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영화 코다.
1
키보드 키캡 위에 먼지가 하얗게 덮였다. 살아서 하루하루를 견디는 것 자체가 대견한 일이라고 느꼈다. 나는 한 번에 한 가지 일밖에 못하는데. 살아간다는 거대한 일을 해내면서 글까지 쓸 수는 없었다.
성탄절 이브에는 아침깨 허겁지겁 떡볶이를 만들어 먹으며 허기를 채우고 하루 종일 잤다.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겨우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자정이 다 와갈 무렵 드디어 밖으로 나가, 인적이 드문 겨울밤의 상쾌한 공기를 맞으며 좀 걷고 들어왔다.
삶의 문제들처럼 끝도 없이 나오는 개미를 치우고 최소한의 방정리를 하고 상을 차렸다. 겉에서 보면 아사하지 않을 만큼 먹는 것 같아 보이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 ‘최소한’의 삶을 살면서 그래도 내가 가장 잘하는 일은 먹는 일이다.
큰 식칼로 아삭아삭한 봄동을 서걱서걱 잘게 잘라 큰 오동나무 샐러드 그릇에 담았다. 이미 봄동만으로 큰 그릇의 삼분의 일이 채워지고 말았다. 이후 한 순간 한 순간의 요리 공정이 미지의 세계였다. 앞으로 장차 어떻게 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즐겨 찾는 작은 시즌오프 할인 매대에서 집어 들고 온 봄동이 싱크대에 있으니 대충 헹궈서 잘랐을 뿐이다(집에 있는 몇 개의 재료들을 떠올리며 고추장 비빔밥을 해 먹어야겠다는 생각 정도는 해두었다.).
막막했지만 막막하지 않았다. 요리의 기대치를 낮추고 즐기면 된다. 당연히 맛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영혼 없이 흐물흐물 만드는 것이다. 팬에 해동시켜놨던 낙지를 넣고 가스불을 켰다. 삶는 것도 아니고 데치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옴폭한 팬에 손질한 낙지 한 팩을 넣고 불을 킨 것이었다. 아침에 떡볶이를 할 때 어묵과 야끼만두를 구웠던 팬이어서 올리브 기름기가 약간 남아있었다. 기름기가 있는 팬을 물로 대충 헹구고 물기도 제법 있는 채로 낙지를 넣었으니까 낙지가 까맣게 타지는 않을 것이었다.
약한 불로 한동안 익혀 열기를 머금은 낙지를 건져서 일단 봄동 위에 차분히 올려놨다. 그리고 팬을 세재로 그냥 한번 더 씻었다. 여전히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이 없었지만 마치 요리법이 정해져 있어, 알고 있었다는 듯 망설임 없이 그대로 리듬을 이어가 조금 남아있던 스팸을 큰 식칼로 잘게 썰어 팬에 넣고 또 불을 켰다. 올리브기름을 둘렀다. 봄동 위에서 한적한 휴식을 취하던 낚지 조각들을 다시 팬 위에 넣고 스팸 후레이크들과 함께 좀 더 볶았다. 아무래도 익히기만 하는 것보다 올리브기름 향을 둘러 향도 입히고 확실히 익히는 것이 좋을 것이었다.
방금 한 냄비 밥을 하얀 세라믹 주걱으로 퍼서 봄동 위에 올려놨다. 스팸과 낙지를 약간 남아있는 뜨거운 올리브기름과 함께 그 위에 그대로 부었다. 그리고 고추장을 두 숟갈 정도 퍼넣었다. 싱크대 위에서 그대로 비벼 보았다. 제법 맛있어 보인다. 봄동과 스팸, 낚지, 방금 지은 밥이 뒤섞인 정체불명의 음식을 떨리는 마음으로 한 숟갈 퍼서 한 번 맛을 보았다. … 아. 완전히 맛있다. 이렇게 맛있을 줄 자신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아삭아삭 씹히는 봄동, 그리고 달콤매콤한 고추장, 그 속에 고소한 맛을 품고 숨어있는 스팸과 낙지들. 그대로 서서 참지 못하고 몇 숟가락을 더 퍼먹었다. 조금 남아있던 정체불명의 고기 김치찌개를 데우고. 하나 하나, 상 위에 가져갔다. 미리 올려놓은 깍두기와 무장아찌, 양파 식초절임이 있었지만 많은 반찬이 필요 없을 것 같았다. 금방 깨끗하게 설거지 한 유리컵에 든 생수와 함께 즐길 준비가 되었다.
