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살아있어라. 살아있어라. 더 뜨겁게. 더 뜨겁게.

by jungsin


작기만 한 내 기억 속에

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



1

청춘을 생각해본다. 요즘처럼 공기가 차가워질 무렵이면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되고, 그러다 보면 어느덧 자신도 모르게 실없는 상념에 빠져있곤 한다. 과연 청춘이란, 청춘의 실체적 진실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생각 같은 것이다. 언젠가부터, 청춘이란 단어를 떠올리면 뜻밖에도 고등학교 때가 생각난다. 고등학교 시절은 청춘의 시기가 분명한데 왜 의아하게 느끼는 걸까.

초조하고 힘든 감정으로 얼룩져 엉망진창으로 기억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때는 사형집행 날짜가 다가오는 죄수라도 된 것처럼 하루하루가 초조하고, 화상을 입은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불과 같았다. 인격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나는, 뜨거운 불과 같았다. 미성숙한 청춘의 영혼 안에는 언제나 쥐불놀이 깡통 같은 불덩이가 돌아다녔다. 가파른 감정의 기복은 내 청춘의 특징이었다.

한동안 고등학교 시절 일체를 캄캄한 암흑 덩어리 같은 것으로밖에 기억하지 못했다. 마치 아기 때 크게 열병을 앓고 엉뚱하게 실명을 하는 것처럼 생생히 기억나야 할 십 대 후반의 삼 년이 통째로 기억에서 지워져 버렸었다. 단지 단편적인 장면들, 주로 안 좋았던 일들이 남아있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기억이 사라져 버렸었다. 자동 반응으로 방화 셔터가 내려왔나 보다. 고등학교 생활의 지옥 불구덩이 화염이 계속 쫓아올까 봐, 스무 살이 되자마자 사이렌을 울리며 기억의 셔터를 내렸나 보다.

그랬었는데.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기억상실증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얼마 전부터 슬슬 다시 그 시절의 기억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고삼 때 홀린 듯 집을 나가 동해바다 모레 사장에서 소주병을 생수병처럼 들고 마시고 나서 갑자기 무릎 꿇고 기도를 하고 그대로 여름 해변에서 잠들었던 일부터, 고일 때 친구들과 속초로 놀러 갔던 일이나, 친구들과 수십 번을 시도했던 헌팅과, 투다리라는 꼬치구이 집. 그리고 담타기. 그리고 담타기 다음날 아침의 엉덩이 찜질. 삐삐. 1004. 8282. 0404. 두, 개의 소리샘 음성 녹음이 있습니다. 소리샘 청취는 1번.

지하층에 있던 단체 급식 식당에서 보고 반해버렸던 영어과 여자애, 조금 만나다가 문득 갑자기 너무 어려 보여서 연락을 끊어버렸는데 노래방에서 친구들과 놀고 있던 내게 그동안 썼던 일기를 전해주겠다며 근처 밖에서 하염없이 나를 기다리던 인근 여고 여자애. 그리고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게 편지와 공일오비 테이프와 시집 선물 공세를 하던, 나의 시크함과 이기적 무감각함으로 인한 설움의 세월을 꿋꿋이 지나오며 끈기 있게 나를 좋아해주었던 타과의 또 다른 여자애. 칠십 명 정도의 여자애들이 떠오른다.


2

그중에서도 신기하게 유독 진한 청춘의 기억으로 남아있던 순간은 의외로 친구들과 담배 자판기 앞에서 종류별로 자판기 버튼을 누르던 순간이다. 정말 청춘이었다. 같은 과였던 두 명의 친구와 나. 우리는 어느 지하철역에서 만났다. 잔뜩 부푼 마음으로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여행에 필수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고 있었다. 고작 한두 주 정도밖에 되지 않았던 짧은 여름방학 기간을 싱겁게 보낼 수 없어, 여름방학 보충수업 6교시 무렵마다 며칠을 앞뒤로 모여 앉아 속닥이며 여행을 떠나자고 계획했었던 것 같다. 마침내 그날이 되어 모인 것이다.

