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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겨울의 단상

에스프레소, 에스프레소

by jungsin



마음속에서 시를 찾아야 겠다




문득, 어디서부터 시작해야겠는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속에서 불현듯 한 문장이, 바다의 부표처럼 떠올랐다. 마음속에서 시를 찾아야겠다.





대화와 술과 음악으로 이루어졌던, 한바탕의 새벽이 갔다. 그리고 이렇게, 지금은 전기 히터 소리만 남았다. 아무 소음도 없는 상태가 감미롭다.


난 당연하게도 이전과 같은 사람이다. 그러니까 여전히 ‘사람’이다. 사람은 목이 마르다. 예나 지금이나 내가 결핍의 존재였던 것은 변함이 없다. 그러니까, 무언가에 목이 말라있던 상태. 깨어도, 잠들어도, 취해도, 맨 정신으로써 상쾌해도, 내가 그런 자신임은 한결 같았다.


하여서, 난 일찍이 목말라 있던 것들을 알아내야만 했다. 하지만 청춘의 시절 내내 그것을 정확히 알지 못했다. 몰라서, 막연하게 이렇게 생각하고는 했다. 아직은 내가 목말라 하는 것을 모른 채 찾아 헤메고 있는 시간들이라고. 알 것 같지만, 찾아봐야 알겠다고. 만지고, 먹고, 느껴봐야 알겠다고.


하지만 실은, 이미 나는 필요한 모든 것을 갖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지금도 이미, 여전히 갖고 있는 것이었다. 다만 이전과 똑같이, 내가 그것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분명히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일 뿐이었다.


그것은 사랑과 쉼, 이야기다. 복잡해 보이지만 모두 하나의 것들이다. 다시 표현해 그것들은 사랑이었다. 지금은 이렇게 어렴풋이나마 언어로 표현을 하며 더듬어 볼 수 있게 되었지만, 당시의 시간들 동안 나는 그것을 정확히 알지 못했다. 길고도 짧았던, 나의 청춘의 내내.





또 다시 바라지 않던 일이 일어났다. 깊은 어둠에서 깨어난 것이다. 또 수많은 숙제에 짓눌려 숨막히는 느낌의 하루를 보내야 한다. 그런 하루란 요컨대 이런 시간이다.


그래. 내 목을 조르는 많은 일들이 있지. 하지만 나에게는 아주 근원적인 좌절과 절망이 있어. 따라서 아무리 무거운 짐이 나를 짓누르려 해도 그렇게 부담스럽지는 않아. 압박, 하려면 해 봐. 어차피 지나갈 일들이야. 지금의 내게는 그런 고통 쯤 아무것도 아니야.- 라고. 이토록 슬픈 가장 무도회의 하루를 보내야 하는, 그런 일체의 하루를 보내야 한다.





일어나 보니 오른쪽 아래 잇몸이 조금 부었다. 실로 오랜만이다. 잇몸이 붓는다는 것, 입 안이 비위생적인 상태로 하루나 이틀 정도를 보내게 되었다는 것. 그런 상태로 자고 일어났다는 것. 그것도 하나의 행복의 자락이었는데. 그러니까, 행복에 겨워서, 그런 시절의 나는 급기야 이를 닦는 일도 안 해도 될 것만 같은 아련한 무드에 취해 보내던 시간들의 한복판에 있었는데. 오늘 부은 잇몸은 그토록 행복에 부은 잇몸이 아니었다. 그와 정반대였다. 절망에 방치된 잇몸이었다.


일어나자 마자 잠바를 입은 채, 카페에서 텀블러에 테이크 아웃해 온 카피를 전자레인지에 돌려 두고, 이를 닦았다. 새벽에 들어와서는 밀봉에 가깝게 뚜껑이 굳게 덮인 텀블러 그대로 냉장고에 넣어 두었었다. 그리고 차가운 냉장고 안에서도, 이제 겨우 열 두 시간 남짓 지났다.