2
스팸낙지봄동고추장비빔밥과 함께하는 이 밤. 바야흐로 때는. 성탄절, 깊은 새벽녘이었다.
스낙봄 비빔밥을 먹으면서 마음을 기댈 가벼운 무언가 필요했다. 이 즈음 긴 호흡과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것은 거의 볼 수 없는 나였다. 그럼에도 무작정 ‘코다’라는 영화를 틀었다. 처음에는 좀 야했지만(12세 관람가) 이내 바다처럼 서정적인 분위기를 벤 채 점점 이야기 속으로 내 관심을 흡수했다.
“… 가 밥 딜런에게 뭐라고 했는지 알아? 목소리가 모래알과 접착제 같다고 했어. 목소리 좋고 할 말이 없는 사람은 많아. 너는 할 말이 있니?(Do you have something to say?)“
농인 부모를 가진 루비가 다니는 학교에서, 루비가 혼자 합창 동아리 선생님을 찾아갔을 때 선생님이 한 말이었다. 그 문장이 일단 내 딱딱한 가슴뼈 피부에 작은 상처를 냈다.
딸을 제외하고 모든 가족, 부모님과 오빠 모두, 농인이다. 루비의 집에서 루비는 부모님의 입이 되어 주었다. 눈으로 수어를 보고 세상 사람들에게 부모의 마음을 입으로 전했다.
루비의 합창 공연에 부모님과 오빠가 함께 왔다. 아빠와 엄마, 오빠 모두 루비가 노래하는 모습만 지켜볼 수 있을 뿐이다. 목소리는, 들을 수 없다. 루비의 가족을 제외하고 다른 싱어들의 가족을 포함한 관객들은 출연자들의 목소리를 듣고, 가사를 이해하며 공연에 몰입하고 감동한다. 루비가 듀엣 곡을 하는 순서가 오자 영화는 부모님의 관점으로 옮겨간다.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고 그냥 루비가 노래하는 모습만 보인다. 루비의 부모는 딸이 꿈꾸는 세계를 들을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다. 아무 노랫소리도 들리지 않는 합창 공연장. 뜻밖에 부모님은 지루해하고 집중하지 못한다. 이해할 수 없는 적막한 합창 공연. 농인의 관점에서 보는데 숨 막히고 답답할 뿐 아니라,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세상에는 정말 얼마나 많은 절망이 있는 것일까. 아득했다. 이 장면에서 나는 묵직한 칼이 가슴을 찌르고 관통해 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을 느꼈다. 너무 깊고 아득한 감동이었다.
오빠는 진득하게 집중하려 애를 쓰면서 점잖은 모습을 보이지만 공연장의 시공간과 어울리지 못하고 어색해하는 것은 루비의 부모님이나 오빠나 마찬가지였다. 객석에서 이 아름다운 음악의 세상에 들어오지 못하는 사람들은 오직 루비의 아빠와 엄마, 오빠뿐이었다.
루비는 동아리 선생님께 레슨을 받으며 점차 음악이 아니라 ‘정말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실력을 쌓아가고, 버클리 음대에 지원해 볼 수 있는 기회까지 얻는다. 루비도 정말 가고 싶어 했지만, 가족과, 또 루비 자신 안에서의 갈등 끝에 안타깝게도 집안 사정상 음대 진학을 포기하는 편을 택한다.