나는 청반바지에 쪼리 같은 것을 신고, 큰 가방을 둘러메고 있었을 것이다. 옷 차림 하나하나가 너무 중요했던 시절이었다. 모두 각자 한껏 멋을 부린 옷차림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당차고 떳떳하게 담배 자판기를 찾고 있었다. 그 시절은 슈퍼에서는 학생에게 담배를 못 팔게 되어 있는데, 길거리에 있는 담배 자판기에서는 담배가 통통 잘만 나오던, 모순적인 누아르가 가득하던 시대였다. 친구들과 나는 대전 계룡산(아니 고등학생 셋이 계룡산을 왜 가려 했는지)이었던가, 가평이었던가, 둘 다였던가를 이삼일 간 놀러 가려는 계획을 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고등학생 세 명이 이삼일 동안 피울 담배가 그렇게 많을 수가 없었는데. 우리는 이미 미쳐있었다.

셋은 자판기 앞으로 달려가 허둥지둥 마리떼 프랑소와 저버 장지갑 같은 지갑들을 꺼냈다. 셋 다, 호텔방 문을 닫고 캐리어를 집어던진 신혼부부 같았다. 누군가 허겁지겁 돈을 집어 들었다. 누구의 돈이었는지 누구의 손짓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여섯 개의 손이 하나의 손이나 다름없었다. 파르르. 미세하게 떨리는 고등학생의 고운 손이 지폐 투입구에 수만 원을 쑤셔 넣는다. 결코 귀엽다고 할 수만은 없는 광기 어린 미소가 셋의 얼굴에 동일하게 번진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배가 아프도록 웃고 있었다. 오마 샤리프, 말보로 레드, 말보로 라이트, 마일드 세븐. 지금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필터 테두리가 튀어나온 독특한 필터의 담배까지. 아, 생각났다! 필라멘트! 그토록 다양하고, 드넓은 학교 밖의 세상처럼 컬러풀해 보이는 외제 담배를 종류 별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혹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순서를 따라 빠른 속도로 눌러나가고 있었다. 자판기 아래쪽의 담배 꺼내는 곳으로 튕겨져 나오는 담뱃갑의 상쾌한 마찰음 소리에 전율을 느끼고 있었다. 겨우 한두 주 정도의 방학, 단 며칠의 여행이었지만 정말 꿈결과도 같은 해방이었다.


3

미화된 기억이다. 감정의 기억을 따라 재서술한 과장법이다. 아무리 심하게 과장하더라도 충분히 표현되지 못할 것이다. 그 순간들의 청춘은 원형 그대로 복원되지 않을 것이다. 담을 넘고. 처음 보는 여자애에게 말을 걸고. 아침까지 취해있을 정도로 친구네 집에서 놀고. 토하고. 어지러워하고. 도망가고. 불려 가고. 끌려가고. 맞고. 때리고. 마약처럼 담배를 빨아대고. 서성이고. 수돗물을 틀어놓고 와푸와푸 씻는 척하면서 울고. 사실 정말 청춘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만큼 하루도 빠짐없이 격렬하게 힘들었던 시절. 하루하루, 문자 그대로 버티고 있었다.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과연 내게는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는, 남아있는 미래가 너무 길어서. 아침에 일찍 나와서도 학교에 가기 싫어서 지하철역 화장실이나 아파트 구석에서 담배 한 대라도 피고 잔뜩 인상을 쓰면서 교실 뒷문을 열고 들어가, 책상에 엎드려있곤 했던 날들이었다. 공부를 못하면 인생이 끝날 것만 같은데, 뭘 하고 싶은지는 모르겠고,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모르겠고, 공부를 하면 살아있는 것 같지 않고, 청춘의 에너지는 넘쳐나던, 불안한 미래와 세상에 대한 두려움으로 매 순간 눈 앞이 캄캄했던 시간들이었다. 정말 눈물이 나도록 힘들었다.

그랬던 시간들이었는데. 머리가 지운 시간들이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가슴은 남몰래 그 암흑 덩어리를 지우지 못하고, 짙은 청춘으로 기억하고 있었던 것 같다. 청춘의 특징은 살아 격동하는 것이다. 도망가고 불안해하고 있다면 정상이다. 나쁘지 않다. 아무 문제도 없다. 아직도 가슴 펄떡이며 무언가를 찾고 있는 것이다. 더 고민하고 더 깊이 빠져들어라. 첫사랑. 불안. 방황. 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 외제 담배 자판기. 작은 다이아몬드 패턴의 반투명하고 넓은 버튼.

우리의 작고 앙증맞은 손가락으로 누르던 거친 버튼 소리가 귓전을 울리는 것만 같다. 와다다다. 퉁각 퉁각 퉁각 퉁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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