 순수한 꿈과 간절함은 책을 읽는 일을 너무나 사랑한다든지, 글쓰기가 너무 신비롭고 재밌다는 등의 마음과 완전히 같은 것이 아닐 수 있다. 스스로 자신에게 속을 수 있다. 무엇이 되고 싶다, 무엇을 하고 싶다는 꿈은 언제나 그 나름대로의 간절함과 순수함을 갖고 있어서, 더 이상 걷어낼 것 없는 완전한 순도의 순수한 마음을 개기일식처럼 감쪽 같이 가려버릴 수 있다.
글쓰기에 관심이 생기면서, 글쓰기 훈련소니, 자비를 들여서 하는 독립출판 모임이니 하는 광고들이 자주 온라인 동선에 노출되어 보였다. 그런 모임에는 어떤 사람들이 찾아올까. 그런 곳에서는 무슨 이야기를 나눌까. 늘 궁금했는데, 그보다는 한편으로 좀 의아했다. 책을 특별한 사람만 내라는 법은 없지만, 그렇다고 작가 수업이 베이킹 클래스나 홈카페 원데이 클래스 같은 것은 아닐진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책 만들기에 로망을 갖고 있다니. 고작 자기 이름으로 책 한 권 내는 일 따위에. 글쓰기를 얼마나 쉽게 보면. 또는 얼마나 어렵게 보면.
이 사회에서는 글을 쓰는 것도 성취구나 하고 느낄 때면 적잖이 놀라고 당황하게 된다. 누군가에게는 글쓰기가 정말 훈련부터 필요한 일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인생의 숙제였던 책 내기를 더 이상 미루지 않고, 서로 응원하면서 글쓰기 모임을 하는 것도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일이다. 저는 책 내는 게 버킷리스트 중 하나예요!라고 맑게 말할 수도 있다. 명랑한 희망의 표현을 재단하고 판단할 권리가 누구에게 있는가. 순수 예술에 속한 것이라고 꼭 영혼의 뒤뜰에 있는 음울한 것일 필요도 없고, 혼자 웅크리고 글을 써야 할 이유도 없다.
사탕 주듯이 키스를 나눠 주는 여자는
사랑의 값을 아주 낮게 매기고 있는 셈이다.
- ‘Senior Scholastic’ (1949)
그러나 ‘저는 유명한 작가가 돼 보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건 ‘나 언젠가 카페 한번 꼭 해보고 싶었어’, 또는 ‘나 어렸을 때부터 빵집 사장이 꿈이었잖아’라고 말하는 것과는 좀 다르다. 예컨대 내가 듣기에 그건, ‘내 꿈은 체스 기사 아니면 바둑 기사 정도라고 할까?’나 ‘한 번쯤 인생에서 프리미어 리그 선수는 해보고 죽고 싶어서 축구 동아리 모임에 나가고 있어요.’라고 말하는 것처럼 어딘지 어색하고 한심한 문장이 된다.
순수하게 축구를 좋아해서 축구 동아리 활동을 한다고 말해야 되는데. 축구가 나에게 행복이어서 축구 동아리에 너무 들어가고 싶다고 말해야 되는데. 책을 내고 싶다고 말할 게 아니라 책과 도서관과 헤르만 헤세와 올가 토카르축과 글쓰기를 사랑한다고 말해야 되는데. 글 잘 쓰는 사람이 되거나 책을 내거나 유명 작가가 되는 일이 버킷 리스트라니. 말도 안 되는 생각들이다. 속내를 깊이 파고들어 보자면 그건 유치원생이 읊어대는 앙증맞은 꿈이라든지, 성취의 노예가 된 어른이 할 수 있는 말의 수준에 다름 아닐 것이다. 더 심하게는 이런 선상에 놓여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분히 기술적이고, 하수구 악취가 솔솔 풍기는 탐욕적 접근. 꿈이라기보다 꿈의 모욕.
4. 갈증
욕망의 결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듯, 영혼의 목마름도 단순하게 표현되기 어려운 무엇일 것이다. 진정성에 관해 이야기할 때는 마음의 앞뜰뿐 아니라 뒤뜰에 더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면접관들은 고작 서류 몇 장에 코를 처박고 본질을 빗겨간 질문만 물어올 뿐이지만, 나는 스스로 내 영혼의 뺨을 붙들고 눈을 부릎뜨며 소리쳐 물어야 한다.
대체 무엇에 목말라있는 거야, 너. 넌 어떻게, 어떤 식으로 행복해지고 싶니. 어쩌면 행복해질 수 있겠니. 어쩌자는 거니 너. 골룸처럼 기괴한 모습으로 허기져있는 영혼아, 징그러운 내 영혼아, 무엇을 먹이면 배불러하겠니. 무엇으로 목을 축이면, 찾기도 어려운 마음속 한 구석에 숨어서 목마르다고, 너무나 목이 탄다고 숨죽여 우는 일을 내가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되겠니.
글쓰기를 통해 또 뭘 이루고 싶니. 칭찬이 듣기 좋니. 똑똑하다, 괜찮은 사람이다, 글 잘 쓴다 인정받고 싶니. 아니 그러니까, 너. 근사한 신앙인이 되고 싶어서 공부하기로 선택했니. 어떤 소임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했니. 괜찮은 여자를 만나 결혼하고 싶어서 괜찮은 일자리를 얻고, 안정적인 종교인이 되길 원하고 있니.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고 싶긴 한 거니. 성서를 정말 종이까지 핥아먹듯 공부해보고 싶니.
유진 피터슨 목사는 “목사는 다른 것으로는 대체 불가능한 고유한 소명자”라고 했다. 나는 하나님께, 누군가에게, 교회에게 대체 불가능한 사람일 수 있을까. 또 내 안의 이 목마름은 다른 일로는 대체 불가능한 것일까. 찐득찐득한 먼지를 머리에 뒤집어쓰면서, 마음속 은밀한 뒤뜰을 다 뒤집고 파헤쳐보고 싶다. 고민해볼 시간이 주어졌으니 한 번만 더 깊숙이 고민해보자.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않아도 괜찮다. 초라한 안정감과 애정의 교류. 모두 잔망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