그리고 아빠와 차 짐칸 위에 앉아 밤하늘의 별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던 어느 날 밤. 아빠가 루비에게 한번 노래를 불러보라고 한다. 루비는 노래를 들을 수 없는 아빠의 부탁에 의아해하지만 곧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이내 아빠가 가만히, 루비의 옆목 위에 손가락을 대고 눌러본다. 진동으로 울리는 소리를 느낄 수 있어 운전을 할 때도 갱스터 랩을 크게 틀어놓던 아빠. 목선을 타고 울리는 루비의 노래를 온몸으로 느끼며, 루시의 입모양을 바라본다.
다음날. 아빠가 아침 일찍 루비를 깨운다. 어서 나오라고. 서둘러 루비를 데려 나오자 온 가족이 차를 대고 외출할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다. 그렇게 루비를 실기 시험장에 납치해가는 루비의 오빠와, 엄마와, 아빠.
가족들은 스태프들 몰래 까치발을 들고 슬쩍 실기시험 공연장의 이층으로 들어간다. 루비가 선택한 곡은 조니 미첼의 Both sides now였다. 처음에는 긴장을 많이 해서 선생님의 반주와 맞춰서 나가지 못하는 실수를 하기도 하지만, 루비의 아빠와 엄마, 오빠가 이층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경직되었던 마음이 녹아내리는 듯 보인다. 어느새 긴장은 온 데 간 데 없고 이층에 앉아 숨죽이고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가족들을 바라보며, 가족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수화를 함께 사용하며 노래를 부른다. 루비는 이야기한다. 노래를 부르지 않고 노래로 이야기한다.
3
이 영화를 백 번은 보고 싶다. 이 영화 한 편으로 내 인생에 필요한 모든 영화를 다 본 것 같다. 루비의 아빠가 루비의 노래를 진동으로써 몸으로, 그리고 마음으로 느끼는 씬에서 나도 루비의 목에 손을 대고 루비의 노래를 듣는 것 같았다. 온몸과 노동으로써 사랑하며 살아가는 아빠의 몸에도 손을 대고 있는 것만 같았다. 루비 아빠의 온 존재를 느끼며 전율하고 흐느껴 울 수밖에 없었다. 영화 속 밤하늘의 별처럼 마음의 은하수가 부서져 내렸다.
엄마 생각도 났고. 교회 생각도 났고. 가족 생각도 났다. 이런저런 생각들이 영화를 보며 영혼을 깊이 건드리고, 아득히 스쳐 지나갔다.
한동안, 나의 세계도 농인과 같았다. 적막하고 답답했다. 아무도 내 이야기를 이해할 수도 공감할 수도 없는 것 같았다. 나는 말을 할 수 없었고 들을 수 없었다. 나의 힘든 현실은 온통 꽉 막힌 세상에서 그저 온전히 나의 것인 것만 같았다.
루비의 아빠는 전체 영화에서 육성으로는 단 한 마디, 한 글자의 대사를 한다. 루비가 버클리에 붙고 집을 떠나 보스턴으로 향하던 아침이었다. 루비가 친구의 차에 타고 출발하다가 차를 세우고 뛰어와 가족들을 껴앉는다. 그리고 서로를 마주 바라보던 루비와 아빠. 아빠는 농인 특유의 외운 듯한 발음으로 몸을 다해 외친다. ‘고우어(Go).’
한 가지 생각은 더욱 확실해진 것 같다. 루비에게 세상으로 고우어하는 빳빳한 새 운동화가 노래였다면 나는 글쓰기와 독서일 것 같다는 느낌. 그렇지만, 그보다 먼저 사랑해야 한다. 살아있는 동안은 살아야 한다. 사랑하고, 살아서, 사랑으로써 살아야 한다.
‘오늘부터 쓰면 된다’의 저자 유인창은 글은 몸으로 쓰는 것이라고 한다. 삶도 몸으로 사는 것인 것 같다. 공부도 머리로 하고 삶도 머리로 사는 것인 줄 알았는데. 글은 재능과 손가락으로, 머리와 감정으로 쓰는 것인 줄 알았는데. 삶도, 사랑도, 그저 가만히 손을 대고 진동을 느끼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