프랜차이즈의 신선한 에스프레소. 에스프레소, 에스프레소. 에스프레소가 진해서인지, 그런데도 함께 들어있던 몇 개의 차가운 얼음 알갱이가 거의 녹은 듯했다.


엔트로피. 시간이란 원래 이토록 먹는 것과, 사물과, 생명마저 녹이는 힘을 가진 무엇인 걸까. 자기보다 묽은 것들은. 자기의 기준보다 덜 차가운 것들은, 혹은 덜 뜨거운 것들은, 그것의 어떤 진한 원액 안으로다 끌어들여 녹여 버리는 성질을 갖고 있는 걸까.





어제는 나의 첫눈이 왔다. 언젠가 첫눈이 이미 내린 듯 했는데, 나에게는 아직 아니었다. 거리를 걷는데 마치 행복한 것 같았다. 살아있는 것 같았다. 마치. 그렇게 나는 다시 흥분을 했다. 이런 설렘이 도대체 얼마만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오랜만의 설렘. 설렘. 설렘.


설렘. 입 안에 넣고 아무리 굴려도 질리지 않고, 또 아무리 그래봐도 내 것은 아닌 것만 같은 설렘. 이제 얄궂고 미운.




아주 오랫동안 나는 책으로 사면이 둘러쌓인 작고 음침한 방 안에서 시름시름 앓고 있었다. 책상과, DVD 플레이어와, 티브이와 전기 난방기구도 있었지만, 내게 책만큼 깊이를 가진 것들은 아니었다. 어쩌면 책상이라면 책 정도의 깊이를 가졌을까. 아무튼 나에게는 다 소비되어 사라져버릴 묽은 것들이었다. 책은 에스프레소였다. 엔트로피로 사라져버리지 않을 지도 모를.


나의 동네의 눈물겨운 스타벅스에 들어갔다. 크리스마스 분위기의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깊숙한 곳에 짐을 올려두고 앉았다. 나이든 아저씨가 화상 회의를 하고 있었고, 여자 두명과 남자 한명이 마주 앉아 젊음 특유의 긴장과 밝음을 붙들고도, 어딘지 달콤한 분위기를 우려내고 있었다. 일어나기 좀 전에 여자 중 누군가 말했다. 막걸리는 제가 살게요. 첫눈이 오는 날이었다.


건너편에서는 아주 젊은 연인이 마주 앉지 않고 나란히 앉아 있었다. 재잘재잘 티격태격하는 듯 하더니 이내 남자가 여자의 배에 손을 얹고 있었다. 쓰다듬는 것 같기도 했고, 그러는 동안 둘은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나 사랑하는지-와는 별개로, 서로에게 이미 아주 익숙해져 있는 사이인 것 같았다.



카페의 그러한 분위기가 설렜다. 그런 일체는 내게, 만져질 수 있을 것만큼이나 또렷한 겨울이었고, 따라서 나도 살아있는 것 같았다. 아니, 살아있는 것이 분명했다. 내가 살아있다는 것만큼은 선명한 사실이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가볍지 않고, 점점 무거워져 갔다. 정말이지, 무거움이 반가웠다. 조금도, 조금도 무거움이 싫지 않았다. 무거워져 가고, 주름져가고, 사라져 간다는 것은 나에게 가장 믿을만한 복음이었다. 나도 그렇게, 엔트로피를 넘어가면 마침내 그리워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 테니까.


자꾸만 플레이리스트에서 별이 빛나는 밤에 마지막 방송이 흘러나온다. 디제이와 청취자의 흐느낌 뒤에, 디제이가 간신히 입을 떼며 노래를 듣자고 한다. ‘옛사랑’이 흘러나온다. 남들도 모르게. 서성이다 울었지.


나는 자꾸 무언가를 듣고, 읽고 싶어 한다. 지금은 사라져가는, 가장 찬란했던 나의 생의 순간을 더듬어 보고, 에스프레소를, 엔트로피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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